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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와 보살 숭배
8.친란(親鸞, Shinran)
법연 사후 정토종은 수십년 동안 두 개의 학파로 분열되었다. 친란(親鸞, 1173-1262)은 항상
법연의 제자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전하려고 하였다. 친란은 실로 법연과
비교하여 자신을 경멸하면서 반성하였다. ‘현명한 스승[법연]에 대해 생각해 보면 안으로는
현명 하지만 외적으로는 어리석게 보인다.
이 어리석은 자[친란]의 생각은 안으로는 어리석으나 겉으로는 현명하다’(Foard et al. 1996:
331에 있는 Unno). 아마 이런 이유로 친란은 종종 조사이고 아미타불이나 관세음 보살의
화신으로 숭배되기도 하지만, 흔히 그의 종파에서 조차도 조사에 포함되지 않는다. 친란의
종파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이다.
친란의 생애에서 사실과 전설을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친란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지가 의문시되었다. 이 의문들은 친란의 사후 그의 아내가 쓴
편지가 1921년에 발견됨으로써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친란이 (적어도 한 번 이상) 결혼을
했으며, 자식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법연처럼 비예산에서 승려로 수행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그는 일본의 왕자이자 불교의 성인인 성덕태자로부터 꿈에서 가르침을 받은 결과로 법연의
애제자가 되었다. 그는 스승과 같은 시기에 승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 친란은 평범한 소작농과 그들의 일상생활의 문제들, 그리고 그들의 두려움을 직접
접하게 되었다. 최초로 그는 자신이 유배당한 일본의 외딴 지역에서 일반 민중들을 구제하기
위한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결국 모든 사람들, 특히 일본에서 가장 직위가 낮은 소작농들을
위한 성직자가 되었다(Bloom 1968: 16 이하).
친란은 유배당한 이후에 결혼했던 것 같다. 그는 재가인의 삶에 익숙하지 않은, 승직을
박탈당한 자였다. 그는 스스로 승려도 재가자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비록 결혼을 했지만 그는
승복을 입고 승려처럼 하고 다녔다. 그는 법적으로 더 이상 승려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재가자의 세속적인 태도와 갈망이 없었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법연과 함께
사면되었지만 이후에도 그는 결혼한 재가자로 남았다. 그는 사찰을 세우지 않았고, 당시에는
그러한 사적인 집단은 실제로 불법행위 였지만, 추종자들과 개인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친란의 결혼은 재가자와 승려의 구분을 부정하는 가시적인 상징이 되었다. 왜냐하면 자력은
해탈의 수단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의 눈으로 보면 승려와 속인이라는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 든 사람은 깨달을 수 있고, 깨달음은 승단만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친란은 결혼이 구도의 길을 가는데 서로의 발전을 도와 주는 동료와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을수도 있다.
한편 친란의 자식[선란(善鸞, Zenran)은 친란에게 부자지간의 의절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정토진종 내부의 종통(宗統)을 발전시켰다. 친란 사후 수세기
동안 정토진종의 사찰들은 넓은 영토를 지니게 되었고, 결국 사병들도 완비하게 되어
정토진종 승직자는 때로 단순한 아미타불의 신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봉건 귀족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서원(정토진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18가지 서원)은 바로 세속의
번뇌에 빠진 자, 즉 탐욕스럽고 분노하며 무지하고 악한 자, 다른 방법으로는 전혀 구제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친란의 주요 작품은 정토진종 조사들의 작품과 경전들에서
발췌하여 자신이 주석을 단 『교행신증(敎行信證, Ky?gy?shinsh?)』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제자(혹은 ‘동료’) 중의 하나인 유원(唯源, Yui-en)의 짧은 작품 『탄이초
(歎異抄, Tannish?)』에 가장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다. 이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 유원은 친란에게 들은 내용을 적고 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친란 사후에 발생한
논쟁과 오해 가운데 많은 문제들에 대한 친란의 가르침을 명백하게 하였다.
