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이 가슴에 남는다⌟를 읽고
“LOH 선교사!”
“그는 지독하다. 지독하게 일하고 지독하게 기도하고, 지독하게 사랑한다.” 한 문장에 4번 반복되는 지독하다는 말의 뜻을 찾아보았다. 사전에 “정도가 아주 심하다.” ‘정도’는 “얼마의 분량” ‘아주’는 부사로 “보통을 훨씬 넘는” ‘심하다’는 “정도를 넘어 지나치다”고 나왔다.
YOOK 목사의 「추천사」 제목까지 합하면 지독하다는 연거푸 5번이나 사용되었다. 인도 선교 18년의 사역 보고인 『사랑만이 가슴에 남는다』를 읽고 YOOK 목사는 “어쩌면 우리를 사랑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지독한 것인지 모르겠다.”라고 술회했다. 그러므로 나는 책을 완독하고 이 글을 쓰면서 ‘지독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은이가 「머리말」에 나열해 놓은 도움을 주신 분들을 헤아려 보았다. 비전 아시아에서 7명, 기장 여신도회와 직원들, 후원 교회 55개, 개인 후원자, 인도에서 도움 주신 16명, 에이즈 피해 아동들, 고아들, 희망 발전소, 희망공동체 선교사님, 형제자매들, 이리 여중•고 친구들, 고전 독서회 선배•친구들, 스승과 목회자의 길 인도자의 가족과 교수님, 마지막으로 든든하게 피를 나눈 부모형제, 남편과 고향 어르신들… 이 책을 내는 데 도움을 주신 31명과 수정(修訂) 등 2명 외 관계자들… 도우시는 분들의 명단을 헤아리면서 LOH 선교사가 지독하게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임을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원자로 등장하는 인물들을 위한 기도에 보면, 그 중에는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 가정적으로 위기와 고난 중에 있는 분, 취업과 결혼과 자녀를 포기한 자녀를 둔 부모님들, 사업실패와 위기에 직면한 분, 명퇴하고 은퇴하신 분들이 있었다.
저자는 시간 나는 대로 전주 등 22 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밥, 차, 커피, 영화, 군것질, 거리와 시장을 다니며 자녀, 노후, 실업, 은퇴, 건강, 교회, 승진, 직장, 성공과 실패문제와 기타 인간관계로 염려와 걱정하며 평범한 사람들을 만났다.
선교의 양과 질은 비전과 공감으로 결정된다. 고생이 크면 결실이 값지다. 감동에서 오는 모금이야말로 세상을 살맛나게 만드는 기적 중의 기적이다. 모금의 완성은 감사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게 한다. 거지가 불쌍하다고 모두가 다 동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감동된 대로 주머니를 연다. 그러기에 돈이 신이 되어 버린 세상, 배금주의의 도도한 물결이 세상을 다 삼키는 것 같은 세상에서 그는 돈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랑과 관심을 호소하면서도 풍성한 결실로 지금도 나누고 섬기고 있다.
인도가 처음부터 그에게 편한 곳은 아니었다. 그는 인도 선교 현장이 주는 고통과 절망감에 숨이 막혔다. 그는 힌두이즘의 폭력이 뒤엎고 있는 인도사회와 그 폭력에 물들어서 선악을 모르는 인도인들, 특별히 부패의 대명사인 관리들, 그리고 힌두이즘으로 변질된 기독교와 교회, 교우들이 주는 분노와 경악으로 비틀거렸다. 종교라는 이름의 거대한 폭력이 무서웠고, 위선을 견딜 수 없어서 그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전투에 참여했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힌두교와 인도사회에 분노하였다. 힌두교는 사람을 6개의 계급으로 차별화시켰고, 그것을 교육과 언론, 사회제도와 철학, 종교, 교육으로 세뇌해 정당화, 합리화시켰다. 인도는 브라만 계급의 영원한 지배를 위해 모든 것들이 다 희생되는 비인간적인 사회였다. 그는 힌두들이 타 종교인들에게 휘두르는 살인과 폭력이 다 용인되고 비호되는 사회, 인도인들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우월감과 광기, 가난과 고생을 전생의 죗값으로 치부하며 불의하고 악한 억압과 수탈을 인정하는 궤변과 억지를 날마다 목도하였다.
