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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헌의 문목에 답하다
중용 독법(中庸讀法)의 주(註)에 대하여
진서산(眞西山)의 설은 주자(朱子)의 뜻과 약간 같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자는 본래 독공(篤恭)이 지극함에 이르러 신묘함이 이와 같다고 한 것이니,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신묘함이 독공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산도 독공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신묘함이 있다고 말하였을 뿐입니다. 어찌 독공으로 말미암아 힘써 행하여 점차 나아가 그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서산의 학문이 이렇게 엉성하지는 않으니, 말로써 뜻을 오해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씨(饒氏)의 설에 운운한 것은,《대학》은 사람을 가르치는 법도이므로 학문하기를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고, 《중용》은 도(道)를 전하는 책이므로 이 도는 이러이러하다고 한 것이니, 두 책의 주의(主意)가 본래 다르기 때문에 말이 각각 거기에 해당되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씨의 설이 틀리지 않았는데, 이제 보내온 편지에서 “학(學)과 도(道)를 나누어 둘로 만든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한 것은, 바로 공 자신이 잘못 본 것입니다. 주 선생(朱先生)이 여자약(呂子約)에게 회답한 편지에서 능(能)과 소능(所能)에 대한 설을 본 적이 있습니까? 도(道)와 행(行), 학(學)과 의리(義理)의 참뜻이 같지 않은 점을 분석한 것이 지극히 정밀합니다. 이것을 보면 공 스스로가 잘못 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학(學)은 능(能)이고 도(道)는 소능(所能)이니, 그것을 뒤섞어서 일설(一說)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그 글은 《주자대전(朱子大全)》 제48권 27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그 앞의 25장과 26장의 편지와 연관해 보아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의 주석에서 물재 정씨(勿齋程氏)가 운운한 데 대해 보낸 편지에서 이 설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정(靜)한 때의 공부는 어떤 일입니까? 당초에 순(舜)이 인심(人心) 도심(道心)을 말한 것은 모두 이발(已發)한 곳에 나아가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일(精一)과 집중(執中)은 다 그 발한 것으로 인하여 힘쓰는 일이며, 정(靜)한 때의 공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땅히 본설(本說)에 의거하여 강구하고 실행할 것이지, 어찌 억지로 없는 것을 가져다 쓸데없는 말을 보태어 원래의 설과 합하여 하나의 공부로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밖에서 끌어온 의리(義理)를 많이 삽입하여 본문(本文)의 바른 뜻을 어지럽게 한다.”는 것으로서, 독서하는 데 가장 병통이 되므로 주문(朱門)에서 깊이 경계한 것입니다. 만약 보내온 설대로라면 공자가 말하지 않은 것을 맹자가 말하였고, 맹자가 말하지 않은 것을 정자ㆍ주자가 말한 것이 많은데, 이제 뒤에 나온 설을 가지고 매양 앞의 성현들이 말하지 않은 곳에 끌어 붙여서 뭉뚱그려 하나의 설로 만들어 구비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게 괜찮겠습니까.
