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문산, 호젓한 숲에서 비를 맞으며 걷다
1. 일자: 2022. 6. 5 (일)
2. 산: 회문산(837m)
3. 행로와 시간
[덕치치안센터(10:50) ~ 빨치산교통호(12:02) ~ 깃대봉(12:12) ~ (천마봉) ~ 삼연봉(12:49) ~ 임도/점심(12:58~13:10) ~ 회문산/큰지붕(13:53) ~ (작은지붕) ~ (헬기장/휴양림 갈림) ~ 문바위(14:23) ~ 돌곶봉(14:34) ~ 회문산자연휴양림(15:00) ~ 화이트밸리(15:07) / 약10.52km]
< 회문산 산행을 준비하며 >
임실에 있는 회문산에 간다. 어, 이런 이름의 산이 있었나 싶어 월간산과 한국의산하에서 정보를 얻어온다. 임실군, 순창군, 정읍시의 경계를 이루는 회문산은 부근에 옥정호이 있고 섬진강이 흐른다. 지역에서는 큰지붕 이라 부르는 주봉 회문봉을 기준으로 남동쪽으로는 깃대봉, 서쪽으로는 장군봉을 거느리고 솟아 있다. 산 남쪽 계곡 좌우로 숲이 울창한 국립휴양림이 위치해 있다. 산림청 선정 200대 명산에 오를 만큼 산 자체도 준수하지만 유명세를 치르는 다른 이유가 있다. 6·25전쟁 중 빨치산들의 활동무대로 영화 ‘태백산맥’과 ‘남부군’의 현장이었고, 풍수지리상 5대 명당지로 24혈의 산세를 지녔다고 한다. 숲이 무성하고 호젓한 분위기와 광활한 전망이 일품이라 한다. 섬진강, 오원천, 구림천을 싸고 돈다. 날씨 좋은 날에는 지리산까지 보이며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로 알려진 산이다.
가야 할 길을 그려본다. 덕치면사무소를 들머리로 깃대봉/천마봉/삼연봉을 거쳐 정상에 서고, 이후 시루봉/들곶봉을 지나 휴양림으로 내려온다. 고도 165m에서 시작하여 700~800m급 봉우리들을 여럿 오르내리는 5시간 내외의 산행을 예상해 본다.
< 희망사항 >
딱 3개월 전, 참가 신청을 했다가 취소를 했다. 당시 기록에‘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오미크론이 두려워, 몇 주 먼 산행을 쉬었더니 몸이 근질거린다. 아마도 이 기록이 살아난다면 그건 큰 용기와 결단의 산물일 게다. 산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싶다.’라고 했다. 기록은 3개월이 지나서야 살아난다. 그것도 청학동에서 시작되는 지리산 남부능선 종주를 신청했다가 비 소식에 접고 급하게 행선지를 변경하고 나서야 인연을 되살린다. 여러 모로 회문산에게 미안하다. 산에서의 값진 경험과 정성스런 글로 보답해야겠다.
(여기까지는 산행을 준비한 기록이다. 늘 그렇듯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다르리라.)
< 덕치치안센터 ~ 깃대봉 >
현충일로 이어지는 연휴, 일요 산행은 오랜만이다. 비 예보가 있어서 그런지 하늘이 흐리다. 그래도 대기는 청명하다. 관악산 육봉이 잠에서 깨어나나 보다. 골격이 늠름하다. 사당에서 버스에 오른다. 20명이 넘던 예약자 중 상당수가 취소를 했나 보다. 버스 안에는 여유 좌석이 많다. 산악회의 최대 적은 비임이 틀림없다.
차가 많이 막힌다. 공주를 지나며 차 창에 빗방울이 비친다. 10시 50분이 되어서야 임실 땅에 도착한다.
