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한국을 떠나 30년 동안 외국생활을 한 친구가 있다. 수년 전, 오랜만에 만났을 때 친구는 감탄하며 내게 말했다. 한국 식품산업의 놀라운 발전에 존경을 표한다고 말이다. 전자레인지에 3분만 돌리면 되는 하얀 쌀밥을 비롯해 라면과 김치, 각종 통조림 반찬 등 즉석식품의 종류도 다양할 뿐 아니라 그 맛이 직접 요리한 것보다 더 좋다는 데 감격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열악한 지역으로의 장기출장도 더이상 무섭지 않다는 친구의 말에 우리는 깔깔대며 웃고 말았지만 이런 놀라운 식품가공기술의 뒤에는 ‘맛의 배신’이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 맛의 배신>은 5월 EBS에서 같은 제목으로 방영된 2부작 다큐멘터리의 원작이다. 환경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듀서(PD)인 유진규가 오랜 탐구와 취재는 물론, 자신이 피실험자가 돼 식단과 식습관을 바꿔나가는 실험을 통해 완성한 책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단짠단짠에 열광하게 되었을까’라는 부제처럼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텔레비전 먹방(‘먹는 방송’의 줄임말) 프로그램에서는 경쟁이라도 하듯 달고 짜고 자극적인 맛을 찾아 시청자의 오감을 자극하고, 그 결과 설탕과 소금이 마치 미식의 본류인 것처럼 우리 식탁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식품회사에서 만들어져 나온 인스턴트식품들은 거부하기 어려운 향미로 자극을 원하는 우리 미각에 강한 보상을 주고, 그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음식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포만감을 주지 않는 이런 음식들은 배가 불러도 수저를 놓을 수 없게 만들고 결국 전세계에 비만이라는 역병을 전염시키고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본인의 식탁을 바꿔보기로 한다. 저자가 가장 먼저 시도한 실험은 모든 음식에서 설탕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직접 만들어 먹지 않는 한 국과 찌개, 심지어 나물반찬에서조차 설탕 뺀 음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부터 우리 음식에서 자연 그대로의 풍미는 모두 사라지고 달고 짠 인공의 향미만 남게 됐나. 저자는 한탄을 금하지 못한다.
그후로도 밀가루 안 먹기, 토마토와 고구마 먹기, 나물반찬과 생채소 먹기 등 짧게는 한달에서 길게는 6개월까지 자가 실험을 하면서 식욕이 어떻게 조절되는지를 관찰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유레카(Eureka·‘알았다’는 뜻)’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쓰고 있다.
어느 순간 식품 본연의 맛을 강하게 느끼게 됐고, 가공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재료들이 맛있다고 느끼게 됐다. 적은 양을 먹어도 배가 불렀고 식탐이 제어되는 효과도 나타났다. 허기감이 사라지니 인생에는 탐식보다 더 멋진 일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으며 식사의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를 찾은 느낌이라고까지 그는 쓰고 있다.
지구상에 식용으로 쓸 수 있는 식물은 7만5000종인데 인류 역사에서 음식물로 이용했던 식물은 3000종, 그중 대규모로 재배된 식물은 150종에 불과하다. 이 무궁한 자연의 향미, 영양으로 가득한 야생의 식재료들을 놓아두고 공장에서 인공으로 합성해낸 가짜 맛에 건강과 미식의 쾌락을 빼앗기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이 책을 꼭 한번 읽어보고 놓쳤던 맛의 진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