마음의 허령(虛靈)과 지각(知覺)에 관하여 격암 조씨(格菴趙氏)가 운운한 것은, 이 또한 보내온 편지에서 잘못 보았습니다. 무릇 혈기(血氣)가 있는 것은 본래 다 지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치우치고 막힌 새나 짐승의 지각이 어찌 우리 인간의 가장 신령한 지각과 같단 말입니까. 더욱이 여기서 지각을 말한 것은 실로 성인들이 전수한 심법(心法)인 ‘위태하고 은미하고 정밀하고 한결같다.’는 뜻을 인하여 이 두 글자에 허령을 아울러 말하여, 인심(人心)의 체(體)와 용(用)의 묘리를 밝힌 것입니다. 읽는 자는 마땅히 자기 마음의 지각하는 곳에 나아가서 올바른 뜻을 완미하고 체득하여야 비로소 진실하게 알아서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멀리 조수(鳥獸)의 지각을 끌어다가 올바른 뜻을 어지럽게 하고 의심해서는 안 될 곳에 의심을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일반인들의 지각이 성현과 다른 것은 곧 기(氣)에 구애되고 욕심에 어두워서 자연히 본성을 잃은 것이니, 또 어찌 이것을 근거로 사람의 마음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고 의심하겠습니까. 보내온 편지에 “지각은 아마 이렇게 해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보통 사람에서 새와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각이 있으니, 이들이 어찌 그 소당연(所當然)을 알고 소이연(所以然)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중용(中庸)》
요씨(饒氏)가, “보이는 것과 나타난 것이 모두 도(道)이다.”라고 한 데 대해, 보내온 편지에서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나 세미(細微)한 일에는 사(邪)도 있고 정(正)도 있는 것인데, 어찌 다 이것이 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주자와 여러 사람의 설을 보건대 모두 선악의 기미(幾微)로 말하였으니, 요씨의 설은 과연 온당하지 못합니다. 대체로 자사(子思)와 주자의 뜻은 본래 도가 없는 데가 없고 은미(隱微)한 것이 드러나는 것은 가릴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은 도를 보존하기 위해서이지 드러나는 것이 도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요씨가 “《대학》에서는 ‘계구(戒懼)’를 말하지 않았다.”고 한 데 대해 보내온 편지에서 운운하였는데, 이 대목을 의심한 것은 바로 정일집중(精一執中)에 정(靜)할 때의 공부가 없다고 한 설(說)과 같은 문제입니다. 대체로 《대학》에서는 본래 계구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자도 정심장(正心章)의 주(注)에서 ‘찰(察)’ 자만을 들어서 본문의 바른 뜻을 곧바로 해설하였을 뿐입니다. 다만 ‘시불견(視不見)’의 주에서 비로소 ‘존(存)’ 자와 ‘경(敬)’ 자를 끌어내어 말하고, 또한 세주(細注)를 통해 무심(無心)의 병통을 말했으므로, 이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여 ‘계구’의 공(功)이 은연중에 말하지 않은 가운데 들어 있을 뿐입니다. 운봉 호씨(雲峯胡氏)의 전념후사(前念後事)에 대한 설도 그 뜻은 이와 같으니, 모두 정심장에서 ‘계구’를 설명하였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내온 편지에서 바로 정심장을 ‘계구’에 해당시킨 것은 잘못입니다. 보내온 편지에 말하기를, “계구의 공이 없으면 어떻게 명덕(明德)을 밝힐 수 있는가.” 하였는데, 이 말은 맞습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옛사람이 본원을 함양하는 데 대해서는 《소학》에서 이미 극진히 다루었으므로, 《대학》에서는 바로 격물(格物)ㆍ치지(致知)로 선무(先務)를 삼았다.” 하고, 또 후세에 그렇게 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경(敬)’ 자로 《소학》의 부족한 공부를 보완하였으니, 이제 다만 이에 의거하여 공부를 하면 됩니다. 물론 《대학》에서 계구를 말하지 않은 것은 알고 있지만 ‘고시(顧諟)’라 하고 ‘경지(敬止)’라 한 것이 있으니 그 속에 저절로 계구의 뜻을 겸하였고, ‘정(定)’이라 하고 ‘정(靜)’이라 한 것은 지지(知止)의 공효이지만 정(靜)할 때의 공부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데, 어찌 말하지 아니한 바를 억지로 이미 말한 것처럼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치중(致中)이라는 것은 곧 하늘이 명한 성[天命之性]이다.” 하였는데, 진씨의 설은 곧 치중의 중은 하늘이 명한 성이고 치화(致和)의 화는 본성을 따르는 도[率性之道]라고 하는 것과 같은데, 이제 다만 운운했을 뿐이니 말이 선명하지 못합니다. 보내온 설이 옳습니다.
