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참에 속한 역의 운영, 역리와 노비의 차정(差定) 및 관리, 관사보수 등을 관할했다. 역제는 국가기구 운영에 필수적인 조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정비되었다.
고려시대까지도 역의 운영은 역장(驛長)과 역리(驛吏)가 했고 정부에서는 가끔 관리를 파견하여 순시했다.
이런 관리의 종류로는 역순관(驛巡官)·제도관역사(諸道館驛使)·정역소복별감(程驛蘇復別監) 등이 있었다.
고려말에는 사회혼란으로 인해 역제가 크게 문란해졌는데,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관료들이 역을 개인적으로 많이 이용했고, 이로 인해 부담이 커진 역리들이 도망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공양왕 때 조준(趙浚)의 건의로 역마다 6품관을 역승(驛丞)으로 임명하여 역을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수많은 역마다 참상관(參上官)을 두는 것이 어려워 조선시대 태종 때부터 역참의 일정한 지역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정역(程驛) 찰방이 다시 등장했다.
이후 찰방과 역승제는 논란을 거듭했으며, 〈경국대전〉에 의하면 역승(종9품)과 찰방이 병존했음을 알 수 있다. 인원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함경도에 3명씩, 경상도에 5명, 나머지 도에 2명씩 두었다.
그러나 이때 역승은 조준의 안건과는 달리 찰방 아래에 다시 일정한 역참 전체를 책임지는 직책이어서 이중적인 관리체제가 된 셈이다. 실제로 역승은 품계도 낮고 서리(書吏) 거관자를 위한 관직이 되어, 근무에 성실하지 않고 폐단만 일으킨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535년(중종 30)에 역승을 폐지하고 찰방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역정(驛政)보다도 수령감찰·진제(賑濟)·군기점검 등의 감찰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다른 감찰관과 달리 암행감찰을 하기도 하여, 조선 후기에 발달한 암행어사의 선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