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은 1976년 쓰였지요
살아있을 때 많이 팔리며 읽었는데 지금은 절판되었네요
아쉬운 마음에서 목차를 중심으로 간단히 요약 정리하겠습니다./ 작성중
복원불국사
나의 취미는
비독서시절
가을은
무소유/ 전문 옮김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요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래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 않은 평찬. 이것뿐이오"
위에 말은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이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간디어록을 보다가 내가(법정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내 분수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되새겨야 할 점은
우리가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에서 적(積)에서 사라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살고 보니 이것 저것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일까?
살피면 없어도 좋을만한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필요에 의하여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입니다.
필요에 의하여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도 되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해 여름 난초 두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습니다.
3년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입니다.
혼자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애들 뿐이었습니다.
그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도 구해다 읽었고
그애들이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오기도 했습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 애들을 위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습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마쳤더라면
아마 효자라는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을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두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정했습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초를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습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를 뵈러 간 일이 있었습니다.
한낮에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습니다.
아차 이때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입니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채 온것이죠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습니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이른거려 더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서둘러)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 나간것 같았습니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습니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입니다.
(나는)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난을 가꾸면서 산철(승가의 유행기)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습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쳐 생각하도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였습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라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습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이때부터 나나느 하루 한가지씩 버여야겟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습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했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집니다.
보다 많은 자기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소유욕에서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또 물건만으로 성이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듭니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입니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합니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의 맹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든 듣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간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새 없이 들뜨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내 이육신마저 버리고 훌훌히 떠날 것입니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너무 일찍 나왔군
오해(와 사랑)
세상에 대안관계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일이 또 있을까 합니다.
까닭 잘못하면 남의 입살에 오르내려야 하고
때로는 이쪽 생각과는 엉뚱하게 다른 오해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웃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자 일상의 우리는 한가롭지 못합니다.
이해란 정말 가능한 걸까요?
설해목
아파트와 도서관
종점에서 조명을
인간의 일상 생활은 하나의 반복처럼 보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대개 비슷비슷한 일들을 되풀이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들한 잡담과
약간의 호기심과
애매한 태도로써 행동을 합니다.
여기에 자기성찰 같은 것은 없고
다만 주어진 여건 속에 부침하면서
살아가는 범속한 일상인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타성의 흐름에 내맡긴채 흘러가고 있습니다.
모방과 상식과 인습의 테두리 안에서 편리하고 무난하게 처신하면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닌 생생한 빛깔은 점점 퇴색되게 마련입니다.
생각하면 지겹고 답답해 숨막힐 일이지만
그래도 그렁저렁 헛눈을 팔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상성을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때로 나느네 길을 떠나기도 합니다.
일상의 지겨운 사람들은 종점에서 자신의 생을 조명해 보는 일도 필요합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죽은 이들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그들이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까를 그려보면서 말입니다.(1970년)
흙과 평면공간
탁상시계 이야기
동서의시력
회심기
조조할인
나그네 길에서
그 여름에 읽은 책
잊을 수 없는 사람
미리쓰는 유서
인형과 인간
녹을 그 쇠를 먹는다.
영원히 산
침묵의 의미
순수한 모순
신시서울
본래무일물
사람은 태어나면서 물건과 인연을 맺습니다.
(사실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이지만 - 내생각)
그러므로 물건 없이 우리들이 일상 생활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도 물건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성중
아직도 우리에겐
상면
살아남은 자
아름다움
진리는 하나인데
소음기행
나의 애송시
산심 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같이 이나 잡고
호로 살더라
불교의 평화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평화가 무엇인가를 보여준 그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인류 역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사회적인 실천윤리의 바탕을 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비입니다.
중생을 사랑하여 기쁨을 주는 것을 자(慈)하고 하고,
중생을 가엾이 여겨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을 비(悲)라 합니다.
그러므로 자비는 인간 심성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