진씨가 또 말하기를, “중(中)의 큰 근본은 하늘이 명한 성에 근원한다.” 하였는데, 보내온 편지에서, “중의 큰 근본은 바로 하늘이 명한 성인데 만약 근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큰 근본 위에 또 성이 있는 것이 된다.” 하였습니다. 진씨의 설은 동중서(董仲舒)가 말한 “도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다.”는 뜻과 같으니, 중의 큰 근본이란 사람의 가진 바로써 말한 것이고, 하늘이 명한 성이란 하늘이 부여한 바로써 말한 것이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보내온 편지에 말하기를, “요씨(饒氏)가 첫 장을, 성정(性情)을 함양하는 요체라 한 것에는 ‘성찰(省察)’이라는 글자가 빠진 것 같다.” 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찍이 여러 학자들의 설을 보니, 존양(存養)과 성찰을 대치하여 말할 때에는 동(動)과 정(靜)을 나누어 두 가지의 일로 다루었고, 함양만을 말할 때는 동과 정을 겸하여 말한 데가 많았습니다. 요씨의 이 설은 빠진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첫 장의 《혹문(或問)》에서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중화(中和)와 위육(位育)은 성인(聖人)이나 신인(神人)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교(敎)를 통하여 그 경지에 들어간 자는 과연 중화의 공(功)을 극진히 할 수 있다.……” 한 데 대해 보내온 편지에서 운운하였는데, 어찌 중화를 극진히 하고도 오히려 위육의 공을 다하지 못함이 있겠습니까. 다만 위육의 경지에 가까워지는 것은 현인(賢人)의 공부이니, 비록 “공을 이루게 되면 마찬가지”라고 하였지만 신통한 변화와 묘한 공용을 논하는 데 이르게 되면 공자의 편안하게 해 주면 이에 따라오고 고무시키면 이에 화하게 되는 경지를 어찌 안자(顔子)나 증자(曾子)가 선뜻 미칠 수 있겠습니까.
제2장에 요씨(饒氏)가 운운한 데 대해 보내온 편지에서 “중화(中和)와 중용(中庸)은 안과 밖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운운하였습니다. 중화와 중용을 이(理)로써 말한다면 진실로 두 가지 일이 아니지만 나아가 말하는 처지에서 논한다면 어찌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제 유씨(游氏)의 설로 본다면, 성정(性情)이라는 면에서 말하면 중화라고 하였으니, 이미 성정이라고 말했다면 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덕행(德行)이라는 면에서 말하면 중용이라고 하였으니, 이미 덕행이라고 말하여 성정과 상대(相對)되게 하였다면 어찌 밖이라고 말할 수 없겠습니까. 덕(德)이란 도(道)를 행하여 얻음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미 안과 밖을 겸하여 이름하는 것이며, 행(行)이란 오로지 날마다 볼 수 있는 자취를 말하는 것이니, 어찌 밖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요씨는 유씨의 설에 근본을 두고 미루어 부연하여 말한 것이니, 거기에 옳지 않은 곳이 있음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그대가 말한 대로 한다면, 자기의 뜻에 맞는 것은 좋아하고 맞지 않는 것은 싫어하는 병통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어, 마침내 자사(子思)의 본의(本意)가 모든 곳에서 정미하고 적확하게 말해진 것을 참으로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첫 장에는 중용이라는 글자를 쓸 수가 없고, 2장 이후에는 중화라는 글자를 쓸 수가 없습니다.
제4장에서 요씨(饒氏)가 “행(行)은 사람이 가서 도를 행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한 데 대해 보내온 편지에서 “도가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것과 밝아지고 밝아지지 않는 것은 다 사람에게 말미암은 것이다.”고 운운하였습니다. 진실로 사람이 도를 행하지 않기 때문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이고, 사람이 도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도가 밝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행해지지 않는다고 한 것은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지 사람이 행하지 않음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밝아지지 않는다고 한 것은 도가 밝아지지 않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지 사람이 밝히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요씨의 설은 정밀하고 타당하여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10장에서 요씨가, 네 번 나오는 ‘강재(强哉)’라는 말에 차례가 있다고 한 것은 억지로 끌어다 붙인 병폐가 있으니, 보내온 말이 옳습니다.
