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린야구는 100여년 전 일제시대에 이미 야구부를 창단하여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교야의 명문중의 명문이며 신일,충암,서울,덕수,휘문등이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서울팀의 선두 주자로서 프로야구 이전 가장 인기가 많은 고교야구 팀이었습니다.
대통령기ㅡ2회, 청룡기ㅡ2회,황금사자기 ㅡ4회등 총8회의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지방대회중 가장 귄위가 있는 화랑대기 ㅡ2회등 총10번의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수많은 야구 인재를 배출하였습니다.
김충ㅡ배성서ㅡ한동화 ㅡ김우열ㅡ김차열ㅡ유남호ㅡ박준영ㅡ이해창ㅡ김현홍ㅡ김광수ㅡ이길환ㅡ정종현ㅡ정혁진ㅡ김문영 ㅡ이선웅ㅡ윤석환ㅡ유지홍ㅡ박노준ㅡ김건우ㅡ김상호ㅡ나웅ㅡ이병훈ㅡ송구홍 ㅡ서용빈ㅡ인현배ㅡ장재중ㅡ이승호 ㅡ경헌호ㅡ권오준ㅡ손시헌ㅡ이종욱ㅡ고창성ㅡ김용의ㅡ윤희상ㅡ이영하ㅡ김대현......한국야구의 기랑성같은 스타 등용문이요 화끈한 공격야구의 심벌같은 선린야구는 69년 유남호가 주축이되어 대통령기ㅡ청룡기ㅡ화랑대기ㅡ황금사자기를 모두 안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보냅니다.(최초4관왕)
선린야구가 60년대 최고의 팀으로 등극하는데 일등공신이 감독과 선수들의 땀과 노력이라면 숨은 이등공신은 선린상을 졸업한 백상 장기영(1916~1977한국일보 창업주,경제부총리,국회의원 역임)선생의 아낌없는 선린야구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장선생이 봉황대기를 탄생시키면서 부터 이상하게 선린야구는 준우승 징크스에 빠져듭니다.(준우승 총15회)
용산 토박이였던 장선생은 본인이 만들었던 봉황대기에서 후배들의 손으로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는걸 끝내 보지 못하시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이제부터 불운한 야구천재 박노준과 선린야구의 봉황괴담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선린야구는 봉황대기에 다섯번 결승에 올라 모두 준우승에 그친 봉황괴담을 만들었으며 그 주인공은 야구천재 박노준이었습니다
ㅡ하편에서 뵙겠습니다ㅡ
첫댓글 박노준 선수 아마 시절은 거의 보지 못 해 선린상고가 야구 명문인지 몰랐습니다. 저 어릴적에는 군산상고,충암고,천안북일고,부산고,경북고,서울고,광주일고 이런 학교들이 야구 잘 하는 학교로 어렴풋이 기억이 나네요.
준일짱님께서 야구 보시던 그 기간이 선린야구의 최고 슬럼프기 였습니다.
82년~~89년까지 슬럼프에서 허덕이던 최악의 시절이었고 80년 황금사자기에서 광주일의 선동열을 누르고 우승한 후 무려 35년만에 2015년 황금사자기에서 이영하ㅡ김대현의 원투펀치를 내세워 대구상고(상원고)를 누르고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감독ㅡ윤석환 코치ㅡ조충렬)
1989년 봉황기대회 결승전 동산고-휘문고의 대결이 기억납니다.동산고 2학년 위재영,휘문고 1학년 임선동의 팽팽한 투수전이었습니다.위재영은 오히려 3학년보다 2학년때가 더 위력적이었습니다.프로에서의 위재영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네요.
위재영의 공이 가장 좋았을때가 고교 2학년때고 임선동의 공이 가장 좋았을 때가 고교 1년생때, 그리고 나성범의 공이 가장 빠르고 위협적일 때가 연대 1학년 시절이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신체가 건강하고 운동신경이 최정점에 올랐을때 전성기를 구가할수 있는것 같습니다.
농구의 여준석도 프로에 얼리해야 한국농구 발전을 위해서나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나 현명한 선택인것 같습니다.
@웅이훈이 나성범이 고교때는 잘하지못했었나요? 광주진흥고출신이라서 KIA타이거즈가 1차지명을 안한게 궁금하네요?
@이글스 잘했습니다.
1차지명은 군산상고 투수인 전우엽이 기아에 지명되고 나성범은 2차 지명으로 밀렸네요.
연대로선 커다란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웅이훈이 전우엽 선수가 프로에서 뛴 기록이 있나요? 잘 모르는 선수네요.
