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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우리당 출신들은 스스로 ‘우리는 싸가지 때문에 망했다’는 말들을 한다. 김부겸 의원은 작년 3월 공개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몰락한 것은 싸가지가 없어서’라고 했고, 올해 초 초선들의 쇄신모임을 이끌어온 정성호 의원은 ‘노무현 정부는 쉽게 말해 싸가지가 없는 정권이었다’고 했다. 열린우리당 초기였던 2004년과 2005년은 ‘싸가지 없게 이야기’ 하는 게 새로운 정치문화인 것인 양 유행을 탔던 시절이었다.” 32
정의당 당원 이창우의 성찰도 감동적이다. “진보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존재하는데, 정작 원조 진보정당들은 전멸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유권자들이 진보에 의지하려고 하면서도 진보정당에게 ‘너희가 제대로 된 진보냐?’고 되묻는 것과 같아요. 과격하기만 한 진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진보가 아니라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을 책임있게 추진할 수 있는 진보를 원하는 겁니다. 진보정당이 분열과 반목을 일삼으면서 국민들 눈에 함량 미달로 보이는 거죠.” 45
많은 경우 일부 운동권의 ‘꼬임’은 도덕적 우월감과 독선에서 비롯된다. 그런 기질은 발생론적으론 타당한데, 현실은 늘 발생론적 기원을 배반한다. 이타적인 정의감 하나로 운동에 뛰어든 것은 숭고하지만, 오랜 세월 고난과 시련을 겪다보면 이타적인 정의감을 압도하는 다른 부정적 행태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는 아무리 감안된다 해도 제값을 다 못 받는 법이다. 숭고한 동기로 시작한 일이라도 사람들은 그런 과거보다는 현재 보이는 부정적 행태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압도적 우위 앞에서 과거에 대해 ‘쿨’ 해질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그게 영 뜻대로 안 되는 걸 어이하랴. 안타깝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 47
“보수언론의 프레임에 빠졌다”는 주장은 사실상 “보수언론은 늘 그르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셈인데, 이거야 말로 진보의 필패를 부르는 첩경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보수언론이 하는 말은 늘 잘못되었거나 정략과 음모의 산물이란 말일까? 모수언론이 그렇게 어리석을까? 그런 생각은 보수언론의 힘은 과대평가하면서 보수언론의 지능은 과소평가는게 아닐까? .... 물론 보수언론이 의도적인 ‘진보죽이기’ 용 기사와 논평을 양산해내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런 걸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만 있다면, 진보가 경청해야 할 것은 진보언론보다는 보수언론의 비판이다. 70
노명우가 잘 지적했듯이, “상업주의와 보수주의자들이 대중의 상식을 기막히게 이용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지식인과 진보주의는 상식을 대체할 양식을 훈계의 어투로 늘어놓는 능력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는 가끔 인용되는 말이라며, “우익은 거짓말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에게 말하고 있고, 좌파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물”에 말하고 있다고 했는데, 진실이건 거짓이건 진보의 기본자세는 인간지향적이라기보다는 사물지향적이다.
자기 감정의 포로가 된 진보는 유권자들을 향해서도 논리와 이성 일변도다. 진보의 기획 자체가 당위, 그리고 그 하부의 논리와 이성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원래 지식인은 인간을 지나치게 이성적, 합리적 의사결정자로 가정하는 이른바 ‘과잉지식인화의 오류’를 범하기 십상인데, 이점에선 진보 지식인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반면 개인적 욕망을 논리와 이성으로 옹호하기 어렵다는 걸 아는 보수는 대중에게 감정적으로 접근한다. 싸가지 있게 굴려고 애를 쓴다. 여자를 꾀는 바람둥이처럼 계산하고 기획한다. 이에 비해 진보는 “네가 어떻게 날 안 좋아할 수 있어?”라고 호통치는 형식이다. 88,9
웨스턴은 “선거에서 이기려면 기본적으로 정책의 시장이 아니라 가정의 시장에서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 민주당이 이 점에서 무능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주당이 뛰어난 육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유권자의 정신이나 마음이 냉철하다는 관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선거운동에서는 감정, 이야기, 연상, 이미지, 설정, 비유, 음향, 음악을 투입해 비이성적 유권자들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냉철한 정신이라는 관점에서는 그런 것들이 방해 요소라고 본다.” 91