제12장에 대하여 보내온 편지에서 “요씨가, ‘도는 떠날 수 없다.[道不可離]’는 것을 어느 때나 그렇지 않음이 없다고 하고, ‘비은(費隱)’을 어떤 사물에도 있지 않음이 없다 하였다.”고 운운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도는 떠날 수 없다.’는 대목에 대해 이미 어떤 사물에도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겸하여 말하였는데, 요씨가 이렇게 나누어 설명한 것은 너무 지나치게 세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안을 곧게 하고 밖을 바르게 한다.[直內方外]’에 대해 구분한 것은 그의 설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사(子思)가 원래 한 말에 꼭 그런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니, 이것은 췌언입니다. 보내온 말이 간명하고 타당합니다.
운봉 호씨(雲峯胡氏)가 말하기를 “비(費)는 본성을 따르는 도[率性之道]를 말한 것이고, 은(隱)은 하늘이 명한 성[天命之性]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만약 단순히 이 두 구절만 가지고 말한다면 또한 군말 같습니다. 다만 운봉의 이 대목은 전편(全篇)에 말하고 있는 도(道)라는 글자는 모두 본성을 따르는 도로부터 말한 것이라는 점을 부연하여 설명하였으므로 그 설이 이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주자(朱子)가 《혹문》에서 성(誠)을 통론(通論)한 곳에서도 곧바로 하늘이 명한 성으로부터 말을 시작한 것과 똑같은 것이니, 아마 해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제13장에서 원씨(袁氏)가 “내가 남을 다스린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고, 또 “남을 심하게 꾸짖는 것은 하늘의 법칙에 위배된다.” 하고는, 아울러 ‘도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違道不遠]’는 것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모두 본문의 뜻과 상응하지 않습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잘못이라고 한 것은 타당합니다.
요씨(饒氏)의 “도(道)는 천리(天理)이고, 충서(忠恕)는 사람의 일이다.”라는 설을 전에도 늘 의심했습니다. 이제 보내온 편지에서 이 설을 그르다고 하면서 주자(朱子)의 “인(仁)은 도(道)이고 충서는 배우는 자가 공부를 쌓는 곳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는데, 이 뜻이 매우 훌륭합니다.
제16장에서 주자(朱子)의 “귀신(鬼神)이란 다만 기(氣)의 굴신(屈伸)이다.”라는 대목은 후씨(侯氏)의 설(說)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없는데도 《혹문》에서 깊이 후씨의 설을 배척한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시 자세히 주자가, 문인들이 귀신의 덕(德)을 물은 데 답한 것을 상고하여 보니, “이것은 귀신의 실제로 그러한 이치[實然之理]를 말한 것이다. 마치 사람의 덕을 말하는 데 있어서 사람은 사람대로 따로 한 물체가 되고 그 덕은 덕대로 따로 덕이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후씨가 귀신은 형이하(形而下)이고 귀신의 덕은 형이상(形而上)이라고 한 것은 마치 중용의 덕을 말할 때 중용은 형이하이고 중용의 덕은 형이상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쌍봉(雙峯)도 “덕이란 귀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로써 본다면 주자는 다만 형이하인 귀신의 성정(性情)과 공효(功效)의 실제 그러한 곳을 가리켜서 덕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귀신의 이(理)이며 성(誠)입니다. 그런데 후씨는 귀신을 형이하의 한 물건으로 보고 그 갖춘 바의 이치를 가리켜 형이상의 한 물건으로 보았으니, 이는 귀신과 덕을 판연히 두 가지 것으로 인식하여 본 것입니다. 주자가 그르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자의 “그 덕은 천명(天命)의 실제적인 이치이다.”라는 등의 말은 그 말하는 과정에서 헤아림이 부족한 듯하니, 아마 기록하는 이가 본뜻을 잃은 것일 것입니다.