친란은 아미타불이 바로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는 중생들, ‘욕망에 완전히 가려진 어리석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출발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서원은 바로 친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그것이 그가 자신의 신심과 타력에 의지하는 것이 더욱더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이유이다(Hirota 1982: 27).
아미타불의 서원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는 윤회의 가장 낮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유원은 자력 구제에 대해 헐뜯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주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려운 길을 쉽게 갈 수 없다(앞의 책: 31). 친란은 스스로 “거대한 욕망의
바다에 빠졌다”고 하고, “명예라는 커다란 산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다.”고 묘사하였다.
“오, 얼마나 부끄럽고 가엾은 일인가!”(Bloom 1965: 29).
그는 끊임없는 종교적 수행이라는 자력의 길을 통해 붓다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죄인이며 지옥에 빠질 운명이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쨌거나
그는 지옥에 갈 운명이고 그러므로 도박을 한다고 해도 잃을 것이 없고 법연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해도 잃을 것이 없다. “다만 이름을 염송하라, 그러면 아미타불이 그대를 구제해 줄
것이다.” “그 밖의 것은 상관이 없다”(Hirota 1982: 22-3). 친란은 아미타불의 서원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아미타불의 대서원(大誓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니 … 그것은 완전히 나를 위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깊고 무거운 업에 결박되어 있을 때, 나 같은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에 충심으로 감사한다.” (Hirota 1982: 43)
친란은 법연처럼 자신의 죄의식과 무능력에서 인간의 보편성을 끌어 냈다. 친란뿐만 아니라
우리도 모두 역시 이처럼 죄악으로 점철되어 있다. 인간은 이타적인 행위를 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선한행위를 할 수 없다. 중생은 자기중심적이다. 따라서 붓다와
비교해서 깨닫지 못한 존재로서 우리는 본래부터 악한 존재이다. 결국 인간의 행위는 성불로
이끌 수 없으며 성불은 공덕이나 선한 행위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Hirota 1982: 29-30; Bloom 1965: 32 이하).
무아의 개념이 가지는 유일한 의미는 선악의 업보를 떠난 것이고, 전적으로 본원(本願)에
맡기고, 타력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유원어록』). 아미타불은 죄를 범한 중생도 구제한다
(Hirota 1982: 34). 친란은 불교가 무아론에 근거한다면 타력만이 완전히 맡기는 것이고,
자아에 대한 모든 개념들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한다고 주장한다. 요시부미 우에다
(Yoshifumi Ueda)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친란의 불교에서 중생의 마음은 붓다의 힘에 의해 변화하므로 붓다의 지혜를 얻는다. 이
신심의 자각은 우리의 마음과 점차적으로 깊어진 인간의 믿음을 통해 발생한 붓다의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다.―아마 이것이 신심과 우리의 믿음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의
근본적인 차이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우리의 모든 노력과 의도가 무의미함으로 사라지고,
무능력과 자기중심적 집착들에 의해 오염된 것에서 발견되는 완전한 부정을 통해 발생한다.
이 부정에서 우리의 욕망으로 가리워진 마음들은 지혜―자비로 전환하고, 동시에 그들은
존재 자체로서 남고, 또는 오히려 근본적인 본성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된다. 신심으로 자각한
지혜와 함께 우리는 우리를 그 자체로 볼 수 있고―어리석은 중생의 모든 행동은 수겁의
악업으로 조건 지어진 것이고, 욕망에 지배받는 것이고, 전적으로 진실과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본원력의 작업을 아는 것이고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친란은 자신의 가르침을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다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고 한다.
그는 업의 법칙을 부정하지 않는다. 만약 사악한 짓을 한다면 여전히 고통이 뒤따른다.
친란은 『일매기청문』에서 “해독제를 손에 들고 있다고 독약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Hirota 1982: 34).
친란은 참된 신자라면 욕망을 성취하겠다는 이기심으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오히려 염불과 같은 선한 행위들은 자연스럽게 자신 안의 본성에서
흘러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혀 선행을 할 수 없는 자아에 지배당하는 개인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이것의 어느 것도
(자기 자신의) 공덕이 아니다.