그렇다고 해서 ‘논쟁 무용론’을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논쟁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할망정 논쟁의 구경꾼들에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구경꾼들은 논쟁의 콘텐츠에 관심을 갖겠지만, 일반 유권자 수준의 구경꾼들은 태도나 싸가지에 더 관심을 갖는다. 즉, 싸가지라고 하는 형식이 내용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96
“김어준은 대중이 궁금해할 만한 사안들을 정확히 짚어낸다.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하고 움직일 만한 것들을 이슈화하는 동물적 감각을 지녔다. 논리적으로 수긍이 가는 지점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지점을 알고 있다. 감정의 영역에서 결정되는 것이 비단 정치만일까. 인간계에서 결정되는 일들 가운데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얼마나 있나. 그런 점에서 ‘감정’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중요성이 사회에 만연하게 된 지금은 바야흐로 ‘감정의 시대’.” 97
아니 비단 김어준뿐만이 아니다. 대중에게 감정으로 접근해 그들을 매료시키는 진보 논객은 많다. 늘 문제는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의 감정은 아예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딜레마가 있다.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의 감정까지 고려하는 어법으론 우리 편 사람들을 열광시킬 수 없다. 이게 바로 우리가 직면해 있는, 정치담론의 시장 논리다. 100
“요즘엔 순도 100%우파, 100%순정 좌파를 자처하는 이가 도처에 출몰한다. 라면 끓일 때 수프를 먼저 넣으면 우파인가 좌파인가? 대체 좌파는 뭐고, 우파는 뭔가. 이런 의문 때문인지 시중에 ‘좌파 우파 구별법’은 가지가지로 떠돈다. 그중 하나. ‘우동 좋아하면 우파, 자장면 좋아하면 좌파. 100평 이상 살면 우파, 30평 이하 살면 좌파. 서울대 나오면 우파, 상고 나오면 좌파.....’ 농담을 가장한 비웃음이다. 신체 노출증 환자는 제 한 몸 벗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사상 노출증 환자는 ‘네 생각도 빨리 까보라’고 닦달한다. .... ‘편가르기’는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사회적 손실 비용을 증가시킨다. 공익엔 손해다. 그러나 잘만 이용하면 ‘사익’은 극대화 될 수 있다. ‘쟤 원래 좌파야’, ‘수구꼴통의 음모’라고 주장하면 사실여부를 떠나 절반의 지지가 확보된다.” 103
나는 호남인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거나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호남인들도 비판받을 점이 많다. 5·18성역화 역시 진보 내부의 엄격한 성찰이 필요하다. 물론 왕성한 비판도 쏟아져나와야 한다.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일베의 지금과 같은 비열한 망동을 정당화시켜 줄 정도로 호남인이 잘못한 것은 없으며, 그런 비열한 망동은 일부 일베 회원들의 인간다운 갱생을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다. 117
성공회대학교 교수 한홍구는 <한겨레21> 2005년 1월 11일자에 기고한 <뉴라이트는 ‘품성’을 갖춰라>는 글에서 “20대 때는 잘 몰랐지만, 나이 40을 넘고 보니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에는 사상과 이념으로 사람을 따졌는데, 그게 다가 아니고 이념과는 전혀 기준이 다른 사람됨이라는 게 있다. 좌파 중에도 절대로 상종하기 싫은 인간이 있는가 하면, 생각은 보수적이지만 도저한 인품에 고개가 숙여지는 사람이 있다. 자신들이야말로 지금도 진짜 주체사상파라고 우기는 뉴라이트들을 위해 주체사상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품성’이 중요한 것이다. 뉴라이트들이 옛 동료들을 향해 사상 고백을 하라고 을러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품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금 뉴라이트 문제, 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주체사상 식으로 얘기하면 품성의 문제이고, 우리의 일상의 말로 바꾼다면 ‘싸가지’ 문제일 뿐이다.” 123
독재정권이 반독재투쟁을 비난한 수법 중의 하나가 ‘수신제가’ 이데올로기였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데다 인간적인 흠도 많은 주제에 무슨 민주화운동을 하느냐는 선전 공세를 편 것이다. 그 좋은 말이 그런 용도로 오·남용되었다는 게 기가 막히지만, 더욱 비극적인 건 그런 공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이념과 인격의 분리 현상이다.
