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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이해를 위하여
집필자 관음정사주지 법상(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1.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대한 해제(解題)
거룩한 삼보께 귀의하옵니다.
불교를 공부하려면 믿음을 전제로 하고, 믿음은 확실한 이해가 요구되며, 이해된 내용은 실천수행(實踐修行)하여 자내증(自內證)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장구한 세월과 함께 드넓은 공간을 점유하면서 다종다양하게 전개되어왔습니다. 북방의 부파불교에 전해진 제일의 논서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고, 남방에 전해진 상좌부의 대표적인 논서가 ≪청정도론≫이며, 티벳의 핵심적인 논서가 ≪보리도등론≫과 ≪보리도차제광론≫·≪비밀도차제론≫이라면 대승현교의 대표적인 논서를 여러 가지로 언급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하 기신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신론≫은 중국과 한국의 불교학과 수행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교학과 수행에 체계를 세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 처음 입문하여 불교를 공부하려고 하는 불자는 반드시 이 ≪기신론≫을 공부해야한다고 합니다.
이 ≪기신론≫의 이해를 위하여 우선 본 논의 본문에 충실하여 여러 자료를 참고하면서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즉,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것보다는 ≪기신론≫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도록 할 것입니다. 여러 사상적 맥락이나 연구서를 검토해보면 너무나 방대하고 난해한 점이 많아서 자칫 ≪기신론≫ 자체가 무엇을 전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는 경향이 짙습니다. 따라서 본 강의에서는 ≪기신론≫의 본문을 중심으로 이해를 돕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전문적인 연구는 개별적으로 연구해보시길 바랍니다.
먼저 그 제목에 대해서 살펴보면 '대승(大乘)의 믿음, 또는 대승에 믿음을 일으키는 논'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즉, 나와 남, 우리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대승(大乘)에로의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 저술된 논(論)]으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제목의 의미를 살펴보는데 논자(論字)로부터 역방향으로 짚어나가겠습니다. 이 논(論)은 부처님과 모든 보살 성인(聖人)들의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구도자(求道者)에게 정견(正見)을 바로 세우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견이란 수행의 바른 길을 아는 것이며,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냅니다. 여기에서는 마명보살의 말씀을 통해서 정견을 구도자에게 보여주어 괴로움의 해결로 바르게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구도자로 하여금 믿음을 일으키고 나와 남의 괴로움에 대한 자각과 보리심(菩提心)을 개발하게 함으로써 실제 수행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이를 좀 더 살펴보면 신(信)은 부처님이나 성인의 말씀을 믿고 수행의 길로 들어서는 첫 출발의 마음입니다. 논(論)이란 성인의 말씀이므로 믿음을 일으키게 합니다. 여기서 믿음 즉 신(信)이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대한 확신입니다. 부처님과 보살, 조사스님들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들어가는 것이 확신입니다. 왜 믿을 수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부처님이나 성인들은 모두 괴로움을 해결하신 산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나 성현께서 말씀하신 경(經)이나 논(論)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을 몸소 실천하여 확인하는 과정이 수행이며, 이 실천수행을 통해 비로소 확인된 의심이 전혀 없는 깨끗한 믿음의 확신으로 완성됩니다. 확신은 무조건 믿고 들어가는 것이고 확인은 직접 체험을 통해 눈으로 확인해 보는 관(觀)입니다. 이를 관수행(觀修行)이라 하고, ≪기신론≫에서는 사마타인 지(止)와 위빠나사인 관(觀)을 겸비한 수행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인도를 비롯하여 중국과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지관쌍수(止觀雙修) 또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수행의 요체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면 삶과 죽음의 근원적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기신론≫에서는 대승(大乘)에로의 큰 믿음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고통뿐 아니라 존재하는 일체중생과 사회·인류·자연환경의 고통까지 껴안는 것이 대승에로의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즉, 신앙(信仰)과 신심(信心)입니다. 신앙의 믿음이란 불보살(佛菩薩)과 선지식(善知識)에 대해 믿음을 발(發)하는 것이고, 신심의 믿음이란 자기 안에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부처의 씨앗인 불성(佛性) 또는 진여(眞如)와 가르침을 믿는 것입니다. 수행에는 이러한 두 가지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과 보살은 대비심(大悲心)으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구제합니다. 신심의 대상인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가르침과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삶과 죽음, 또는 일상의 정신적 육체적 괴로움을 만나면 이 고(苦)에게 영향을 끼쳐 익혀져 습관화된 괴로움을 제거하는 작용을 합니다. 그러므로 밖으로는 불·보살의 조건인 반연(攀緣)과 안으로는 깨침의 씨앗인 원인인 인연(因緣)이 갖추어져 진리를 자각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발보리심(發菩提心)을 내게 인도합니다. 이것이 ≪기신론≫에서의 말하는 믿음이라 하겠습니다.
