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1권 2-21
2 기행紀行 21 모진母津 모진 나루터
모진초해람母津初解纜 모진에서 닻줄을 막 풀었는데
양류만조생楊柳晚潮生 버들 가에 늦은 밀물 올라오누나.
담담사정원淡淡沙汀遠 담담한 모래사장 멀리 뻗었고
망망연수평茫茫煙樹平 아득하게 내 낀 나무 가지런하네.
한구분저박閑鷗分渚泊 한구閑鷗는 물가에 나뉘어 쉬고
명월공선행明月共船行 밝은 달은 배와 함께 옮겨 간다.
묘묘수운외渺渺水雲外 아득한 물과 구름 그 밖으로
일신귀거경一身歸去輕 내 한 몸 돌아감이 가벼우리.
모진나루에서 닻줄을 풀자
늘어진 버들가지에 저녁 물살이 들이치네.
모래사장은 어렴풋하게 아득하고
자욱하게 안개 낀 숲이 드넓다오.
물새는 모래섬 곳곳에서 날개를 접고
밝은 달이 배를 따라 함께 간다네.
강물 저 멀리 멀고 먼 구름 밖으로
이 한 몸 가뿐한 마음으로 돌아간다네.
►모진母津 춘천 소양강昭陽江의 나루터
►해람解纜 출범 ‘풀 해解’ ‘닻줄 람(남)纜’
►담담淡淡 욕심慾心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 ‘淡 맑을 담, 질펀히 흐를 염’ 맑다. (빛깔이)엷다
►사정沙汀(砂汀) 바닷가의 모래톱. ‘물가 정汀’ 물가(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모래섬물 맑은 모양
►망망茫茫 넓고 멀어 아득한 模樣, 어둡고 아득함.
‘茫 아득할 망, 황홀할 황’ 아득하다, 드넓다. 흐릿하다, 멍하다
►한구閑鷗 갈매기 ‘갈매기 구(우)鷗’
►저박渚泊 저류하다 ‘물가 저渚’ ‘泊 머무를 박/배 댈 박, 잔물결 백’
►묘묘渺渺 일망무제하다. 그지없이 넓고 아득하다. ‘아득할 묘渺’
●모진母津 모진 나루에서/원천석元天錫(1330-?)
1
자안원별거년추慈顔遠別去年秋 지난해 가을 어머님을 멀리 보내드린 뒤에는
오매사량한미휴寤寐思量恨未休 자나 깨나 사무치는 그리움이 끊이질 않네
직도강변배초창直到江邊倍怊悵 곧장 강변 나루에 도착해보니 서글픈 맘 더해지고
암장쌍루쇄청류暗將雙淚灑淸流 문득 남몰래 흘리는 두 줄기 눈물이 맑은 강물을 적시네.
2
수파자친호차진誰把慈親號此津 누가 어머니라고 이 나루터를 이름 지었나
조남모북자래인朝南暮北子來人 아침에는 남쪽, 저녁엔 북으로 자식처럼 오가는 사람들
원장차수위감유願將此水爲甘乳 원하노니 이 물을 모두 달콤한 젖을 만들어
보양리친천하민普養離親天下民 널리 어버이 떠난 온 세상 백성들을 양육하고 싶어라
누가 이 나루터를 어머님나루라 이름 지었나
아침저녁 남쪽과 북쪽에서 자식처럼 뵈러 오는 사람들.
청컨대 이 강물이 달콤한 젖이 되어서
어버이 곁을 떠난 온 세상 백성들을 널리 보살폈으면.
►모진母津 소양강昭陽江 나루. 강원도 春川 서북쪽에 있음
►자慈 사랑. 어머니. 자비(慈悲)
►오매寤寐 자나 깨나.
►사량한思量恨 사무치는 그리움
►초창怊悵 낙담하다. 서글픔. 비분(悲憤)
►장將 청請컨대. 문득. 무릇
►파把 잡다. 거머쥐다. 여기서는‘이름 지어 부르다’는 의미.
►자친慈親 자애로운 어머님. 남의 모친에 대한 존칭尊稱
►보양리친普養離親 어버이와 헤어진 자식들을 널리 보살펴 기름
►원천석元天錫(1330-?) 고려 말기ㆍ조선 초기의 은사隱士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 원주 원 씨의 중시조.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인으로서 진사가 되었으나 혼란한 정계를 개탄하여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하면서 당시 사적을 바로 적은 <야사野史>6권을 저술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해 1360년(공민왕 9)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이방원李芳遠(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이방원이 왕으로 즉위하여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종이 원천석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 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준 후 돌아가
아들 원형元泂을 기천基川(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했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원천석이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해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이 고려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 왕조를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客이 눈물겨워 하노라.”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온다.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문집에 실린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있다.
대표적인 시로는 우리나라 2賢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崔瑩을 기린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前摠宰六道都統使崔瑩>과
우왕·창왕을 중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해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해 읊은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이 있다.
이 시에서 원천석은 만일 왕씨 혈통의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느냐고 힐문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 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신연강新延江 모진나루터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위치한 하천이다.
의암댐의 축조로 인하여 현재 의암호가 되어 버린 신연강은
소양강과 북한강이 합쳐서 가평 쪽으로 흐르던 강이었다.
지금의 경춘국도가 생기기 전 송현동~신연강나루~덕두원~석파령~당림리로 통하는 길이
서울과 춘천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을 때 신연강나루는 춘천의 관문이 되어 번창하였다.
신연강나루는 1939년에 신연교(지금의 의암호다리)가 만들어지면서 쇠퇴했지만
지금도 강 양쪽의 문암과 삼악산이 경치가 아름다워 소금강이라 불리고 있다.
<춘천의 지명유래>에
"신연강은 소양강과 화천에서 흘러오는 북한강(모진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가평까지 이르는 사이의 강이다.
옛날에는 북한강 즉 모진강에는 모진나루터로 유명했다.
서울에서 소금배가 올라오고 특산물을 싣고 내려가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신연진新淵津은 부의 서쪽 15리 소양강 하류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춘천읍지>에는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소양과 장양이 합류하는데 경성과 통하는 직로로서 정자 터가 있고 진부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서>에는 "모진, 소양 두 강이 합쳐져 신연강이 된다.
양근楊根[지금의 양평]의 용진강龍津江으로 유입된다.
관문官門으로부터 서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다."고 전하고 있다.
<대동지지>에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모진강의 하류이다."고 기록하며
<관동지>에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소양강과 모진강이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양근楊根의 용진강龍津江이 된다."고 묘사하고 있다.
<조선환여승람>에는 "군 서쪽 15리에 있다. 소양·장양 두 물이 합하여 경성직로를 통과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내용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신연강은 모진강과 소양강이 모여 이룬 강이며
구간은 합류지점부터 양근(양평)까지이고 합류지점은 춘천부 서쪽 10리 내지 15리 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오늘날의 북한강 수계에 포함되고 있음도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모진강과 소양강의 합류부는 의암호로 인하여 수몰되면서 없어지고
호수에는 중도와 붕어섬이라는 독특한 경관이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