이념과 인격에 모두 충실한 사람도 많겠지만, 이념에 투철할수록 인격은 엉망인 사람도 많다. 부실한 인격을 이념적 전투성으로 보완하려는 탓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느 이념 진영에서든 강경파 노릇을 하면서 진영 내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념에는 사람들의 열광과 미혹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다. 정치노선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의인화·개인화되어 정치적 ‘빠’ 문화로 발전하면, 그 ‘빠’의 대상 인물이 행사하는 권력을 대리만족하고자 하는 참여자들의 ‘권력감정’ 욕구가 발생해 원래의 선의는 실종되고 거의 종교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그 결과 누구의 신앙이 더 강한가 하는 경쟁이 시작되고, 그 경쟁의 와중에서 인격은 부실할수록 좋은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125
“자취방이 시장 근처에 있던 터라, 대선운동을 하러 사람들이 많이 붐볐는데, 그 많은 대선후보 유세차량에서 들었던 인물은 당시 이명박 후보밖에 없었다. 심지어 상대 후보이면서, 전주에 큰 영향력을 가진 정동영 후보의 유세차량에서도 본인 이름보다 이명박을 더 외쳤다. 결국 이명박 후보에 대해서는 장단점을 모두 알 수 있었고, 정동영 후보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이 이명박을 싫어한다’뿐이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대선, 총선, 지방선거에서 진보진영의 선거방법은 달라지지 않았고, 결과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진보 진영의 ‘정권 심판’이라는 선거 슬로건은 보수의 선거프레임을 깰 수 없는 뿅망치다.” 136
특히 전남 순천·곡성 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 이정현이 당선된 것에 대해 민주당은 쌍수를 들고 만겨야 한다. 물론 겉으로야 애도할말정 속으론 쾌재를 부르면서 그걸 선거구제 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특정 정당이 지역의 모든 의석을 독점하는 현행 소선거구제가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며, 이는 민주당에 더 불리하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기존 체제를 고수하겠다는 건 “나 하나 국회의원 잘 해먹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민주당의 지배적 정서라는 걸 말해줄 뿐이다. 144
“내[알린스키]가 말하고 있는 것은 조직가라면 자신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한 부분은 행동의 장에 있으며, 그는 문제를 100대 0으로 양분해서 자신의 힘을 투쟁에 쏟아붓도록 힘을 보탠다. 한편 그의 다른 부분은 협상의 시간이 되면 이는 사실상 단지 10%의 차이일 뿐이라고 하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양분된 두 부분은 서로 어려움 없이 공존해야만 한다. 잘 체계화된 사람만이 스스로 분열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로 뭉쳐서 살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조직가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159
“미국의 사회운동가인 사울 D. 알린스키는 이런[상대를 모욕하는] 경향을 ‘구두선식 급진주의’라고 비판하면서 그 폐해를 다름과 같이 꼬집었다. ‘낡아버린 옛 단어나 구호를 사용하고 경찰을 ’돼지‘라든지 ’백인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등의 방식은 오히려 자기 자신(급진주의자)을 정형화함으로써 남들이 ’아, 뭐 쟤는 그냥 저런 애‘라고 하는 말로 대응하고는 즉시 돌아서게끔 만든다.’ 알린스키는 ‘의사소통은 듣는 대중의 경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타인의 가치관을 온전히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의사소통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유머 감각’이다. 상황이 매우 안 좋은 건 사실이지만, 요즘 진보·개혁 진영을 보면 항상 너무 비장하고 너무 심각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만 해서는 대중이 편하게 다가오기 어렵지 않을까?” 161
이제 민주당에 필요한 건 자기합리화의 도구로 전락한 감이 없지 않은 진정성이 아니라 성실성이다. 이젠 씨알도 먹히지 않을 진정성 타령을 그만두고 성실성을 키워야 한다. 성실성은 진정성과 달리 입증과 측정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므로 유권자들을 설득하는데도 훨씬 유리하다.