길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올 게 왔다. 준비한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선다. 내심‘내 몸이 흠뻑 젖어도 비다운 비가 내려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적한 마을 길을 따라 1km 남짓을 걷자 산길이 시작된다. 500미터를 더 걷자 갈림이 나타난다. 1.5km에 고도를 180m 올랐다. 본격적인 비탈이 시작된다. 비를 품은 숲은 회색 하늘을 배경 삼아 푸르름이 돋보이며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몽환적이라 표현할 수 있는 색의 조화가 멋지다. 빗방울 떨어지는 리듬에 맞춰 걷는 건 얼마 만에 접하는 호사인가?
꽤 올랐다. 맑은 날에는 경험할 수 없는 신비롭고 으스스한 분위기, 숲에는 갈수록 연무가 짙어진다. 길가에 빨치산 교통호 표식이 있다. 맞다, 이곳은 빨치산의 주무대였다. 아픈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를 걷고 있다. 1km 거리에 고도는 300미터를 치고 올랐다. 비를 맞으며 마음을 비워서 그렇지 만만치 않은 오름이었다. 첫 봉우리 깃대봉 가는 길은 멀게 느껴진다. 이정표의 거리와 내 마음의 거리는 늘 괴리가 크다. 마음은 언제나 먼저 봉우리에 가 있다.
평지라곤 느끼지 못하고 걸어서인지 깃대봉 정상 주변의 공터가 더 넓게 다가온다. 지나는 어르신께 사진을 부탁한다. 아마도 산에서 우산을 쓰고 찍은 최초의 사진이 아닐까 한다. 새로운 경험이자 훗날 추억으로 되살아 나리라.
< 깃대봉 ~ 회문산 >
빗방울이 거세진다. 역할을 상실한 우산을 관성으로 들고 다녔나 본데 울창한 조릿대 숲 앞에선 맥을 못 춘다. 접는다. 손의 자유가 새삼스럽다. 바지까지 적시고 온몸에 차가운 기운을 불러오는 조릿대 숲은 길게 천마봉을 넘어서까지 이어진다. 지리산 남부능선을 탔어도 비슷한 길을 걷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몸이 흠뻑 젖고 나자 비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아이러니다. 현실을 받아들인 결과, 마음은 편해진다.
잠시 내려서더니 이내 평탄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걷기에 그만이다. 키 작은 대나무와 키 큰 참나무, 그리고 누런 흙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에 비까지 내리니 회문산 숲은 생기가 돋고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다. 숲의 서늘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이 온몸에 전해지는 기분이다. 걷는다는 원초적 행위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30여분 꿈 같은 길을 걷고 나서 새 이정과 마주한다. 삼연봉이다. 고도는 600미터 초반으로 낮아졌고, 회문산 정상까지는 2.2km가 남았다. 휴양림으로 가는 길도 보인다. 초반 찌뿌둥하던 하던 몸이 완전히 산에 적응했다. 속도를 내어본다.
숲 일색이던 길에 변화가 감지된다. 저 만치 앞에 임도가 보이고 트럭이 서 있다. 잘못 본 게 아닌가 다시 살핀다. 너른 임도와 공사장이 나타난다. 일순간 당황한다. 이건 뭐지, 예상치 않은 변화에 어리둥절하다. 휴양림을 확장하나 보다. 언덕을 올라 내 길을 간다. 커다란 나무 밑에 자리를 잡는다. 비를 맞아가며 점심을 먹는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몰골과 음식이지만 씩씩하게 맛나게 먹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저체온증이 온다. 바람막이를 걸치고 걸어야겠다.
빗방울은 거세지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 무언가 스쳐가는 인기척에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빨치산의 신령들이 산을 맴돌고 있나 보다. 잠시 스치던 오싹한 기분은 이내 잊혀진다. 다시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갈림과 만난다. 정상은 700미터 거리란다. 여차하면 정상에 올랐다 이곳으로 하산하자는 생각도 해본다. 고도 차 200미터는 만만치 않았다. 비까지 내려 지면과의 마찰이 커서인지 오르는 발길이 무겁다. 그래도 언제 다시 이리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산행할 수 있을까 하며, 우중산행을 행운이라 여긴다.