'기(起)'는 믿음을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먼저 믿음은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일상적인 삶 속에서 괴로움을 자각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이때의 괴로움은 두려움을 동반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의 자각이 곧 발보리심(發菩提心)이며 괴로움의 내용은 태어남·늙음·병듦·죽음·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함·싫어하는 대상과 함께 어쩔 수 없이 공존해야 함·이 몸 자체에서 치열하게 일어나는 욕구 등을 알고 그 괴로움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을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불·보살과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인 경(經)·율(律)·론(論)이나 어록(語錄)의 말씀을 듣고 보아 바른 견해인 정견(正見)이 세워지면 믿음이란 신앙과 신심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렇게 일으키는 마음은 발심(發心)이자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신행과 수행이 시작됩니다.
다음에 '대승(大乘)'의 큰 믿음에는 괴로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대승이란 다름 아닌 그 괴로움을 자각한 중생심(衆生心)을 말한다고 ≪기신론≫에서는 말합니다. 중생심이란 희노애락(喜怒哀樂)하는 일상의 마음입니다. 스스로의 삶에서 나와 남의 괴로움을 자각하고 그 괴로움을 제거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진여의 체가 상(相)과 용(用)으로 작용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승의 대(大)에는 체대(體大)·상대(相大)·용대(用大)의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대(大)'는 대상이 없는 절대적 '큼'이므로 우리의 본질적 성품입니다. 체대(體大)는 삶과 죽음의 괴로움이 없는 진여불성이며, 상대(相大)는 생사고(生死苦)를 제거할 수 있는 진여불성의 힘이고 덕이며, 그 힘의 작용인 용대(用大)는 그 괴로움을 제거하고 진여불성으로 돌아가게 하는 지속적인 작용입니다. 이 쓰임이 안으로는 자신의 내부에서, 밖으로는 불·보살이나 선지식으로 작용합니다. 주객(主客)을 분리하고 안과 밖으로 분별하는 중생심이 작용으로 둘로 나누어진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인 진여불성의 모습, 이것이 '대(大)'의 참모습인 실상(實相)입니다.
'승(乘)'은 운송수단입니다. 소승(小乘)의 작은 수레는 남의 고통까지 짊어질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大乘)은 남의 고통까지 실어서 고통의 이쪽 언덕에서 고통이 없는 저쪽 언덕인 해탈열반의 세계로 건너가게 합니다. 즉, 대승의 체(體)·상(相)·용(用) 삼대(三大)가 곧 승(乘)의 의미입니다. 괴로움을 제거하고 진여(眞如) 본체로 돌아가는 작용이 바로 중생의 괴로움을 태우고 가는 수레입니다. 특히 용대(用大)가 안으로 자신의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고(苦)를 자각한 중생심에서 진여에로 돌아가는 수레이니, 이때에는 불·보살을 비롯한 선지식과 그의 가르침은 물론 일체의 제반 현상들이 모두 승(乘)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습니다. 삶과 죽음의 괴로움을 자각한 구도자가 삼대(三大)의 큰 수레를 타고 가야만 생멸문(生滅門)을 통과해서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가 진여에로의 복귀하기 때문에 이 삼대가 곧 승(乘)인 것입니다.
