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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화성능행도병풍(일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화성으로 거둥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왕의 행차 규모를 잘 보여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연산이 전교(서울 중랑천 살곶이 다리)에 거동할 때 역군으로 따라갔다. 화양정(서울 성동구 살곶이 목장 내에 있던 정자)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 읍에 예치했던 암말 수백 마리를 가둔 다음 연산이 정자에 자리를 잡았다.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했고 신하들은 모두 물리쳤다. 마관(馬官)이 수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으로 몰아넣어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했다.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다니는 소리가 산골짜기에 진동했다. 그해 가을, 반정이 일어났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도 연산군의 외모를 일부 나열하기는 한다. 연산군 10년 (1504) 음력 2월 7일 실록에 따르면 전라도 부안현 소속 군사인 김수명이 잠시 한양에 올라와 있으면서 연산군을 봤다.
그는 후일 이웃에게 “인정전(창덕군 정전)에서 호위하며 명나라 사신 접견식을 보니 사신은 우뚝 서서 잠시 읍만 하고 주상은 몸을 굽혀 예를 표하는데 허리와 몸이 매우 가늘어 그다지 웅장하고 위엄 있어 보이지 않더라”고 함부로 말하다가 관아에 잡혀 왔다.
역시 죽천이 만났던 노인의 말과 다르지 않다. 이를 종합해 보면 연산군의 모습은 살갗이 희고 키가 크며 호리호리한 미남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록은 누가 뭐라 해도 현전(現傳)하는 사료들 중에서 가장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하다. 몇 명의 사관들이 저술하다 보니 다뤄지는 범위가 왕과 그 주변 관료들을 주인공으로 한 경연과 주요 정치사건 등에 국한되는 문제점이 있다. 또한 사관 개인의 견해나 그가 속한 당파의 입장이 반영되고 반대파의 주장은 배제될 여지도 적지 않다.
실록 밖에도 역사의 원천은 무수하게 존재한다.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학문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사대부들은 개인 문집 등 방대한 저작물을 양산해냈다. 시와 수필, 상소, 행장, 비문 등 형식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정치, 제도, 과학, 역사, 인물, 세태, 풍속 등 다루는 분야도 실로 광범위하다.
이들 고전에는 실록에서 다루지 않은 사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고, 더러는 내용이 전혀 다른 경우도 많다.
고전에서는 연산군의 경우처럼 정사가 다루지 않는 왕들의 다양한 모습과 생애를 살펴 볼 수 있다. 실록은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난 뒤 강화도 교동에 안치돼 있다가 두 달 만에 역병(疫病)에 걸려 사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문신 김택영(1850~1927)이 쓴 역사서 <한사경>에 나타난 연산군의 사망 원인은 이와 전혀 다르다.
책은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연산군을 자살하게 하고서 왕자(王子)의 예로서 장사 지냈다. 후환을 뿌리 뽑기 위해 반정의 주모자들이 연산군을 제거했다”고 쓰고 있다. 질병으로 죽은 게 아니라 후환을 우려한 반정세력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사진 3. 세조 어진 초본(일부). 태종의 최측근 이숙번은 세조의 외모가 태조를 빼닮았다고 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1367~1422·재위 1400~1418)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 그의 손자 세조는 어린 조카에게서 왕좌를 빼앗았다. 선조 때 문신 윤근수(1537∼1616)는 자신의 저서 <월정만필>에서 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당시 핵심 공신이었던 이숙번이 세조가 할아버지 태종을 쏙 빼닮은 모습을 보고 걱정했다고 서술했다.
“안성부원군 이숙번은 어린 광묘(光廟·세조의 사후 별칭)를 보고 ‘어린애의 눈동자가 너무도 그의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모쪼록 형제끼리 우애 있게 지내고 너의 할아버지만은 본받지 말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숙번이 말한 ‘할아버지’는 바로 태종이다.”
이숙번(1373~1440)은 어린 세조의 얼굴에서 권력을 위해서는 혈육도 가차 없이 처단했던 태종의 비정함을 읽었던 것이다. 이 같은 선견지명을 지녔던 이숙번이지만, 자신의 공이 많다는 것만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다가 탄핵을 받아 결국 태종 17년(1417) 경상도 함양에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18대 현종(1641∼1674·재위 1659∼1674)의 대는 조선을 통틀어 왕권이 가장 약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두 차례 국상 때 상복을 입는 문제를 놓고 당쟁이 극에 달하면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질병과 기근이 끊이지 않아 국력이 약화됐다.
현종은 이런 상황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현종은 성격이 너무 여렸다. 실학자인 이긍익(1736~1806)의 역사서 <연려실기술>에 그런 사실이 잘 언급돼 있다.
이에 따르면, 현종은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이나 동물을 측은하게 여겼다. 현종이 어렸을 때 대궐 문 밖에 나갔다가 야위고 낯빛이 검은 군졸을 보고는 불쌍하게 여겨 옷과 밥을 지어주게 했다. 또 한 번은 할아버지 인조가 표범 가죽을 진상 받았는데 질이 나빠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현종이 “표범을 잡느라 많은 사람이 상했을 것”이라고 하자 왕이 손자의 마음을 가상히 여겨 물리치지 않았다.
아버지 효종 때는 새끼 곰을 바친 자가 있었다. 곰이 성장하면서 사나워지자 사람이 다치기 전에 죽여 없애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자 세자(현종)는 “아직 해를 입은 이가 없는데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깊은 산에 놓아 주어야 한다”고 반대했다.
효종은 “네가 임금이 되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자가 없겠다”며 기뻐했다고 <연려실기술>은 적었다. 이런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천성이 유약했던 현종은 드센 신하들에게 휘둘려 국정 혼란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1.“큰 키에 호리호리하고 잘 생긴 외모의 연산군”…지존의 모습과 생애1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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