유권자들은 ‘심판’의 필요성에 공감하더라도 자격 없는 세력이 외치는 심판에는 반감을 갖기 마련이다. 민주당이 이제 먹히지도 않을 상투적인 심판은 그만두고, 심판의 방향을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고 관철시키는 방식, 그리고 유권자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173
지식인이나 앞서가는 시민들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진보로 간주하지만, 대중은 여전히 전통·공동체·권위를 중요시한다. 민주당은 후자를 중시하는 제스처를 취하긴 하지만, 민주당의 공적 담론은 사실상 장악한 다수의 진보파 의원들로 인해 전자에 크게 경도되어 있다. 이게 바로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평가를 낳게 하는 주요 이유가 된다. 188
한국 정치에서 ‘인물 중심주의’는 악惡을 주로 관계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한국인의 상대주의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즉, 누가 더 나쁜가 하는 상대적 기준에 의해 평가를 내리기 때문에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의 그 어떤 중대한 결함이 나타난다 해도 지지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면 아무런 과오가 없다 하더라도 노선 변경은 ‘배신’으로 간주되어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가 된다. 김어준이 진보에서 보수, 다시 보수에서 진보로 노선을 바꾼 손학규에 대해 “산업스파이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한 건 잔인한 혹평이지만, 결국 그런 이미지가 손학규의 정계 은퇴까지 불러온 건 아닐까? 192
“예를 들어, 지난 대선에서 저소득층이 새누리당을 훨씬 더 지지한 이유는 교육 수준이 낮아서 사탕발림에 쉽게 넘어갔기 때문이며, 그러니 진보세력이 그들의 삶을 향상할 유일한 대안임이 확실히 인식시키기만 하면 문제가 저절로 다 해결되리라는 분석은 이런 점에서 한계가 있다. 진보세력은 보수적인 국민들이 그들에게 품는 생래적인 거부감, 곧 국가안보와 사회질서를 흔드는 ‘비도덕적인’ 정당이라는 시선을 어떻게 바꿀지 궁리할 필요가 있다.” 199
진보에게 가장 필요한 건 레이코프가 했던 일종의 자기 성찰이다. 즉,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고 혐오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존중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민주당이 수십 년째 신봉해오고 있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신념이자 구호는 민주당에 ‘독약’이 되고 있다. 설사 이런 이분법 구도에서 민주 쪽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민주당을 지지하면 ‘민주’요 반대편을 지지하면 ‘반민주’라는 도식은 시대착오적인 정도를 넘어 속된 말로 ‘찌질’하다고 생각한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호는 자기만족을 위한 마스터베이션인지라 사라지기가 쉽지 않다. 2014년 8월 5일 민주당 의원 신기남은 트위터를 통해 “제1야당은 진화해나가는 과정 속에 있다. ‘반군사독재 민주화진영’에서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으로, 다시 ‘진보 세력의 중심체’로 나아간다. 군사독재에 부화뇌동하며 기득권을 뿌리내려왔던 ‘보수기득권 세력’과 일관되게 대척점에 서온 역사적 자리매김이다”라고 했는데, 왜 유권자들에게 처절한 버림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말이 없다. 200,1
“광범위한 투표 불참에 대한 책임을 인민의 무지·무관심·무기력 탓으로 돌리는 것은 공동체 내의 좀더 부유한 계층이 보여주는 매우 전형적인 형태이다. 이는 어떤 정치체제에서나 늘 하층계급의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던 논리다. 이보다 나은 설명이 있다. 기권은 투표 불참자들의 요구를 반영한 선택지와 대안이 억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224
정치에 등을 돌린 유권자들의 선택지와 대안을 찾아내고, 그래서 그들을 다시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이 제안한 바 있는 ‘교회모델’, 즉 ‘서비스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 그는 “한국교회의 제일 큰 역할은 바로 ‘생활 공동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정당의 모습을 고민하는 이들이 주목해야 할 한국형 교회의 성공비결입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결혼식, 장례식 때 교회만큼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을 본 적이 없어요. 신도나 그 가족이 아프면 교인들이 와서 간병까지 해줘요. 친척보다 더 낫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지금은 사라진 한국의 ‘대가족제’를 유지합니다. 실제로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정서적 유대감이 큽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는 아예 집을 한 채 구해서 상설 노인정을 운영합니다. 갈 곳 없는 노인의 거처로서 기능할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노인들이 교류하는 곳이에요. ....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곳도 많습니다. ..... 정당은 왜 교회처럼 못합니까? 무료 법률 상담, 문화 학교, 영화 학교, 댄스 학교 등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없을 거예요. .... 지금 한국의 정당은 재미를 주나요, 정보를 주나요? 아니면 새로운 네트워크에 참여할 기회를 주나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월 1만 원씩 내라고 하면 누가 선뜻 내겠어요? 재미, 정보, 네트워크를 준다면 1만 원이 아니라 10만 원도 선뜻 낼 사람이 부지기수예요. 바로 한국형 교회가 그 증거입니다.”
그렇다. 바로 이 방식이다. 정당이 대중의 일상으로 파고들어 무료 법률 자문에서부터 인문학 강좌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정당을 친근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최소한의 풀뿌리가 공천의 민주화·합리화를 수행할 수 있게끔 해보자는 것이다. 2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