대(大)가 삶의 고통 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면, 승(乘)은 그것을 구도자가 믿고 직접 체득하면서 걷는 길이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승하면 역사적으로 불멸 후 100년 내지 200년부터 시작되는 부파불교에 대해 소승이라고 폄하시키는 의미로서의 대승을 의미합니다만, ≪기신론≫에서의 대승은 대·소승을 구분하기 이전의 우리의 마음자체를 바로 대승이라고 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는 대·소승이 없습니다.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것은 시대의 산물일 뿐, 마음 씀씀이에 따라 가늠할 뿐입니다.
2. ≪대승기신론≫의 구성과 중심사상
≪기신론≫의 구성은 여러 경론이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구성하듯 본 논도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서분(序分)에서는 귀경게(歸敬偈)와 발기서(發起序)를 언급하여 기신론 전체의 구성내용을 밝혔습니다. 이 발기서에 인연분(因緣分), 입의분(立義分), 해석분(解釋分),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을 언급합니다. 다음에 정종분(正宗分)에서 먼저 본 논을 지은 여덟 가지 이유를 인연분으로 하여 밝히고, 입의분에서 법(法)과 의(義) 이문(二門)으로 나누어 일심(一心)을 이문(二門)으로 나누고, 일심의 삼대(三大)에 대한 교상(敎相)을 간략히 논하고서 해석분에서 보다 상세하게 거듭 논합니다. 그런 다음에 수행신심분에서 사신(四信)과 오행(五行)을 논하고, 유통분의 권수이익분에서 신방(信謗)의 손익을 논하여 기신론을 수지(受持)할 것을 권유하고 회향게(回向偈)로 기신론을 종결합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부분이 해석분입니다. 이를 좀더 말씀드리면 현시정의(現示正義)라고 하여 법장문(法章門)과 의장문(義章門)으로 나누어 논하는데, 법장문에서 일심(一心)의 이문(二門)과 염정연기(染淨緣起)를 논하고, 의장문에서 삼대(三大)에 대한 대의(大義)를 다시 설명하면서 삼신(三身)과의 관계성을 논합니다. 그리고 대치사집(對治邪執)과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을 논합니다.
법장문을 좀더 말씀드리면 일심(一心)의 이문(二門) 중 진여실상문을 공진여(空眞如)와 불공진여(不空眞如)로 논하고, 생멸문에서 염정연기(染淨緣起)를 논하는데, 염정생멸과 네 가지 염정훈습으로 나누어 논합니다. 여기서 염정생멸을 다시 심생멸, 생멸인연, 생멸상으로 나누어 논하는데, 심생멸에서 제8아리야식의 이의(二義)를 각(覺)과 불각(不覺)으로 논하고, 생멸인연에서 오의(五意)와 육식(六識), 육염(六染), 이의(二疑)로 논합니다. 그리고 생명상에서 이 논의 가장 난제(難題)로 여겨지는 삼세육추(三細六 )의 상(相)과 의(義)를 논합니다. 그런 다음 대치사집에서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을 대치시켜 차례로 타파하게 하고, 분별발취도상에서 세 가지 발심으로 나누어 신(信)·해행(解行)·증(證)으로 나아가도록 논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신론≫의 내용을 옛날부터 일심(一心)·이문(二門)·삼대(三大)·사신(四信)·오행(五行)·육자(六字)회향으로 요약해서 말해왔습니다. 일심(一心)은 중생의 마음인 중생심(衆生心)으로 삶과 죽음의 괴로움을 자각한 마음입니다. 이 일심이 바로 대승이고 대승이 부처의 마음이고 보살의 마음이며 깨닫고자 하는 범부의 마음입니다. 우주 법계는 이 마음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문(二門)은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중생심이 괴로움을 제거하는 길, 즉 통로를 말합니다. 특히 심진여문의 심(心)과 심생멸문의 심(心)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또 마음이 문(門)이라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마음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삼대(三大)는 괴로움을 자각한 중생이 심생멸문으로부터 들어가 심진여문으로 복귀하는 진여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체(體)는 마음의 본 바탕을 말하고, 상(相)은 마음의 본질적인 공덕형태를 말하며, 용(用)은 마음의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지혜의 작용을 말합니다. 이 마음의 전체적인 작용으로 사신(四信)은 진여(眞如)와 불(佛)·법(法)·승(僧)의 네 가지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중생심이 이 네 가지 믿음을 타고 마음의 생멸문(生滅門) 속에서 마음의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믿음이란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는 첫걸음인 셈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도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고 하였고, ≪대지도론≫에서는 "불법의 큰 바다는 능히 믿음으로써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으며, ≪심지관경≫에서는 "불법의 바다에 들어가려면 믿음을 근본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행(五行)은 보시·지계·인욕·정진·지관(止觀)의 수행으로,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고 견고하게 성숙시키고 유지시켜서 구경엔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대승의 보살이 가는 길의 지침입니다. 그러므로 이 오행(五行) 즉 육바라밀은 대승불자의 가장 중핵이 되는 삶의 형태입니다.