@농구만세 2007년에 군산상고의 우완투수 전태현(전우엽은 후에 개명한 이름)은 187㎝, 85㎏의 좋은 체격을 가진데다가 최고 시속 141㎞의 빠른 볼과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등 다양한 변화구를 던지며 제구력과 경기 운영능력이 뛰어난 투수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에 비해 진흥고의 4번타자였던 좌완투수 나성범은 타격은 좋았지만 투수로서는 볼의 구속이 평범했기 때문에 기아로서는 1차지명에서 전태현을 지명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나성범은 연대에 입학한 이후에 구속이 대폭 향상된 케이스라는군요.)
LG가 2차지명에서 나성범을 지명했지만 나성범은 1년 위인 형 나성용이 포수로 있는 연대 진학을 선택했고 이후 슈퍼스타로 성장합니다만... 하지만 전태현은 기아 입단 후 계속되는 잦은 부상과 재활로 인해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가 2016년에 방출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성범을 패스하고 전태현을 지명했던 당시 기아의 스카우터가, 06학번에서 투수 류현진을 거르고 포수 이재원을 선택했던 SK 감독처럼 나중에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고 하는군요.
@농구만세 2008년 전후에 당시 고대에 비해 전력이 약세였던 연대로서는 나성범의 입학이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나성범은 4년 동안 정기전에 모두 출전해
1학년- 9-2로 완투승
2학년- 4-5로 완투패
3학년- 완투 4-4 무승부
4학년- 2회에 구원등판 후 3-1로 승리
로 총 2승 1패 1무승부를 기록했는데, 당시 고대에 비해 투타에서 모두 약세였던 전력 차를 고려해 볼 때, 4년 동안 나성범의 팀에 대한 공헌도는 가히 압도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웅이훈이님은 선린상고팬이시군요.선린상고가 요즘은 이름이 바뀐 것 같은데 맞는지요? 지금도 야구팀이 있나요?
군산상고만이 유일하게 전통을 간직한 상업학교 이름을 쓰고 있는데 참 부럽습니다.
선린인터넷고라 부르기도 좀 어색합니다.
선린 인터넷 고교 입니다.
선린상고 우승의 역사
선린상고는 60년대에도 강팀이었습니다.
63년 황금사자기에서 경남고를 4-1로 꺾고 첫 우승을 했으며 (당시의 주요선수는 투수 박동수, 3루수 김 충, 2루수 한동화)
66년 황금사자기에서도 다시 부산고를 4-0으로 물리치고 우승했습니다.
(당시의 주요선수는 투수 윤효상, 포수 김태석, 3루수 박용진)
선린상고 역사상 잊지 못할 최고의 해는 69년이었습니다.
4개의 고교야구대회를 모두 휩쓸며 고교야구 천하통일을 이루었으니까요.
대통령배 결승전(05/07)... 선린상고 3-0 성남고
청룡기 결승전(06/15)... 선린상고 6-0 대구상고
화랑대기 결승전(07/28)... 선린상고 4-0 대구상고
황금사자기 결승전(10/13)... 선린상고 12-5 경북고
(봉황대기는 71년에 창설된 대회였음)
당시의 주요선수는 투수 유남호와 박준영, 우익수 홍창권(4번타자), 3루수 윤학천(3번타자), 포수 정장헌(5번타자) 등이었습니다.
유남호와 윤학천은 연대로 진학했는데 유남호는 연대의 에이스로 활약했고 윤학천은 연대에서 3, 4번을 치며 중심타자로 크게 활약했습니다.
이후 선린은 우승권에서 멀어졌다가 77년에 2학년 에이스 이길환(연대 78학번)의 호투에 힘입어 황금사자기와 봉황대기에서 결승에 오르지만 두 번 모두 준우승에 그치고 맙니다.
선린상고는 10년만인 79년에 대통령배에서 부산상고를 15-1로 대파하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당시의 주요선수는 투수 윤석환(3학년)(4번타자)과 박노준(1학년), 유격수 이정철(2학년)(3번타자) 등이고 부산상고의 투수는 연대 에이스가 된 윤학길임.)
그리고 80년에는 청룡기에서 마산상고를 5-0으로 꺾고 우승을 한 후
(당시의 주요선수는 투수 박노준(2학년)과 나성국(3년), 1루수 류지홍(3학년)(4번타자), 3루수 김건우(2학년)(5번타자), 유격수 이정철(3학년)(3번타자) 등이었고 마산상고의 투수는 후일 동아대와 롯데에서 좋은 피칭을 보여주었던 박동수(3학년)였음)
이어서 황금사자기에서도 광주일고를 5-3으로 물리치고 우승하며 2관왕을 차지했습니다.
(광주일고 에이스는 선동렬(3학년)이었음.)
1학년 때 한번, 2학년 때는 두 번이나 우승컵을 안았던 81년 고교 최고의 스타 박노준과 김건우는 정작 3학년 때는 청룡기와 화랑대기, 봉황대기에서 결승에 진출했지만 세 번 모두 준우승에 그치는 불운을 겪으며 큰 좌절감을 맛봅니다.