걷기 시작한지 3시간 만에 회문산 정상에 도착했다. 거친 한문 글씨가 묘하게 끌린다. 깃대봉에서 사진을 찍어주셨던 어르신이 먼저 와 계시다. 다시 사진을 부탁했다. 정상에서 보는 전망이 좋다 했는데, 오늘은 아니다. 그래도 충분히 멋진 산행이다.
< 회문산 ~ 자연휴양림 >
잠시 망설이다. 예정된 등로로 향한다. 봉우리 몇 개를 넘어야 하고 길도 더 거칠겠지만 왠지 휴양림으로 하산하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을 했으면 뒤돌아 보지 말아야 한다. 부러 속도를 내본다. 길 우측 바위에 범상치 않은 필체로 새겨진 글귀가 있다.‘천근월굴’음양의 이치를 말하는 글이다. 회문산 정상석과는 또 다른 매력이다. 잠시 후 나타나는 커다란 소나무와 함께 긴 길에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비는 더 굵어지고 걸음은 한층 빨라진다. 헬기장과 휴양림 갈림이 있는 도로와 만난다. 주변 공터에 각시붓꽃, 엉컹퀴, 구슬봉이 등의 야생화가 지천이다. 하나같이 물기를 품어 생기가 돋는다. 들곶봉 이정표가 보인다. 1.1km 거리다. 함께 오던 어르신은 휴양림으로 가셨나 보다. 이제 진짜 혼자다. 문바위를 지나 마지막 오름을 오른다. 돌곶봉이란 이름답게 암릉이 있다. 밧줄을 잡고 오른다.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이정표가 정상석을 대신한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던 작은 오름들은 이로써 끝이 났다.
휴양림 가는 길은 예상대로 가팔랐다. 중간쯤 오다 맞닥트린 남은 거리 577미터 이정은 거짓이었다. 훨씬 더 길게 내려선다. 비탈에 돌도 거칠어 무릎에 부담이 된다. 마침내 작은 나무 계단이 보인다. 그 끝은 도로와 연결된다. 연이어 나타나는 국립휴양림 매표소, 차는 이곳에서도 한참을 더 내려가야 있었다. 시계를 본다. 3시 10분, 4시간 20분의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모든 기억이 리셋 된다.
< 에필로그 >
온몸이 흠뻑 젖었다. 옷을 갈아입는다. 여벌의 옷을 준비한 건 잘한 일이다. 슬리퍼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쉽다. 습기 가득한 버스에 오른다. 자리에 앉아 사진을 보며 각 포인트의 시간을 살핀다. 산에서의 일들이 오롯이 되살아난다. 아, 그러했구나….
짧은 잠에 피로가 조금 풀린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회사 메일도 살피고, 음악도 듣고, 동영상도 본다. 남들은 버스 타고 가는 산행의 단점을 긴 이동시간이라 하지만, 이것도 습관 들이기 다름이다. 내겐 오롯이 나를 찾는 소중한 시간이다.
차가 오산 어름을 지난다. 서녘에 불이 난 듯 석양이 빛나고 있다. 짧은 순간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하늘 끝을 물들이고는 사라진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 든다.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내내 비를 맞으며 걸었지만 만물을 소생시키는 그 고마움에 내 몸을 맞긴 산행이었다. 그 비와 바람 사이로 문득 뒤를 돌아보게 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아마도 길 위에서 본 이름 모를 무덤들의 혼령이려니 한다. 담담했다. 이념 갈등의 현장에 덩그러니 위령비 하나 세워 을씨년스럽게 추모하는 것보다 휴식을 주는 살아 있는 공간, 휴양림을 만든 발상에 감사한다.
잠을 자고 나서 산행기를 정리하는 시간, 내가 사는 곳에도 비가 온다. 이래저래 회문산은 비로 기억될 것 같다.
회문산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본다. 숲이 무성하여 호젓한 산행을 즐기기에 제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