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은경상도의령땅오병이즉정곡면오방리이다. 고성이씨집성촌인세칭‘오병‘이에서 |
이산 저산 거리가 골프 티샷정도면 닿는 산골이다. 오지라 해도 절대 억울하지 않는 이곳에 그래도 국도가 있었다 |
그리로 진주에서 대구로 가는 시간버스가 왜정 때부터 다녔다고 한다. 포장도 되지 않은 고갯길 중심에 달이재가 있다. |
나는 여태까지 달이재의 어원이나 그 유래를 몰랐다. 한자 표기를 월현(月峴)이라 했다. 그곳에서 발원하는 |
도랑을 월현천(月峴川)이라 하고, 재 밑 바로 아래에 있는 저수지를 월현지(月峴池)라고 했는데 그 연유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
그런데 이번에 고성이씨 인터넷 자료를 준비하면서 일가 어른에게서 받은 고성이씨 최초 대동보인 계유보에서 |
그 지명의 유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달이’라는 말은 순수 우리말 고유어이고, 그 표기는 이두로 하였는데 조선 중기까지 그렇게 |
사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
1700년도 중반까지 실제 지명에 사용되었던 향찰로 기록된 신라향가가 일제 강점시대에 일본학자에 의해서 비로소 |
해독하였다고 하니 실로 아쉬움이 크다. |
이두문자는아전문자라고해서조선중기이후까지주로관아의하급관리들이상용하던것이라는데불과200년도지나지 |
않을 시기에 아무도 이해 못하는 문자로 전락한 것은 더욱 아쉽다. |
고성이씨 19세 은암공파 과의교위석구공(果毅校尉錫龜公)은 1684년 고성에서 최초의 고성이씨 대종회로 추정되는 |
기록을 남긴 분이다. 계유보에서는 공의 묘소를 표기함에 “의령현(宜寧縣) 화곡리(禾谷里) 월라(月羅) 오병동(五榜洞)” |
로 표기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
의령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양 같다. 화곡리도 익히 아는 지명이다. |
대한제국시게 군현제를 정비할 때에 화곡리와 정동리를 합쳐 지금의 의령군 정곡면을 만들었다. |
그리고 요새는 오방리(五方里)로 적고 있지만 옛 분들이 줄곧 오병이라 한 이유도 여기 있다. 의령군지에 보면 오병(五榜)이라 |
쓴 입석이 마을 입구에 있었다고 했다. 이 榜자는 활을 고치는 기구인 ‘도지개’를 뜻할 때에는 그 음이 ‘병’인 것을 보면 오병이의 |
유래도 추정이 가능하다. |
리·동제의역사도우리가인식하는것보다더깊은것을알수있다. 당시의리가지금의리4~5개를합친 |
것만큼 광대하였음도 같다. |
달이재를 가지고 보면 月羅는 분명 이두문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월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달’로 읽어야 한다. |
달이’는 理자를 추가하면 된다. 예나 지금이나 같다. 삼국유사에는 14수의 향가가 전한다. |
그 중에 교과서에 실려 있어 친숙한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에서 이 ‘달이’의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첫수가 |
“咽鳴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열명이처미 로효사은월라리)”로 되어 있다. 그냥 음독을 하면 의미를 알 수 없다. |
학자마다 다소 해석은 다르다. 대략 그 의미가 “열치매 나타난 달이” 또는 “흐느끼며 이슬 밝힌 달이”이다. 그런데 ‘달이’를 뜻하는 |
月羅理(월라리)에 대한 해석은 일치한다. ‘달이’라는 말이다. |
地를 예전에는 ‘따 지’라고 했듯이 月자 또한 ‘다 월’이다. 그러니 이두로 ‘달’자를 표기함에 받침 'ㄹ‘은 羅(벌릴 라)를 썼다. |
그리고 주격조사로 보이는 |
’이‘는 理(이치 리)로 하였는데 다른 향가에서는 里(마을 리)도 사용됨이 확인된다. ’ㄴ‘ 받침은 隱(숨을 은) |
이 쓰이는 것은 많이 보이는 현상이다. |
이 계유보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되는 것이 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의령 오방리는 우리 고성이씨 은암공파의 집성촌이다. |
기록이 화곡리 월라 오병동이라 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보자. 오방에는 3곳의 마을이 있었다. 보서의 기록 당시는 알 수 없지만 |
‘행정’과 오병‘이 그리고 ‘도딩이골‘이다. 군현을 먼저 적고 리와 동을 나타냄에 중간에 월라가 있음이다. 그러니 |
이 3곳 자연마을을 月羅라고 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면사무소가 기록하고 있는 오방리 유래를 보면 |
일명 月羅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기록이 없어 다만 추정할 따름이다. |
기록은이리도중요한것이다. 뜻있는옛선조의수고가있어뿌리를알고, 근원을바로세움은우리씨족들로하여금 |
마우금거(馬牛襟裾)를 면하게 해 주었다 |
계유보의 기록 한 줄은 그곳을 바탕으로 성장한 이들에게 아스라한 유년의 기록을 반추하게 한다. 달이재는 그곳 |
사람들에게는 이별과 기다림의 고개다 |
손으로 빛을 가리고 까치발 세워 올 사람을 위해 버스를 바라다보던 아스라한 그런 곳이다. |
남으로 도라모퉁이 차가 보일라치면 공굴 앞 백구마당에서 비로소 버스를 마중 나간다. 그리 속히 걷지 않아도 된다. |
집 마당에서 숲이 있는 건너편까지 돌팔매 두 번이면 닿는 거리니까 그렇다. 이런 곳을 예 사람은 두메라고 했다던가 |
버스는 바람이라도 조금 불라치면 첨병처럼 흙먼지를 먼저 앞세우고 온다. 횟배로 주린 사람들은 먼지도 매연도 매캐하지 않고 |
, 기름내음도 싫어하지 않았다 |
차장은 언제나 빨리 오르라 성화고, 타는 이는 맨날 익숙하지는 않다. 버스는 그렇게 매양 바람처럼 가고 만다 |
떠남이란 어떤 것이든 서러운 법이다. 차는 행정·오병이를 거쳐 도딩이골 깊은 곳을 돌아 달이재 마지막 굽이는 가기도 |
싫은 듯이 더디 갔다. 차는 갔어도 그가 일으킨 먼지가 잦아들 만치 한참에사 배웅은 끝이 난다. 고인의 어떤 싯귀처럼 |
아버지는 느낀다. 전송 갔던 사람이 돌아왔으니, 가고 만 이는 아마 그만치 더 멀리 갔음을 알더라. |
이러한 곳이 ‘달이재’다. 예성강 포구가 숱한 서도인의 송시와 이별눈물로 번성하였던 것처럼 가는 이를 보내고, 또 오는 |
사람을 기다리는 데가 그기라는 말이다. 가야하는 인연을 어이 막을 것인가? 오는 이는 온다면 올 것인데 달이재 |
굽이를자꾸처다보는기다림은오히려재촉이되고말았더라. 백구마당공굴에자꾸다른핑계대고나가보는마음이사 |
누가 무엇으로 탓하겠는가? 탓이야 기다리는 마음을 들킨 것일 뿐 허물은 아니지 않는가? |
걸음서툰아이는혼자걷지도못할자갈길은아무리애를태워도차는빨리오지못한다. 시간버스는특별한일이없으면비슷한 |
시간에 한길을 지나 갈테지만 오는 이는 매양 그렇지는 않다. 어스름 땅거미가 질 때 지나 가기로 약속된 더운 날의 막차는 |
아뿔싸 서지 않고 가버리면 올 사람은 또다시 오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