육자회향(六字回向)은 믿음이 돈독하지 못하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오직 일심으로 염하면서 모든 공덕을 극락세계의 아미타불께 회향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올라 구경에 성불할 것을 발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신론≫의 구조와 내용에서 볼 때에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 등은 이론 부분이고 유심연기(唯心緣起) 또는 여래장연기사상이라 할 수 있겠고, 사신(四信), 오행(五行), 육자(六字)회향 등은 종합적인 실천사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승에 대립되는 대승이 아니라 대·소승을 아우른 모든 교리(敎理)와 실천사상이라 하겠습니다. 하여튼 이는 모두 삶과 죽음의 괴로움을 여의고 구경의 불생불멸(不生不滅)한 진여의 열반락(涅槃樂)을 자각(自覺)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를 밝힌 사상이라 하겠습니다.
3. 저자와 역자
이러한 ≪기신론≫은 전적으로 시대의 요청에 상응하여 저술된 저작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디 불교의 교주이신 석가부처님의 설법은 상대자의 능력과 역량에 따라서 법을 설하신 것으로 대승의 역량에는 대승에 대한 법을 설하시고, 소승의 역량에게는 소승에 관한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그 법문도 역시 상대자의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석존께서 열반하신 후에는 중생들이 각각 자기가 들은 법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법을 배격하는 등 이론이 분분하였으며, 석존께서 열반하신 후 4∼5백년 사이에 출가자 중심의 전문적인 불교에만 치중하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부처님의 불탑을 중심으로 신앙하던 재가신자들과 개인적으로 아란야에서 수행하던 수행자들과 혁신적이고 중생구제에 뜻을 두었던 출가신행자들이 마침내 대승불교를 주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출가 중심의 교학과 수행은 현학적이고 전문적인 수행만을 고수하였습니다. 이때 불교에 큰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즉, 부처님의 설법이 소멸할 위기를 느낀 것입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약 B.C 83년경 부처님의 말씀을 문자와 하기에 이릅니다. 이를 문자로 확인한 대승을 선언한 집단이 교학적 모순을 발견하여 이를 새로운 불교 또는 본래의 불교에로의 기치를 들고 연구를 시작하여 초기대승을 성립시키게 됩니다. 이를 주창하고 대승교학을 대성한 대표자가 용수보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은 비불설이라 하여 경시하는 경향은 여전하였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입멸(入滅)하신 후 6백년 경 또는 9백년 경에 마명보살(馬鳴菩薩)이 대승불교가 쇠퇴할까 두려워하여 분연히 일어나 대승불교의 부흥과 완전한 교리체계의 정립을 도모하기 위하여 널리 대승에 관한 경전을 열람하고 그 깊은 교리를 체득하였습니다. 특히 ≪능가경(楞伽經)≫에 주력하여 본론을 지어서 ≪기신론≫이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승의 깊고 오묘한 이치를 세상에 광포하여 소승불교도는 물론 외도바라문에 이르기까지 다 알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기신론≫의 저자인 마명보살의 출생 년대에 관하여 이설이 분분하였습니다. 즉, 마명은 한 사람이 아니고 고래로 6명의 마명이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설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 의거하면 첫째는 ≪승정왕경(勝頂王經)≫에 나오는 석존과 동시대의 마명이 있고, 둘째는 불멸 후 100년경에 ≪마니청정경(摩尼淸淨經)≫에 나오는 마명이 있으며, 셋째는 부처님 입멸 후 300년경 ≪변화공덕경(變化功德經)≫에 나오는 마명이 있고, 넷째는 부처님 입멸 후 600년경 ≪마하마야경(摩訶摩耶經)≫에 나오는 마명이 있으며, 다섯째는 불멸 후 800년경에 ≪상덕삼매경(常德三昧經)≫에 나오는 마명이 있으며, 여섯째는 과거에 ≪장엄삼매경(莊嚴三昧經)≫에 한 보살이 있었는데 이 보살의 이름이 마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모두 6명의 마명이 있으나 본론의 저자는 네 번째로 말한 불멸 후 600년경의 마명으로서 대승불교의 완전한 정립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보살로 인정합니다. 