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NL(민족해방)의 등장과 전개 그리고 몰락
1. 80년대 이후 한국 진보운동의 주류로 등장한 NL진영에 대한 현재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억은 2012년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건의 강렬했던 대립과 그 후 이어진 분열 그리고 헌법재판소에 의한 정당해산일 것이다. ‘종북세력’, ‘주사파’ 진영이라 불렸던 NL이 어떻게 운동권에 등장했고 세력을 확장하여 패권을 장악했으나 결국은 몰락했는가에 대한 분석은 다만 지나간 진보운동 역사를 살펴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현재의 진보운동의 성격과 그것이 대중과 어떤 연관을 통해 진행되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한 ‘진보운동’의 방향을 통찰할 수 있는 근거를 탐색하는 작업인 것이다.
2. NL이 강조하는 ‘민족’의 중요성은 1980년 광주의 비극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광주의 비극적인 학살에 미국의 책임과 개입이 있다는 주장은 반제국주의와 반미운동의 거센 물결을 가져왔고, 정당성을 상실한 남한 군부세력 대신 북한 정권과의 협력을 통한 진정한 반제반파쇼 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80년대 간헐적인 저항의 형태로 드러났지만, 이것이 하나의 체계적인 운동전략이나 흐름으로 파생하게 된 것에는, 일명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의 역할이 컸다. 서울대 82학번이었던 김영환은 85년 자신이 쓴 <강철서신>을 은밀하게 대학 내에 배포했다. <강철서신>은 운동권에 강력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반독재’ 중심의 운동을 넘어선 민족을 강조하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운동의 핵심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관심을 끈 것이다.
3. <강철서신>에 기록된 다양한 주장에 공감한 세력들은 그동안 아직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던 혁명의 전략과 방향을 수립하였고 일명 ‘NL-PDR'이라는 혁명론을 핵심으로 삼기 시작했다. 86년 새롭게 등장한 NL계열은 그동안 학생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하던 학교의 지하서클을 폐지하고 운동의 헌신성으로 무장한 단일 학생조직인 RM0(혁명적 대중조직) 건설을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후배 그룹에 지지를 받았고, 결국 85년말에서 86년 초 겨울방학 때 많은 지하서클의 해산을 가져왔다. 서클해체를 주도한 세력도 김영환을 중심으로 한 서울대 <고전연구회>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개별적인 서클 대신에 통합적이고 단일한 학생운동 조직인 <전대협>이 결성된 것이다.
4. NL진영이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들이 갖고 있던 혁명의 전략과 전술의 선명성이나 분석적 능력에 있기 보다는 민족에 대한 정서적 중요성과 대중노선의 강조에 있었다. “NL계 학생운동은 민족의 고통과 저항의 집단적 기억을 통해 집합적 정체성을 강화한다. 민족의 슬픔에 자신을 대입함으로써 폭력에 저항하고 결국 민족의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주체사상의 ‘품성론’에 기초한 혁명가의 자세에 대한 감정적 영향도 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학생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뜨거운 열정과 포기하지 않는 신념에 대한 강조에 강한 동조를 느꼈다고 한다. 당시 ‘강철서신’에는 품성론에 대한 이러한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선한 노동자의 발굴과 선정에서 1차적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품성이다. 솔직, 소박, 겸손, 성실, 용감한 품성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 품성은 사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한 사람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5. 87대선은 사회운동이 추구했던 민주세력의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지만, 운동에 대한 억압이 축소되고 운동세력의 확장을 가져오면서 운동권의 역량은 80년대 말 일시적으로 팽창하였다. 80년대 말 NL 운동의 중심은 ‘민족-통일’운동이었다. 89년에는 문익환과 임수경의 북한 방문도 이루어진다. 운동의 주체세력도 변모하였다. 80년대 중반까지 운동을 주도하였던 서울대, 연대, 고대 중심의 명문대에서 일반대 및 지방대로 확산되었다. 특히 89년 전대협 의장에 한양대 임종석이 선출되면서 한양대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부각되었다. 당시 대학학생회와 과학생회의 대표는 대부분 NL계열이 선출되었고 PD는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이러한 운동권 구조는 이후 진보운동의 성격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6. 학생운동은 1991년 시위 도중 명지대생 강경대의 사망과 이후 ‘분신정국’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쇠락하였다. 대중들의 정서와 어긋난 지나치게 급진적인 통일정책에 대한 주장과 비합법적이고 폭력적인 시위방법은 변화된 정치적 지형에서 대중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민중적 사회운동의 핵심은 학생운동에서 일반 사회운동 조직으로 전환된다. 변화된 정치환경에서 두 진영의 기본적인 전략은 NL은 ‘민주대연합’의 통일전선전술이었고, PD는 진보정당건설이었다. 두 진영의 대립과 투쟁은 각각의 정치전략과 전술보다는 그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와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하였다는 것이 대부분의 증언이었다.