그는 인도에서 하나님의 무능을 참 많이 체험했다. 호주 선교사가 두 아들과 함께 차에 갇혀서 불에 타 죽었다. 오디사의 200여 명의 크리스천의 죽음은 힌두의 참혹함과 폭력성, 악마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무고한 생명들이 이유 없이 희생을 당할 때, 그는 무능하신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하며,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촉구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며 운다. 자신이 무능하고 무익하고 무용한 존재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한없이 무능하신 하나님이 주신 삶의 의미와 가치, 신비와 자유 축복과 약속, 구원과 해방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 그래서 그의 묵상과 외경심, 갈망과 사모함은 그를 점점 더 깊이 ‘십자가’로 이끈다.
그가 가끔 뇌까리는 대로 “주님이 오셔도 인도는 불가능하다.”라는 말에 예수님이 동의하실까?
그는 “사랑하는 딸아, 교회도 미워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사랑하며 품어라. 아낌없이 주며 축복하여라. 그 일을 위해서 내가 너를 불렀다.”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병든 사람, 불구자들, 영양실조자의 아이들, 생계 노동하는 아이들, 눈먼 노인네들, 직업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건 괴롭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할 것 같습니다. 멀쩡히 살아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서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못나고 모자라서 감당할 길이 없으니 제가 너무 고달픕니다.”고
그의 뽀남빨리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그는 뽀남빨리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엄지발가락 끝이 잘린 파상풍 환자의 발등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환자였다. 순박한 마을 사람들은 그의 고백대로 그가 잘 몰라서 나환자의 발에 손을 얹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가슴 아파하며 기도한 것으로 알고 감동하였다. 그가 두 번째 그 마을을 방문했을 때, 열 살의 에스더가 허벅지에 화상을 입어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모기장 속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모기장 위로 손을 벋어서 간절히 기도하고 다음 방문 시 약품을 챙겨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에 마을에 찾아간 그는 에스더의 화상이 깨끗이 나은 것을 보고 놀란다. 가족들 모두가 그가 기도해서 나았다고 증언하는 것을 들으며 그는 반신반의를 한다.
그 뒤 시간이 흘러 에스더가 14살에 결혼하고 18세에 2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애달파 한다. 사랑받으며 마음껏 꿈을 꾸어야할 나이에 육아와 가사 노동과 시댁과의 관계에 시달리는 에스더를 보며 그는 한없이 연민에 빠져 눈물짓고 있다.
결과적으로 볼 때 LOH 선교사는 사랑 때문에 인도에서 쫓겨났다. 그가 인도에서 나온 후에 겪고 있는 자신의 고난과 고통을 “어느 누구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난 받은 자만이 고난 받는 자를 위로할 수가 있으며, 사람들의 위로는 위로가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처가 되었다.” 라고 표현하였다.
그의 사랑이 아무리 지독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연약한 인간에 대한 긍휼, 약하고 게으른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새 일을 행하는 사랑, 새로운 피조물을 빚어내는 사랑, 세상을 구원할 사랑” 일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는 주님처럼 피를 음료로 살을 밥으로 주고 싶다고 탄원한다.
예수님의 사랑이 제자들 가슴에 남아서 예루살렘의 많은 영혼들을 추수했듯이, 바울 사도의 사랑이 로마 제국 내에 많은 영혼들을 수확했듯이, LOH 선교사의 지독한 사랑이 인도 달리트들의 가슴에 남아서 추수를 할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새로운 고난과 고통에 직면하게 될지라도 나는 끝까지 사랑으로 살며 사랑으로 남고 싶다. 예수님처럼 머리와 가슴과 손발이 동시에 움직이는 사랑으로 사는 자이고 싶다.”라는 그의 염원이 하늘나라에서 이미 결재가 났을 것이다.
나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LOH 선교사가 바로 바울과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사랑만이 가슴에 남는다』라는 책을 잘 다듬으면 다음 세대에 바울 서신의 『로마서』, 『고린도서』 등처럼 『인도서』, 『잠말라마두구서』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이는 저자의 철저한 자료수집과 기록과 편집에서 지독한 노력이 있으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깊고, 넓고, 많은 지식의 양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저력에 심심한 감사와 존경을 드리며 글을 마친다.
첫댓글 사랑은
모든 것을
감내하며 이루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