이러한 마명에 대하여 세 가지 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 보살이 태어날 때에 말이 울었다고 하여 마명(馬鳴)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고, 다음은 이 보살이 거문고의 명수로서 말이 그 묘음(妙音)에 감응하여 울었다고 하여 마명(馬鳴)이라고 이름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세 번째는 말이 이 보살의 설법에 감응하고 7일간이나 물과 풀을 먹지 않고 울었다고 하여 마명(馬鳴)이라고 하였다는 설입니다. 그런데 보통 1-2세기경의 인물로 마명보살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기신론≫의 내용상 훨씬 후대의 작품인 것으로 보아 ≪기신론≫의 저자는 어느 시대의 마명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석존께서 예언한 다음과 같은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래께서 입멸하신 후 600년경에는 96종의 외도들이 다투어 일어나 불법을 훼멸(毁滅)하려고 할 때에 마명(馬鳴)이라는 한 비구(比丘)가 불법(佛法)을 잘 설하여 모든 외도의 무리들을 항복받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셨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와 같은 부처님의 예언이 있었다는 것은 후세에 불교도들이 마명보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어낸 설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세상에 드문 고덕이요 석학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마명은 처음에 바라문교를 믿었던 사람으로 재주와 학덕을 겸비한 기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항상 불교도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여 불교도들을 굴복시켰다고 합니다. 그 때에 불교의 대석학인 부나야사존자께서 마명의 이러한 횡포를 듣고 가엾게 생각하여 서로 약속하기를 토론을 하여 이기지 못하는 자는 그 법을 버리고 이긴 사람의 교에 입문하기로 약속하고 마명을 설복시켜 불교에 귀의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마명은 부나야사존자에게 패하고 혀를 끊으려고 하는 것을 부나야사존자가 위로하면서 말하길, '나의 법이 인자하여 감히 네가 혀를 끊고자 하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니 머리를 삭발하고 출가하여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떻겠는가?'함으로 마침내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석존의 제11대 법손(法孫)에 부나야사, 마명을 제12대 법손(法孫)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마명이 외도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할 당시에 중천축의 마갈타국에 있었는데 북천축의 가이색가왕이 이 나라를 정복하고 상금으로 9만 양의 금을 요구하였으나 이 나라 왕은 이를 내어줄 여력이 없어서 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금 대신에 마명보살과 부처님의 발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마갈타국의 국왕은 마명보살과 같은 고덕을 보내기를 주저하였습니다. 그러자 마명보살은 나라를 위하고 불교를 홍포하는데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북천축에 들어가 널리 불법을 펴 가이색가왕 제4결집을 도와 덕풍을 전국에 떨쳐 세상 사람들이 공덕의 태양이라 칭송하였고 합니다.
