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롬 13장 11-14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둠의 세상에 그대로 남겨두신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세상에 남겨두신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로마서 12장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드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받은 은사대로 살라”
그리고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너를 박해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고 말하다가
“이제 상황이 급박해졌으니
이 상황을 무시하지 말고
정신 차리고 들으라”
고 분위기를 바꾸어서 말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지금은 ”자다가 깰 때“ 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일어나라“ 라는 말이 아니라
”벌써 되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깰 때가 벌써 되었다는 말씀은
'이제 자지말고 깨어나라'는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가느냐에 대한
물음입니다.
만약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구원의 가까움에 대해서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간다면
그는 '이 시기'를 아는 자입니다.
시기를 안다는 것은
자는 자로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시대의 위기를 아는 자임을 뜻합니다.
시대의 위기란 무엇입니까?
12절에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라고 말씀한 대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 고
또 한번 ‘때’ 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세 가지 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현재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성화하고 있으며
마지막 날 우리는 완전한 구원인
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세 시제 중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아도
용납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잘 알지 못하고
교회생활도 익숙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제 예수 믿은 지 십년이 지났으니
감정놀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변명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처음 믿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완성단계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초보단계가 아니라
이제는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을
책임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완성하는 단계에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
셋째 12절을 보십시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는 말은
새벽이 가까왔다는 말입니다.
역사의 동이 트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았는데
어둠속에서 머뭇거리며 잠만 자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전에는 변명이 통했습니다.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잘못된 예언자들의
말이었습니다.
“괜찮아 하나님이 도와주실거야 평안이야.”
여러분 새벽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기상나팔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잠잘 때는 잠옷을 입습니다.
그러나 일터에 나갈 때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갑니다.
밤이 깊었다는 말은
새벽이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제는 자다가 깰 때이다.
구원은 완성단계이다.
지금은 깊은 밤이 아니고
동이 터오는 새벽이다” 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너희들이 할 일은
‘어두움의 일의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 라고 말합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13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어두움의 일을 벗기 위해 해야 할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사회가 변화되어야 할
네 가지 영역이며
예수 믿고 세례 받고 교회에 와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여러분의 삶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네 가지 영역입니다.
첫째는 낮에와 같이 단정한 삶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밤의 삶은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무슨 옷을 입었는지
무슨 얼굴색을 하고 있는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낮에는 잘 보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한 삶이란
투명한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투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투명해야 합니다.
가리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리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말 못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라”는 것은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어두운 부분을
숨기지 말고
모두 뒤집어서 보여 주라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의 부분을 제거해야 합니다.
둘째, 방탕과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도덕적 타락의 영역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밤늦게 까지
먹고, 마시면서 술잔치 하는
무절제한 삶,
흥청망청하는 삶을
금하라는 말입니다.
셋째, 13절을 보면
음란과 호색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이미 바빌론의 음녀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되었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언론매체에
음란문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상술 언론매체가
음란과 호색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거기서 벗어나
거룩한 예수의 신부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미움과 폭력입니다.
우리 사회는 미움과 폭력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것들입니다.
정치를 봐도 경제를 봐도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마치 밤에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우리 사회는
음란과 호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화입니다.
미움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어두움의 일을 벗지 않으면
심판이 옵니다.
심판 이라는 말은
겁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제 정치라는 것이,
경제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못한 그 사람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큰 건물이나 다리가 무너지면
그 위에 있던 사람들,
그 안에 있던 사람들도
다 무너집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도 떨어집니다.
다 죽습니다.
혼자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 세 가지는
<의식주>입니다.
그런데 먹는 문제보다
입는 문제가 더 앞세우고 있습니다.
본문은 옷에 대한 이야기인데
'빛의 갑옷을 입으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하십니다.
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예수로 옷 입는다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습니다.
의사나 간호원은 흰 가운을 입습니다.
경찰은 경찰복을 입습니다.
이처럼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예수로 믿고 사는 그리스챤 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산다는 뜻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성도다."라고
어떤 상황에서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로 옷 입고,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자들이기에
겉과 속이 같아야 합니다.
사람 중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들입니다.
바울은 오늘 예수를 믿고 사는 우리를 향하여
'예수로 옷 입고 살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정직하게 바르게
성실하게 살라는 권면인 줄 믿습니다.
옷은 보호의 수단입니다.
예수로 옷 입고 산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보호자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몸에
보호수단으로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낡아지고 없어지고
내 곁을 떠날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의지하며 사는
재물도 권력도 명예도 인기도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날이 오고야 맙니다.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는
영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옷을 입는 데는 몇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외부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이러한 옷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낡아지고 떨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입혀 준 그리스도의 옷만이
우리가 입을 영원한 옷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가 만든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행위로 만들어내는 옷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누더기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우리의 온갖 죄와 더러움을 가려주시는
의의 세마포를 입는 사람이
성도요, 그리스도 신부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엔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께서 도둑같이 오시는데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서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 옷이란
자기가 만든 옷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은 옷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 옷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는데
이들이 입은 옷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이며
이것이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계시록 22장 14절에서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신부일수록
주는 옷을 감사히 여길 것입니다.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은
주는 옷보다
자기 치장의 옷을 입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는 옷을 입지 않으면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뿐입니다(마22:1-14).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습니까?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구원은 처음 믿을 때보다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 입니다.
이제는 육신적인 일을 도모하지 맙시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육신 적인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빌3:7-9).
그리고 종말의 때를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엡6:10-20).
지금까지 모든 말씀의 결론은
그리스도로 옷입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 시기가 어떠함을 알 수 있는 것도
그리스도로 옷입고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그리스도로 옷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옷입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로 옷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것 같은
엄숙한 태도로 살아가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해
놀라운 원칙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실수가 많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