제26장에서, 요씨(饒氏)가 말하기를, “사람의 정성에는 지극한 것과 지극하지 않은 것이 있다. 성인(聖人)은 정성이 지극하므로 지성(至誠)이라고 말할 수 있고, 하늘과 땅에는 지극함과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 데 대해 보내온 편지에, “성인과 천지는 다 같이 지성이니, 만약 지극함과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면, 불가(佛家)의 성인도 없고 범인도 없다는 설에 가까울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소견으로는 요씨의 설도 일리가 있어, 불가의 설이 공(空)과 무(無)에 돌아간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논어》 일관장(一貫章)의 주(注)에, “천지의 지성은 쉼이 없다.”라는 말이 있고, 지성이라는 글자를 주자는 하늘과 땅에 대해서도 말하였는데, 요씨가 ‘유구(悠久)’라는 것을 외면(外面)을 가리킨 것으로 본 것은 대체로 그의 소견이 이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의 내외(內外)를 겸하였다는 설이 보편적입니다.
《심경(心經)》
왕노재(王魯齋)의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에 “정(正) 자와 사(私) 자는 모두 밖에 나타난 것이다.” 하였는데, 그의 생각은 이 두 ‘심(心)’이란 글자가 모두 이발(已發)한 것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밖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이 구절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아래에 이어서 “그러므로 인심(人心)은 인욕(人欲)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대체로 이 도설에는 설명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벗들과 함께 감정(勘定)하여 꼭 보아야 할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성정심의(性情心意)
“성(性)이 발(發)하여 정(情)이 되고, 심(心)이 발하여 의(意)가 된다.”고 한 그대의 설은 물론 옳습니다. 대체로 이렇게 명칭과 이치를 분속(分屬)시키는 문제는 의리를 강구해 밝혀서 매우 정밀한 곳에 이르렀을 때 각각 그 뜻의 실마리가 서로 유사한 것과 맥락의 유래를 미루어 따져서 ‘무엇은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은 무엇에 속해야 한다.’고 해야 합니다. 만약 한 번 여기에 속하면 단연코 다른 것과는 서로 간섭하거나 작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보 앞에서 꿈 이야기를 하는 격입니다.
[주1] 진서산(眞西山) : 송대의 성리학자 진덕수(眞德秀)로, 호가 서산이며, 저서에 《대학연의(大學衍義)》가 있다.
[주2] 물재 정씨(勿齋程氏) : 송대의 성리학자 정약용(程若庸)이다.
[주3] 성인들이 …… 한결같다 : 요(堯)ㆍ순(舜)ㆍ우(禹)가 전한 심법인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해야 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한 것을 말한다.
[주4] 진씨(陳氏) : 원나라 성리학자 진력(陳擽)을 말한다.
[주5] 공자의 …… 경지 : 《논어》 〈자장(子張)〉에 나오는 대목이다.
[주6] 원씨(袁氏) : 송대의 유학자 원보(袁甫)를 말한다.
[주7] 후씨(侯氏) : 송대의 성리학자 후중량(侯仲良)으로, 주돈이(周敦頤)와 정이(程頤)의 제자이다.
[주8] 왕노재(王魯齋) : 송나라의 학자 왕백(王柏)이다.