그리고 마명보살의 저서로 알려진 유명한 것은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15권, 인도가 자랑하는 위대한 작품인 ≪불소행찬(佛所行讚)≫ 5권과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1권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앞의 두 책은 문체가 유려한 것으로 유명하며 뒤의 한 권은 대승불교가 흥융한 당시의 가장 훌륭한 논문으로 중국과 한국의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서입니다. 중국에서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 두 사람이 있는데, 그 한 사람은 양나라 때에 진제삼장의 번역으로 현재도 한국에 유통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당나라 때의 실차난타의 번역이 있습니다. 전자를 구역이라 하고 후자를 신역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구역본이 많이 유통되었고 옛날부터 줄곧 여러 고승대덕들도 구역본에 주석을 달았던 것입니다.
다음에 역자인 진제(眞諦)삼장(499-569)은 인도승려로 서인도 우선니국 바라문 출신입니다. 양나라 무제가 대동(535-545) 때에 사신을 부남(扶南)에 보내 고승과 대승경전을 구했을 때 진제가 이에 응하여 546(대동 12)년에 많은 양의 범본(梵本) 경론(經論)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548년 건강에 도착하여 무제를 만났지만 그 직후에 후경의 모반으로 무제가 붕어(崩御)였기 때문에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고생을 겪고 그런 동안에 꾸준히 경론의 번역과 강설에 진력하였습니다. 특히 ≪섭대승론(攝大乘論)≫ 3권의 번역과 석론(釋論)15권이 발표되니, 연구하는 사람이 쏟아져 나와 드디어 섭론종(攝論宗)이 탄생하였으며 중국 섭론종(攝論宗)의 개조(開祖)가 되었습니다. ≪속고승전≫에 의하면 경론(經論), 기문(奇聞), 전기(傳記) 등 64부 278권을 번역하였다고 하나 대부분 전하지 않습니다. 진(陳) 태건(太建) 1년(569)에 71세로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진제삼장은 몇 번이나 고향으로 돌아가려다 실패하고 영원한 노스텔지어를 가슴에 품고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4. 귀경게(歸敬偈)와 그 의의
그러면 이제부터 본문에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는 공경(恭敬)과 ≪기신론≫을 저술한 의의를 밝힌 게송(偈頌)이 나옵니다.
歸命盡十方 最勝業遍知 色無碍自在 救世大悲者
귀명진시방 최승업변지 색무애자재 구세대비자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급피신체상 법성진여해 무량공덕장 여실수행등
爲欲令衆生 除疑捨邪執 起大乘正信 佛種不斷故
위욕령중생 제의사사집 기대승정신 불종부단고
[번역] 온 시방(十方)의 가장 뛰어난 능력[業]으로 두루 아시며 몸(色)이 걸림 없이 자유자재하신 대비심(大悲心)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부처님과 저 부처 몸의 체(體)와 상(相)의 바다에 비유되는 법성진여와 한량없는 공덕을 갈무리한 것과 여실히 수행하는 구도자에게 귀명하옵나이다. 중생으로 하여금 의혹과 삿된 집착을 버리고 대승에로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서 부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까닭입니다.
[해설] 위 게송의 내용은 마명보살께서 중생이 중생의 탈을 벗고 부처가 되려면 고귀한 목숨을 바쳐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공경(恭敬)해야 함을 밝힌 내용입니다. 보살의 논서 첫머리에는 반드시 귀경송이 있게 마련이고 거기에는 논서의 중요한 요지가 담겨 있습니다. {기신론}도 불법승의 삼보三寶)에 대한 귀경송으로 시작하는데, 본 논에서도 저술의 의도 역시 신앙의 대상인 삼보에 귀의하여 안으로 일심(一心)인 삼보의 근원에 돌아가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삼보는 일심(一心)이며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다름 아닌 삶과 죽음의 괴로움을 자각한 중생의 마음입니다. 중생이 중생임을 자각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삼보에 귀의(歸依)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귀의가 부처가 되고자 수행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신론}을 저술하게 된 동기이기도 합니다. 법보(法寶)와 승보(僧寶)를 설명한 게송 중에 '한량없는 공덕을 갈무리한 것'은 생사(生死)라는 윤회의 고통에 대한 자각으로 인하여 수행하고자하는 마음에서 법성(法性)인 진여(眞如)가 나고 죽는 고통에 대한 대처의 힘으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본문의 '여실수행등(如實修行等)'의 등자(等字)는 수행하는 데 필요한 보조수행으로 불방일(不放逸)같은 것을 말합니다.
