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 . 52
박명자 시인
내가 박명자(朴明子) 시인을 만나면 ‘박명자 누님’이라 부르고 그는 나에게 ‘김송배 아우님’이라 부르면서 상례(相禮)를 갖춘다. 그는 언제나 조용한 인품으로 우리 문단에서 지적(知的)으로 다소 근엄한 활동하고 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1980년대 초 심상해변시인학교가 강릉, 주문진, 속초 등 동해안에서 열릴 때 서로 조우(遭遇)를 하게 된다. 그후 30여년을 한결같이 서로 문학적인 정보를 교환하고 또한 문협 행사에서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제12시집 『떠도는 나무』에서 ‘시인의 말’을 통해 그의 소망을 진지하게 피력한 바가 있다. ‘우리 모국어의 고유한 민족혼이라는 텃밭 위에 좀더 신선한 시적 기교를 새롭게 꽃피우고 싶습니다. 보다 산뜻한 언어와 사물화 방향으로 저의 시를 몰고 가며 사물의 본질에 육박하려고 노력합니다.’라는 비장한 언술은 그가 지금까지 창작해온 시법에서 다소 변화의 기치(旗幟)를 세우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나는 그의 간곡한 부탁으로 어줍잖은 해설을 붙이면서 「탈관념 혹은 디지털 은유의 확대」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그의 시풍(詩風)이나 전망에 관해서 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한 적절한 견해였는지는 아직도 미지(未知)의 장으로 남아 있다.
박명자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거나 보여주고 싶은 진실은 바로 이러한 디지털 적인 영상을 새롭게 투영함으로써 시적인 변화를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종전의 11권 시집에서 아날로그의 방식을 모색했다면 이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서 좀더 세밀한 투사(投射)의 절정을 위한 시법의 연출이 한결 낳은 주제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순정적인 단순 이미지로 시를 창작하던 보편성을 초월하여 다원화한 현실성과 조화를 이루면서 융합하고 화해하는 상상력의 재생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망되는 사회적인 현상이며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탈관념에서 시각화하는 사물적 요소들이 더욱 자연과 인간의 시공(時空)을 자유롭게 넘나들 때 형이상시(形而上詩)의 개념도 동반의 시학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박명자 시인은 강릉에서 출생하여 강릉사범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교직에 있었다. 1973년 『현대문학』에「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4월」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는 [갈뫼]동인과 [강원여류산까치] 동인 그리고 강릉여성문학인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 발전위원, 강릉사랑회 이사로 있다.
그는 다른 여성시인들이 간과(看過)하기 쉬운 정한(情恨)의 카테고리에 머물지 앟고 사물의 본성에 육박해가는 솜씨가 특이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집으로『아흔 아홉의 손을 가진 4월』(79),『빛의 사내』(85),『바람의 생명율』(88),『나무의 은유법』(90),『자유의 날개짓』(91),『매일 다시 일어서는 나무』(93),『시간의 강하』(96),『혼자 산에 오는 이유』(99),『시간의 흔적들을 지우다』(02),『잎새들은 톱니바퀴를 굴리며 간다』(06),『2시 15분의 청보리밭』(09),『떠도는 나무』(11) 등 12권을 상재하였으며 올해에 제13시집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업적이 인정되어 제5회 강원문학상(86)과 제2회 속초문학상(91), 강원도 문화상(92), 문교부의 연공상(96), 제7회 관동문학상(97), 목련장(99), 제3회 공무원문학상(05) 그리고 제30회 조연현문학상(11)을 수상하는 영광도 안았다.
그는 특히 ‘나무’와 연관된 작품을 다수 창작하였는데 그가 이처럼 그동안 출간된 시집의 제목에서만 보아도『나무의 은유법』『매일 다시 일어서는 나무』『잎새들은 톱니바퀴를 굴리며 간다』『떠도는 나무』와 같이 그에서 일관되게 탐색할 수 있는 것은 ‘나무’라는 사물에서 근원적인 시적 이미지를 투영하면서 그 ‘나무’ 앞에서 삶을 성찰하거나 현대인들의 고뇌를 위무(慰撫)하고 있다.