答李叔獻問目
中庸讀法註
眞西山說。與朱子意微有不同。然朱子本謂篤恭之極。其妙如此。可見無聲無臭之妙由篤恭而然也。然則西山亦謂因篤恭而有此妙耳。豈由篤恭而力行。漸進至彼之謂哉。西山之學。不如是之疎。勿以辭害意。可也。饒氏說云云。大學。是敎人之法。故言爲學當如是如是。中庸。傳道之書。故言此道如此如此。二書主意本不同。故言各有攸當。饒氏說不差。今來喩謂以學與道歧而二之。爲未安。正是公自看得有差也。曾見朱先生答呂子約書能與所能之說乎。其分道與行學與義理之蘊不同處。至爲精密。看此則知自看得差也。蓋學是能。道是所能。則其不可混作一說。尤曉然矣。其書見朱子大全第四十八卷二十七張。然須連其上二十五二十六張書說通看。方得其味。序注勿齋程氏云云。來諭謂此說未安。然則靜時工夫。何事耶。當初。舜說人心道心。皆就已發處言。故精一執中。皆因其發而加工之事。未說到靜時工夫。今當據本說。而講究體行。豈可强將所無。而添作剩言語。與元說合爲一工夫耶。此所謂多揷入外來義理。儳亂本文正意。最爲讀書之病。朱門深戒之。若如來說。孔子所不言底。孟子言之。孟子所不言底。程朱子言之者多矣。今何可以後出之說。每牽引附會於前所不言處。衮合作一說以求備耶。心之虛靈知覺。格菴趙氏云云。此亦來喩看得差。凡有血氣者。固皆有知覺。然鳥獸偏塞之知覺。豈同於吾人最靈之知覺乎。況此說知覺。實因傳心之法。危微精一之義。而以此二字。幷虛靈言之。發明人心體用之妙。讀者當就吾心知覺處。玩味體認。出正意思來。方見得眞實無差。豈可遠引鳥獸之知覺。以汨亂正意。而置疑於不當疑之地耶。若夫衆人知覺。所以異於聖賢者。乃氣拘欲昏而自失之。又豈當緣此而疑人心之不能識與悟耶。來喩云。知覺。恐不可如此釋。今衆人至於鳥獸。皆有知覺。此豈識其所當然。悟其所以然者耶。中庸饒氏謂見與顯皆是道。來喩謂幽暗之中。細微之事。有邪有正。烏可謂之皆是道耶。觀朱子及諸說。皆以善惡之幾言。饒說果爲未安。蓋子思,朱子意。本謂道無不在。而隱微之見顯。不可揜也。故愼其獨。所以存其道云爾。非謂見顯是道也。饒氏謂大學不言戒懼。來喩云云。此段所疑。正與精一執中無靜時工夫之說同病。蓋大學固不言戒懼矣。故朱子於正心章注。亦只擧察字。以直解本文正意。惟於視不見注。始拈出存字敬字而言之。亦因傳者說無心之病。故以此救其病。而戒懼之功。隱然在不言中耳。雲峯胡氏前念後事之說。意亦如此。皆未嘗云正心章說戒懼也。今來諭直以正心章當戒懼。非也。來喩云。無戒懼之功。何以明明德。此則然矣。故朱子說古人涵養本原。小學已至。所以大學直以格致爲先云。又患後世之不能然。則以敬字。補小學之闕功。今亦只當依此而用功。又當知大學雖不言戒懼。而有曰顧諟曰敬止。則其中自兼戒懼之意。有曰定曰靜。雖是知止之效。而靜時工夫。亦不外是。如是爲言則可矣。何可以所不言。而强以爲已言耶。陳氏云。致中卽天命之性云。陳說猶云致中之中。卽天命之性。致和之和。卽率性之道也。今只云云。語有未瑩。來說是也。陳氏又曰。中之大本。原於天命之性。來諭謂中之大本。卽天命之性。若謂之原。是大本上面又有性也。陳氏說。如董子所謂道之大原出於天之義。蓋中之大本。以人所有而言。天命之性。自天所賦而言。故可如此說。來喩謂饒氏以首章爲涵養性情之要。恐欠省察字。此則不然。嘗觀諸儒說。若言存養以對省察。則分動靜爲兩段事。若只言涵養。則兼動靜說處多矣。此說恐非欠也。首章或問。陳氏曰。中和位育。聖神之能事。由敎而入者。果能盡致中和之功云云。來喩云云。