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감시초소에 올라서니 감시원이 보인다. 부탁하여 인증을 하고 담소를 나눈 후 길을 떠난다.
▲마성산(馬城山409.3m): 충북 옥천군의 옥천읍 교동리와 수북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와 앙증맞은 작은 돌탑, 이정표, 3등삼각점, 이지역 출신 시인 정지용의 시‘홍춘“이 기록된 정상석이 있고 옥천읍내가 한눈에 보이는 옥천읍의 진산이다.
◆ 삼각점 안내문 ◆ 국립지리원에서는 측량 법령에 따라 우리나라 모든 측량의 기준이 되는 국가기준점인 삼각점을 설치하여 공공 및 민간분야에서 이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삼각점은 전국에 일정한 간격으로 16,000여 점이 설치되어 지도 제작, 지적측량, 건설공사, 각종 시설물의 설치 및 유지관리 등을 위한 기준점으로 이용되는 국가 중요시설물로써 국민 모두의 소중한 재산입니다. 이러한 삼각점은 누구든지 파손하거나 그 효용을 해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되며 만약 무단으로 훼손하는 경우에는 이 지역의 모든 측량을 실시할 수 없으며 관련자는 측량 법령에 따라 벌을 받게 되오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마성산의 삼각점. 보은 324번『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마성산(馬城山)은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진산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지방 사람들이 말의 조상에 제사 지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마성산이 옥천군의 진산이며, 그 지명 유래가 말(馬)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지도서』에 “마성산은 군 북쪽 2리에 있는 진산이다. (중략) 본래 지륵산으로부터 맥이 온다.”라는 기록이 있어 마성산의 맥을 밝히고 있다. 이 밖에 『해동지도』와 『1872년 지방지도』에도 당시 옥천군의 읍내면에 마성산이 표기되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마성산의 다른 명칭으로 ‘일자봉(一字峯)이 기록되어 있는데 산 모양(一)을 표현한 지명으로 보인다. 실제 옥천 구읍(舊邑)뒤의 산 능선은 북동-남서 방향의 ’一‘자 형태를 보이고 있다. 마성산 정상에 있는 3등삼각점(보은324/2003재설): 옥천군내에는 3개의 마성산(馬城山)이 있는데 옥천읍 소정리와 군서면 금산리 경계에 용암사를 품고 있는 서마성산, 지형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죽향리에 위치한 동마성산, 그리고 옥천읍의 진산이라는 이곳 교동리에 위치한 마성산이다. 산 남쪽 아래의 교동저수지 근처에는 시인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육영수 여사의 생가, 그리고 아름다운 3개 봉우리가 연이어진 등산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지만 그 명성이 남아 있는 장계국민관광지를 차례대로 연결해서 돌아볼 수 있고, 이곳에 서면 서대산과 장령산, 식장산, 환산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마성산 아래 교동저수지가 보이고 좌측의 나분티로 이어지는 도로 우측의 까만 기와집이 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이셨던 육영수 여사님의 생가이고 그 근처에 정지용 시인의 생가도 있다.
▲마성산 정상에서 바라본 옥천읍내 구읍(舊邑)의 모습: 맨 뒤쪽의 높은 산이 충남의 최고봉인 서대산이 보이고 교동저수지가 보이는 곳이 옥천읍내 구읍이다. 옥천읍은 크게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는데 옥천역과 옥천 나들목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신가지’와 오랜 옛날부터 옥천을 다스리던 중심지였던 ‘구읍’이다. 구읍은 전통적으로 옥천의 중심지였으며 따라서 구읍엔 유서 깊은 문화재가 많이 남아있다. 옥천향교와 옥주사마소라는 문화유산과 일제강점기 초등교육 시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죽향초등학교 구교사가 보존되어 있다.
▲대전의 진산인 식장산: 식장산 아래쪽으로 백제 26대의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하여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관산성은 고리산성 또는 환상성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성왕은 538년에 서울을 웅진(熊津:충남공주)에서 사비(泗沘:충남 부여)로 옮겨 안팎의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 강화에 힘써 중흥을 이루었다. 성왕은 신리 진흥왕과 함께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6군을,신라는 한강 상류지역 10군을 점령했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은 553년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554년 백제 왕자 여창이 관산성을 공격하여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관산성은 신라와 한강 하류지역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처음에는 대가야군과 연합한 백제가 우세했으나 신라군의 급습으로 성왕이 죽고 관산성 전투는 신라의 승리로 끝났다. 관산성 전투로 신라는 한강 유역에 대한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보했고 가야의 나머지 세력을 병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중국을 통해 직접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어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 이정표 며느리재 방향 헬기장으로 다시 길을 나선다.
▲대청호 오백리길로 이제부터 등산로는 아주 좋다.
▲마성산에서 내려가는 길도 상당히 가파르다. 산악오토바이가 다녔는지 길이 많이 패어 있다.
▲마성산에서 급경사를 내려오면 한동안은 완만하고 편한 길이
이어진다.
▲좌측으로 살짝 꺾어져 빽빽한 소나무 능선을 내려간다.
▲ 안부에 내려 능선으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