수행자는 단순히 맡기고, 아마티불의 구원의 약속에 진실한 신심만 내면 된다. 또한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위’ 또는 종교적 의무도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없다. 사실 염불하면서
암송하는 목소리도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염불하는 수행자의 입을 통해 나오는 아미타불의
목소리이다.
그렇지만 아미타불의 구제력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 자유 의지에 대한 엄격한 부정과
결합되면 윤리적 행위에 대한 논리의 일관성에 약간의 문제를 남긴다.
친란의 정토를 연구하면서 우리는 금욕적이지 않고 진실로 쉬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적어도, 심리적으로 정확한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정토의
방법이 쉬운 길이므로 참된 보살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채택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았다. 그들이 이행도를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다.
친란에 의하면 중생은 자력에 의해 구제될 수 없으며 오로지 타력으로만 구제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오직 아미타불과 그의 서원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 이 믿음이
일어날 때 자아는 사라진다. 자아가 사라질 때 “갈망의 고통과 사악한 장애는 깨달음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친란은 ‘신심’을 자신의 입장에서 계획된 의지작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구원이 믿음에서 나오고 자신이 믿음을 만들어 낸다면 구원은 자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친란이 말하는 신심 (信心) 은 완전한 해방이며, 따라서 죄 많고 이기적인 개인에게는 생길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토진종의 믿음은 매우 어렵다. 자아는 항상 이기적이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이란 어렵고, “어려운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다”(『Shinran』 1997,
Vol. 1: 344; Bloom 1965: 41).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면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타력이기 때문에 구제할 수 있다. 즉 믿음은 내부로부터
빛나는 아미타불 자체의 행위임에 틀림없다.
친란은 믿음을 진실함, 깊은 믿음, 그리고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서원으로 정의한 선도의
관점을, 이들에 수반된 행위가 아니라 그 태도를 강조하면서 수용했다(Bloom 1965: 38). 이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진실한 태도이며, 이 세 가지 모두는 우리 내부에서 활동하는 타력인
아마타불의 선물이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은 어떤 것에 대한 의지적인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불성의 명확한 표현이다(『Shinran』 1997, Vol. 1: 97 이하; Bloom 1965: 39
이하). 이러한 사실은 아주 중요하며, 친란의 사상을 곧바로 동아시아 불교 이론의
발전선상에올려놓았다. 그것은 타이테추 우노(Taitetsu Unno)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낸
관점이다(Foard et al. 1996: 319-20에서).
신심은 … 객관적으로 파악되는 외부 대상에 의지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 한정된 자신이
아미타불의 무한한 수명을 지니고 있는 대한 비이분법적인 자각이다. 정토종에서 ‘타력’을
말하더라도 그것은 일반 적인 의미에서의 ‘타자(他者)’가 아닌 것이다. 방언으로 쓰여진
종교시집을 남긴 나무 게다를 만드는 무식한 사이치는 말한다. “자력도 없 고, 타력도 없다.
모든 것이 타력이다.”
중생은 이미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도원이 말한 것처럼 오로지
붓다만이 붓다가 된다. 우리는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아가 자아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타력 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며,
바로 핵심은 타력 혹은 아미타불인 불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아의 자력을 넘어서 있는
타력이다. 그리고 불성으로서의 그것은 자체로 무분별이므로 주관과 객관을 넘어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믿음이 자력이라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신심은 (말하자면) 반드시 타력이다. 오직 타력만이 우리를
구제할 수 있다. 신심이 아미타불 자체인 자신 안의 불성을 비추기 때문에 오로지 신심만 지닐
수 있다. 모든 중생은 믿음을 통해 구제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노력을 멈추고 불성이 믿음을 빛나게 하기만 하면 된다. 불성은
붓다이며 아미타불 자신이다. 그리 고 중생은 그의 광명, 즉 자비심에 의해서만 구제될 수
있다.