安有致中和而猶未盡位育。但庶幾乎位育者。賢人之學。雖曰及其成功一也。然至論神化妙用處。則孔子之綏來動和。豈顔曾所能遽及哉。第二章。饒氏云云。來喩謂中和中庸。不可分內外云云。中和中庸。以理言之。固非二事。然以所就而言之地頭論之。安得不異。今以游氏說觀之。以性情言之。曰中和。旣曰性情。非內乎。以德行言之。曰中庸。旣曰德行。以對性情。則寧不可謂之外乎。德以行道有得言。已是兼內外而名之。行則專以日可見之迹言。豈非外耶。 故饒氏本游氏而推衍爲說。未見其有不是處。若如來說。則未免有喜合惡離之病。而卒不得眞見子思之本意隨處立言精微的確處也。首章。用中庸字不得。二章以後。用中和亦不得。第四章。饒氏行不是說人去行道云云。來喩謂道之行不行明不明。皆由人云云。固是人不行道。故道不行。人不明道。故道不明矣。然此所謂不行。指道之不行而言。非謂人不行也。此所謂不明。指道之不明而言。非謂人不明也。饒說精當。不可非之。十章。饒氏以四强哉。爲有次第。說得有牽强之病。來說是也。十二章。來喩謂饒氏以道不可離。爲無時不然。費隱爲無物不有云云。朱子於道不可離處。已兼說無物不有。饒氏乃如此分配。太涉破碎。其直內方外之分。非不可如此說。但子思本語。未必有此意。皆是剩說。而來說。說得簡當。雲峯胡氏謂。費是說率性之道。隱是說天命之性。若單說此二句。亦似衍說。第雲峯此段。乃鋪說一篇言道字。皆自率性之道說來。故其說不得不如此。正如朱子或問通論誠處。直自天命之性說起來也。恐無害也。十三章。袁氏曰。不曰我治人云云。又曰。責人已甚。違天則矣。因竝以違道不遠爲說。皆與本文義不相應。來喩非之。當矣。饒氏道是天理。忠恕是人事之說。舊亦每疑之。今來喩非之。而引朱子仁是道。忠恕是學者下工夫處一語。以爲證。此意甚善。十六章。朱子鬼神只是氣之屈伸一條。與侯氏說不見有異。而或問。深斥侯說。殊不可曉。更細參詳。朱子答門人問鬼神之德曰。此言鬼神實然之理。猶言人之德。不可道人自爲一物。其德自爲德。侯氏謂鬼神爲形而下者。鬼神之德爲形而上者。且如中庸之爲德。不成說中庸形而下者。中庸之德爲形而上者。雙峯亦曰。所謂德。指鬼神而言。以此觀之。朱子只指形而下之鬼神性情功效之實然處。以是爲德。卽其理也。其誠也。侯氏則以鬼神爲形而下之一物。指其所具之理。以爲形而上之一物。是以。鬼神與德。判然認作二物看。朱子所以非之者。正在於此也。然則朱子謂其德則天命之實理等語。其辭意曲折之間。亦似欠商量。恐記者之失旨也。二十六章。饒氏謂人之誠有至與不至。聖人誠之至。故可說至誠。天地無至不至云云。來喩聖人天地同是至誠。若曰無至與不至。則恐近釋氏無聖無凡之說。以滉所見。饒說亦有理。非如釋氏說歸空無也。然論語一貫章注。有天地之至誠無息之語。至誠字。朱子於天地。亦言之矣。饒氏以悠久。爲指外面底。蓋其所見如此。然朱子兼內外之說。自是周徧。
心經
王魯齋人心道心圖說。謂正字私字皆見乎外者。其意謂此二心字。皆以已發爲言。故以爲見乎外耳。此句則非不可喩也。其下係之曰。故人心不可謂之人欲。此是不可喩處。大抵此圖說。多有說不出。曉不得底。故此間諸友相與勘定。以爲不必看。
性情心意
性發爲情。心發爲意。來說已得之。大抵此等名理分屬。乃講明義理。到十分精密處。各推原其義緖之所相類。脉絡之所從來。以爲某當爲某。某當屬某云爾。若以爲一屬乎此。斷不與他相涉相用。是癡人前說夢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