내 마음 빈터에는 오랜 시간 / 어깻죽지 들썩이며 울며 흐르는 / 나무 한 그루 홀로 지나가노니 // 비안개 덮인 여름 들판에서는 /
모두가 한세상처럼 서로 가슴을 포개고 / 따슨 손을 잡았지만 // 이 늦은 계절에 모두가 돌아들 가고 있구나 / 모두가 떠나버린 빈 들녘에 // 떠도는 나무 한 그루
이 작품 「떠도는 나무」중에서와 같이 곳곳에서 풍겨 나오는 나무의 향기와 나무의 노래에 젖어본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그에게서 ‘나무’는 종교의 경지에 있는 구원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삶의 단면이며 자기를 담금질하는 사랑의 회초리라고 할 수 있다.
박명자 시인은 그의 글「나의 시와 키워드」에서 ‘내가 요즘 시에서 추구하는 시적 테크닉은 기존 관념의 해체이다. 한국시 100년을 꾸준히 지배해온 단선구조의 틀을 선뜻 깨뜨리고 다선구조의 모양새로 디자인 하고자 땀 흘리는 작업에 온통 시선이 꽂혀있다. 과거 시인들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전환시키고 정적 이미지를 동적 영상 쪽으로 가지를 뻗게 하고 있다. 또한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 편집으로 상상의 폭을 확산시키면서 끓어 넘치는 감성의 대양을 혼자 헤엄치기도 한다. 그리하여 나는 시 앞에서 깊이 고뇌하며 땀 흘리지 않는다. 잘 구워진 항아리처럼 각고의 결실로 발효되어 솟구치는 시가 아니라 순간순간 변하는 질료의 우연성에 의하여 표출되는 퍼포먼스 같은 것이라고 할까...--중략-- 그러나 나는 시 작업에서 늘 자유롭고 신나는 게임을 즐기듯 혹은 굿판의 무당처럼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를 종횡 넘나들면서 상상의 폭을 이중구조로 실타래처럼 엉키게 한다.’는 심정으로 시적 논조(論調)를 정리하고 있어서 공감을 유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 세계는 이미 조병무 교수가 ‘시인 박명자는 멀티시대의 문학의 변화에 많은 자문을 던지고 있다, 현대라는 문명은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을 변화 또는 변혁이라는 설정된 언어에 의해 질서와 혼란을 동시에 공유시키는데--중략-- 사실 박명자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흔히 말하는 의식의 세계나 잠재적 관점보다는 멀티적인 화상의 복합화 내지 다면성에 있다. 그래서 그는 일원적인 대상을 보기보다는 다원적 대상에 접근한다.’는 점을 통찰해 보면 그가 추구하고 탐구하는 작품들은 다분히 ‘멀티적인 화상의 복합화’에 심취한 듯한 시적 전개와 그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는 어디에서는 ‘나는 요즘 <하이퍼시> 테크닉에 푹 빠져있다. 그리하여 시 앞에 깊이 고뇌하지 않는다. 순간순간 변하는 우연성에 의하여 표출되는 일종의 퍼포먼스 같은 것이 내 시의 모양새이다.’라거나 ‘요즘 나는 디지털리즘. 혹은 초현실주의 테크닉을 바라보며 혼자 즐기고 있다.’라는 확고한 시풍(詩風)은 많은 변화를 여망하고 있다.
그의 시를 향한 열정과 이의 성취를 위한 삶의 방식(혹은 존재의 방법)은 불변의 이성적 사유(思惟)의 정립으로 영원성을 확인하게 된다. 작년에는 내가 주관하는 청송시인회 초청시인으로 상경하여 회원들에게 시창작의 조언을 열강해서 갈채를 받기도 했다. 강릉 쪽에 폭설이 며칠째 내렸다는 보도가 연일 나오는데 피해는 없으신지... 박명자 누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