이후 선린상고는 투수 이병훈(고대→LG)과 송구홍(건대→LG)이 활약했던 85년에 화랑대기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만, 그로부터 30년 동안 긴 슬럼프에 빠져 있다가 2015년에 황금사자기에서 다시 한번 우승의 감격을 맛봅니다.
@아오이 아오이님의 선린상고 야구의 역사 잘 읽었습니다.야구,축구 21학번 연대,고대 선수들 소개 좀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어떤 선수들인지 감을 못잡겠네요.
@아오이 그러고 보니 이병훈과 송구홍의 85년을 간과했는데 정확히 짚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때 이호성의 광주일고를 누르고 우승한걸 잊고 있었습니다.
@아오이 그 이병훈이 투수였나요?ㅎㅎ
@지브라 중학교때 혹사당해서 투수는 접고 고2때 타자로 전업했습니다.
@농구만세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고교야구와 고교축구는 특출한 일부 선수들을 제외하면 기량이 거의 비슷비슷한 선수들이 너무 많아서 그 선수들을 대상으로 비교평가하는 일이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신입생들이 금년 시즌에 대학무대에서 뛰는 모습들을 본 후에야 어느 정도 비교평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웅이훈이 85년에 선린상고에는 동명이인인 두 명의 3학년생 이병훈(한자로도 같은 李炳勳)이 있었지요.
두 이병훈이 모두 투수와 외야수를 겸하며 뛰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좀 헷갈렸었는데 그 두 명의 이병훈은 또 함께 고대로 진학했었지요. ㅎㅎ
당시 85년 화랑대기 결승전의 신문보도를 보면
“선린상고는 이병훈이 완투하며 광주일고 타선을 산발 3안타로 막아 1-0으로 승리를 지켰고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라고 했습니다.
@아오이 아오이님 21학번 연대,고대 선수들의 기량을 평가해서 어느 학교가 리쿠르팅이 잘되었나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고교시절 청소년 대표 경력이나 수상경력, 야구의 경우는 타율 등을 아시는 선수만 좀 소개해 주실수 있는지요?
아오이님 좀 괴롭히고 싶습니다. ㅎ ㅎ
@아오이 이병훈이 고3때 까지 투수를 했었군요~~미처 몰랐습니다.
선린상고에 이병훈이 2명이 있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습니다.해설을 하면서 티비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이병훈이 투수로 혹사 당해서 고2때 타자로 전업한 선수인가요?
제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고3때까지 투수를 겸업했네요
우리 선린중 애들은 LG이병훈을 큰 이병훈 그리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이병훈을 작은 이병훈이라 불렀습니다.
작은 이병훈과 큰 이병훈 모두 고대에 진학했는데 거기서 우열이 크게 갈렸습니다.
@웅이훈이 그라운드의 개그맨 이병훈선수의 모습을 생각하면 고등학교 시절이 그려지지 않네요ㅎㅎ
@지브라 제 친구가 장충중에서 야구를 했었는데 그렇게 욕도 잘하고 재밌었다고 타학교까지 소문이 났다고 전하더군요. 재질이 있었는데 그놈의 술때문에 선수 생활을 마감한게 타학교 출신이 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김정민 제 지인 중에도 프로야구선출이 몇있는데 그 시절에는 술담배가 기본이었더라고요. 선동열 정삼흠의 전설의 음주완투가 사실이었던 듯 싶습니다.
@지브라 네! 맞습니다. 선동렬 LG에세 트레이드된 김상훈 해태시절 덕아웃 계단에서 담배피는 두선수를 인터뷰 장면이 그대로 TV 중계로 보내 주더군요. 그시절에는 다그렇게 했습니다.
@김정민 네이*에서 80년대 축구한일전 보는데 경기 중 김정남 감독이 벤치에서 담배피우더군요. 진짜 그 옛날 담배피우는 호랑이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지브라 예전에는 라디오에서 프로야구 중계할때 해설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중계를 하곤 그랬습니다. 故최동원 형님이 그랬습니다. 그시절에는 프로야구 감독 혹은 아마추어 감독들도 다들 감독벤치서 담배를 피곤 했습니다. 그땐 다그랬습니다. 아~옛날이여~
야구의 명문고를 한번에 볼수 있네요
선린상고는 덕수상고 야구부가 생기면서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의 명문상고 셋이 경기상고, 덕수상고, 선린상고인데, 선린상고 야구부의 선전으로 덕수상고와 경기상고도 야구부(이용철이 경기상고 출신입니다.)를 만들었고, 나중에 세학교가 친선전을 하려고 하다가 실력이 제일 처지는 경기상고는 빼고 선린상고와 덕수상고간 친선경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경기상고는 야구부를 해체했구요.
오랜만에 반가운 이름들이 나와서 예전 고교야구 응원하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