7. NL진영은 <전대협> 행사의 일사분란한 성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집단주의적이고 위계적이며 목표지향적 성격이었다. NL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적 가치규범인 권위주의, 집단주의, 연고주의가 강하게 작동하였다. 구성원의 의리를 강조하였고 선후배의 서열을 중시했다. 이런 점이 운동권 학생들의 정서에 더 강하게 작용하였고 더 많은 관심을 끌어들였는지 모른다. 반면 PD계열은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강했고 개인주의적 민주주의, 연령이나 성별의 차이보다는 평등, 다문화 등 후기산업사회의 가치를 더 중시했다. 이런 문화적 차이는 다양한 논쟁과 결정에서 심각한 분열을 이끌었다. 예컨대, 2012년 통진당 분열의 결정적 원인은 북한에게 당원정보를 전달한 당원에 대한 징계에서 NL계열은 동지적 온정주의를 주장하며 처벌하지 말자 했을 때 거기에 분노한 PD계열이 이탈했던 것이다. 공적인 정치적 조직에서도 원칙과 규칙보다는 인간적인 정서를 중시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8. 이런 NL계열 중에서도 더욱 극단적인 집단이 바로 이석기가 속했던 <경기동부연합>세력이었다. 이들의 기원은 경기도 광주대단지 사건의 기억을 갖고 있는 성남지역 대학생들의 모임에서 시작되었으며 엄격한 질서와 협력 그리고 대중적인 활동을 통해서 세력을 확장했으며 결국은 통진당의 핵심세력으로 부각한 것이다. 이석기 또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으로 진출하기까지는 전혀 주목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배후에서 활동하면서 당내 비례대표 후보 선출에서 분열된 다른 집단과는 달리 경기동부 집단의 압도적 지지를 통해 선출된 것은 NL계열의 집단적 정서를 가장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례였다.
9. 진보적인 민중운동이나 학생운동의 역사를 볼 때, 대중과의 협력을 상실한 운동은 성공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1986년 건국대 사태에서도 당시 운동을 주도한 집단은 ‘미제축출, 북한과의 교류’와 같은 급진적 주장을 내새웠지만, 대중들의 호응이 적자 운동의 방향을 수정하여 ‘직선제 개헌’이나 ‘민주화’에 초점을 맞췄고 이는 87년 6월 항쟁에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운동이 ‘대중성’을 상실하고 자신들만의 논쟁에 빠지게 되었을 때, 진보적 운동은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혁명의 시대에서 개량의 시대’로 바뀐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고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모색해야만 진보운동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NL의 성장과 몰락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 학생운동과 사회시민운동의 출현과 연대는 현 정치 상황의 발전과 몰락으로 이어진다. 목적을 찾은 사람과 목적을 이룬 사람, 목적을 이용한 사람과 목적을 잃은 사람들....... 아직도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시각의 차이가 너무 크다. 시간이 지나 희석 될 때까지 그 잔상은 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