믿음은 이러한 의미에서 아미타불의 은총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그 외의 방법으로는 믿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친란은 모든 공덕의 회향은 아미타불로부터 중생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중생의 공덕이 정토에 태어 나는 것으로 회향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중생들 자신은
공덕을 지니지 못하므로 회향할 것이 하나도 없다. 만약 그것을 자력에 맡겨 둔다면 중생은
결코 정토에 태어나지 못할 것이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다(Bloom 1965: 49).
믿음이 생길 때, 그리고 불성이 빛을 발할 때, 중생은 곧바로 정토에 태어난다는 보장을
받는다. 즉 이미 구원된 것이다. 정토에 태어난다는 것은 정해진 것이다. 즉 자아에 의지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한 수행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불퇴전지’의 진전된 보살의 단계를
얻는다.
그런 고로 염불 수행자는 미륵과 같은 경지에 이른다(『Shinran』 1997, Vol. 1: 455; Foard et
al. 1996: 345에 있는 Unno). 그러므로 해탈은 성취된다(Bloom 1965: 50-1, 59). 정토의
가르침은 돈오(頓悟)이다. 바로 이 생에서 믿음이 생겨나는 순간 깨달음을 결정적으로
보장받는다. 친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아미타불의 타력의 선물인 커다란 서원과 만났을 때, 진실한 믿음이 제공하는 기쁨으로
마음이 안심되었을 때, 그리고 그가 우리를 받아 들였기 때문에 금강석 같은 마음을 지니게
되었을 때, 진실로 보장받은 무리 속에 사는 것이다. (Bloom 1965: 61-2)
믿음이 생겨난다면 열렬히 아미타불의 이름을 염송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염불이 어떤
의미에서는 구원을 주지 않는다. 특히 죽는 순 간 염불하는 것이 정토를 얻는 데 중요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죽음에 임박했을 경우 정토에 태어나기 위한 전략으로 염불을 계속
하거나, 임종 현장을 위한 정교한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 신심이 진실로 일어나는 순간
정토에 태어나는 것을 보증한다(Hirota 1982: 36- 7).
그러나 신심은 자력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어떤 행동도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모순이 될 것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현현은 염불의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이다. 그것은 ‘신자가 아미타불에게 거대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행하는 찬양과 감사의 상징’이다(Bloom 1965: 73). 정토진종에서 감사는 삶을
사는 한 방식이다. 유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토에 태어나는 것에 관한 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어떤 의도도 없이 아미타불의 깊은
자비와 그것에 대한 고마움을 끊임없이 그리고 의식하지 않고 암송하는 것이다. 그때 염불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진언의 의미이다. 진언은 다름 아닌 모든 계산을 떠난 것이다. 그것이
타력이다.
이 불퇴전지의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 그 자체로 정토를 얻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유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미타불의 서원이라는 배에 올라탔을 때 우리는 이 생사의 고해를 건너고, 정토의 피안에
도달한다. 그때 존재의 참된 본성을 자각하는 달이 곧바로 나타날 것이고, 시방세계를
남김없이 비출 것이고, 우리 는 일체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달음을
얻는다. (Hirota 1982: 38)
그러므로 친란에 의하면 마침내 아미타불이 외부의 대상인 붓다가 아니라 오히려 주관과
객관의 모든 개념을 초월한 불성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정토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야 할 곳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진정으로 아미타불에 맡기고
아미타불과 그의 서원에 의지함으로써 우리는 현생에서 완전한 불퇴전지를 얻고 죽음에
이르러 곧바로 깨닫는다.
