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큰딸 정윤이는 엄마 품에서 무럭무럭
자라 어느듯 3살이 되었다.
큰딸이 3살되던 해 정윤이 동생 종찬이가
태어 났다.
아이들은 3살 터울 이다.
비로소 나는 1남 1녀를 둔 아버지가 되었다.
아내는 의상실을 경영 하면서 둘째 아이를
키우느라 힘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느날 아내가 친정으로 연락하여 도와
달라고 지원 요청을 하였는것 같은데
처가집 장모님께서 둘째 처제를 우리집
으로 보내 주시며 우리집 살림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둘째 처제는 당시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가집에서 놀고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집 살림을 보살펴 주면
서 여유 시간에 학원등록하여 전화 교환원 자격 시험공부를 하게 하여 우리 은행에 입사 시켜 보려는 욕심으로 학원에 보내
주었다. 처제는 열심히 공부하여 얼마후 자격을 취득 하였는데 나는 인맥이 부족
하여 은행에 입사 시키지 못 하였다.
나의 부득의 소치 아니겠는가? 처제에게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한량없이 많이
들었다. 그동안 처제는 우리집 살림을 도
맡아 하면서 근면,성실하게 모든면에서
허물없이 한 식구처럼 잘 지냈다.
처제는 싹싹하고 명랑하며, 사교성이 좋았다.
나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처제를 일반회사
경리로 취직 시켜 주었다.
몆 십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그때의 깊은
정을 못 잊어 딸 아이와 처제는 친밀하게
대화를 잘 나누고 있단다.
우리 두 아이들은 처제와 함께 생활하며
피아노 학원도 다니고 바울로 유치원도
다니면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단다.
나는 내가 누리지 못 했던 어린 시절의 설움을 자식들에게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하여서는 않된다는 굳은 신념으로
보람차고,근면,성실한 생활을 영위 하도록
노력 하였다.
큰 딸아이가 성장하여 초등학교를 가게
된다.시내 매일신문사 옆 건물에 있는
천주교 재단 소유인 효성초등학교에 입학
시켰다.사립 학교라 당시 일반고등학교
다니는 학비 수준의 등록금이 들었다.
당시 나의 경제력은 충당 할수있는 상태였다.은행에서 나의 보수도 좋았고
아내의 의상실 수입도 있고 하여 충분한
능력으로 지탱해 나갈수 있었다.
효성초등학교는 사립학교로서 일반 초등
학교 보다 다방면에서 모범이 되는 학교였다.
딸 아이 1학년때의 일이다. 담임 선생님이
수녀 선생님이 였었는데,처음 학교 들어간
사례로,아이편에 10만원을 넣어 보냈더니
그 10만원으로 학용품을 사서 반 전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는 애기를 듣고
나 자신이 몹씨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우리 아이는 6년동안 학교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학교버스 여러대가 코스별로 대구시내를
두루 돌면서 학생 아이들을 태워 다녔단다.
효성초등학교 에서는 기본 공부외 예의
범절,인성교육,사회 도덕적인 수업을 많이
하는 학교란다.
초등학교 5학년때 담임 선생님께서 한문
수업을 해 주셔서 우리 딸 아이는 지금도
한문 실력이 대단 하단다.
효성초등학교 6년을 졸업하고 침산동에
있는 지역중학교인 대구여자중학교를 가게 되여 3년 과정을 마쳤다. 변두리 학교
가되어서 학교 수준이 많이 떨어졌다.
나는 학교 수업외 학원 보충 수업으로 충당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공부 시켰다.
3년을 무사히 마치고 사립 고등학교인 경상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마친다.
딸 아이가 경상여고 2학년 다닐 시절에는 방과후 야간 수업이 있어 저녁 시간에는 완전 대기 상태였다.저녁 11시쯤에 승용차
를 몰고 경상여고 학교앞으로 매일 저녁
마다 딸 아이를 데리고 와야 하는 일의 연속이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교 진학 시기가
되여 딸 아이가 서울에 있는 성균관대 생물
학과를 지원 하겠다고 나에게 애기 하였다.
당시 서울 종로에 있는 대성학원 국어담당
강사였던 나의 고향친구 여무종 친구에게 전화 연락하여 사정을 애기하니 여자 아이는 집에서 부모님이 데리고 있는 것이
마땅하다며 보수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여자 아이라 혼자 객지에 보내는 것이 내 자신에게도 허락이 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경북대학교에 보내기로 마음을
정하고 딸 아이에게 상의 하였다.
딸 아이가 수긍하고 경북대학교에 입학 하였다.
대학시절 4년간 다니면서 몇번의 장학금도
받아와 공부를 열심히 하였던 것으로 생각
된다. 대학 4학년 졸업이 가까운 시기에
대학원 합격 통지서를 가지고 왔다.
아들 종찬이도 대학 진학 중이였던 시기
였다. 아들이 대구과학고등학교를 졸업
하고 연세대학교 1학년에 수시로 입학 한
상태 였다.
은행 월급이 괜찮타고는 하지만 아들 종찬
이가 사립대학인 연세대 등록금과 월50만
원씩의 밥값외 생활비를 보내는 형편이라
걱정이 되여 딸 아이에게 대학원 진학을 포기 하도록 설득을 시켰다.
처음에는 섭섭하게 느끼더니만 한참 생각
해 보더니 나중에는 포기 하겠다고 하여 나는 딸 아이에게 고맙다고 위로를 해 주면서 간신히 마무리가 되었다.
부모된 입장에서 거절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아 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금할길 없더라. 현재 우리 딸 아이는 대구 범어동
에서 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위,딸,딸,딸(세자녀)과함께 살고 있으며
법인회사 과장으로 재직 중 이란다.
친정 아버지인 내게도 매달 용돈으로 30만원씩 지출하고 있는 효녀 딸이라고 나는 자부한다.
딸,딸,딸(3자매) 애들 밑에 지출 할것이 많을 것 같은데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는지 항상 염려가 된다.
첫째 외손녀는 고등학교 3학년이고,둘째
외손녀는 고등학교 1학년, 3째놈은 중
학교 2학년인데, 이놈들은 각각 학교가
달라서 얼마전 까지는 내차로 데려다 주곤
했는데 고3학년 되면서 제 스스로 다닌
다고 하여 지금은 데려다 주지 않는다.
사위는 영천 만불사 절에서 사찰 업무 보시를 하면서 지낸단다.
부디 아무 탈 없이 딸 아이 가족들의 건강
과 화목 하기를 기원한다.
첫댓글 선생님 시 처럼 글을 띄워서 쓰지 말고 붙여 쓰세요.
나의 큰딸 정윤이는 엄마 품에서 무럭무럭
자라 어느듯 3살이 되었다.
큰딸이 3살되던 해 정윤이 동생 종찬이가
태어 났다.
아이들은 3살 터울 이다.
비로소 나는 1남 1녀를 둔 아버지가 되었다.
아내는 의상실을 경영 하면서 둘째 아이를
키우느라 힘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의 큰딸 정윤이는 엄마 품에서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3살이 되었다. 큰딸이 3살 되던 해 정윤이 동생 종찬이가 태어 났다. 아이들은 3살 터울 이다. 비로소 나는 1남 1녀를 둔 아버지가 되었다. 아내는 의상실을 경영 하면서 둘째 아이를 키우느라 힘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