귀명(歸命)은 귀의를 말하는 것으로 삼보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은 {관심론(觀心論)}에서 "예(禮)라 함은 공경한다는 뜻이며, 배(拜)라 함은 굴복한다는 뜻이다. 참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無明)을 굴복시켜야 비로소 예배(禮拜)라 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귀명삼보란 중생(衆生)이 사는 현장의 갈등들인 견해나 이익의 다툼과 분쟁·불만족·탐욕·성냄·어리석음·교만·의심·비난·질투 등의 험난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찾는 피난처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때의 참다운 성품이란 일심(一心)의 진여(眞如)로, 귀명이란 진여인 일심의 근원으로 복귀하는 것을 말합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순간, 진여가 안으로는 무명번뇌를 끊으려는 작용으로, 밖으로는 불·보살의 가피(加被)로 나타납니다. 원효성사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잘 밝히고 있습니다. 즉 "중생의 여섯 인식기관[六根]은 일심(一心)으로부터 일어나나 스스로 근원을 등지고 형상·소리·향기·맛·촉감·인식이나 판단, 분별 등의 개념이란 여섯 개의 대상에 끄달려 가서 흩어지고 만다. 지금 목숨을 들어서 여섯의 인식기관을 모두 거두어들여서 본래의 일심(一心)의 근원에 되돌아가므로 귀명이라고 한다. 돌아갈 바의 일심(一心)은 즉시 삼보(三寶)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심(一心)이 삼보(三寶)이며 삼보에 귀명하는 것이 바로 일심의 근원에 돌아간다는 의미는 삼보가운데 법보(法寶)가 중심이 됩니다. 법을 깨달으면 부처가 되고[불보] 법을 모르면 중생입니다. 반면 자신이 중생임을 자각하여 수행을 시작하면 구도자로서 승보(僧寶)가 되는 것입니다. 즉 삼보에 귀의하고 예배드린다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삼보에게 예배 드림과 같습니다. 곧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여 신심(信心)의 수행을 말합니다. 말 그대로 정성의 지극함이며 믿는 마음의 지극함입니다. 이것이 목숨을 바쳐 일심(一心)의 근원에 돌아가는 귀명(歸命)이며 돌아가기 위한 자기자신에게 주시하는 것이므로 모든 수행의 총칭입니다. 말하자면 중생심(衆生心)이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발하여 수행하게 되면 법성(法性)의 진여불성이 움직여 귀경송의 불보(佛寶)는 신앙의 대상이 되어 대비심(大悲心)으로 중생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 수행의 진척이 있게 하기 위해 가피(加被)를 내려 줍니다.
반면 중생심 속에 갈무리되어 있는 법보인 법성진여의 무량성공덕이 작용하여 마음속에 쌓여 있는 온갖 괴로운 기억들 불건전한 망상, 가슴아픈 추억 등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작용이 구도자의 모습으로 승보가 됩니다. 말하자면 법보인 법성진여는 고통에 찬 중생을 만나면 밖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대비의 부처님으로 화현하며 안으로 괴로움의 원인인 무명번뇌를 훈습하는 작용으로 바뀝니다. 이 삼자는 하나의 모습이며 한 마음입니다. 또한 괴로움을 자각한 중생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법보인 진여법성이 괴로움을 대치하는 힘인 무량한 본성공덕으로 바뀌고 부처의 진여(眞如)의 작용인 회광반조(回光返照)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작용은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출처 : 청산백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