죽음에 이르러 우리는 불성·아미타불·진여를 얻는다. 이 신심이 없다면 윤회는 계속되고,
우리의 이 기적인 행위에 따라서 윤회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여기서 깨달음은 분명히
지혜를 포함한다. 지혜는 직접적으로 승의제를 보는 것이 고 존재에 대한 여실지견을 갖는
것이다. 자비를 통한 깨달음(성불)의 이 입장에서 수행자는 ‘하강하고’, 일체중생의 이익을
위해 언제 어디서 나 활동한다. ‘지금 수행자는 일체중생의 구제를 위한 일을 어떤 방해 도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다’(Foard et al. 1996: 341, 345-7에 있는 Unno). 그러므로 깨달음이
대승불교 신앙으로 인정할 수 있다.
반면에 모든 정토학파에서는 인간이 죽는 순간에 정토를 획득하여 그 결과 깨달음을
명확하게보증받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친란은 분명히 믿음이 일어나는 이 삶에서
깨달음이 생긴다고 했기 때문이다. 죽을 때 그 즉시 깨달음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정토는 친란이 이해하는 것처럼 나무·집·연못이 있는 마지막 안식처로서의 아름다운
불국토가 아니다.
비록 이러한 모습들 때문에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오히려 정토는 불성 자체, 법신 (法身), 또는 『유마경』에서의 청정한 마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일으킨 무아와 완전한 해탈을 통해,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한 완전한
불성을 얻을 수 있다.
친란의 체계는 대단히 완벽하지만 과연 불교적인가? 친란은 그것을 자신의 『교행신증』에서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이유는 보리심, 즉 중생들을 돕기 위해서이며 자기 자신의 행복이나
쾌락을 구함이 아니라고 분명히 하였다(『Shinran』 1997, Vol. 1: 167-70, 특히 168). 이
보리심은 대승의 개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방편들
중의 하나인 보리심으로 인해서 정토진종은 충분히 대승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 더 덧붙이지면 믿음은 완전한 무아·공성의 결과이며, 정토는 고차원적인 표현에서의
불성 또는 법신 자체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타이테추 우노가 지적하듯이
친란은 ‘무한한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불교의 깨침을 가장 깊이 실현하는 것에
버금가는 것이다’라고 한다(Foard et al. 1996: 345).
대부분의 모든 정토종은 마음을 다스리고, 탐욕·성냄·어리석음을 끊고 그 반대로 ‘악한
행위를 버리고 선한 행위를 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비록 이러한 의미에서 친란 체계의
표현이 확실히 상좌부나 게룩학파와 매우 다르 지만 수행에 있어서 정토 현인들[묘호인
(妙好人, my?k?nin)]의 이야기를 생산한 정토종은 종종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비록 자력과 무 아사상이 서로 충돌하고, 자력과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불성의 무분별한
상태가 서로 충돌하지만 친란의 정토사상이 자력을 비난한 것도 사실이다. 친란의
정토사상은 그러므로 다른 종파보다 불교의 지혜의 가르침에 더 진실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불교의 본질은 자력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보는 불교 이론사에 의하면 대부분의 대승
역시 불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널리 영향을 끼친
정토불교는 자력을 배제한 다른 어떤 불교보다도 보편적 해탈과 자비심이라는 대승불교의
정신에 훨씬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친란은 자신의 한 작품 끝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Shinran』 1997, Vol. 1: 469)
글자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으로 무지한 시골 사람 들은 똑같은 일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 이상한 글을 발견하고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에 신경쓰지 않고, 나는 무지한 사람들이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 작품을 쓴다.
따라서 지혜와 자비라는 불성의 두 구성 요소의 입장에서, 친란의 정토종은 다른 종파보다
더 진실한 대승불교라고 주장할 수 있다
마지막 분석에서 물론 친란의 정토진종을 배제하고 불교를 정의하는 것은 결국 이미 답을
정해 놓고 논쟁하는 것과 같다. 사실 친란의 사상은 불교적이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도
불교라고 했으며, 그들의 변한 사상과 영향력의 근원을 중국, 그리고 인도, 또한
붓다에게까지 거 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불분명하고 변하지 않는 불교 교리의 핵심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진리―결국
그것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는 영원하다 해도 역사 속 종교의 하나인 불교는 불변하는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불교는 필자의 생각에 독자들이
동참한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