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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허준(許浚) 第61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스승의 부름 第4
갈 데가 없다는 것은 이번 취재를 빌어주었던 가족들에게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나약한 애비로서의 감상일 뿐이다.
"놀이터가 서강 어간이라면 떠나는 길에서 멀지 않으니 축하인사를 하고 가겠네."
"이 길로 떠나시려고요?"
"빌린 말도 돌려보내야 하고 버드네란 곳에 두고 온 병자들이 있네."
"무어라고요? 아니 그 웬수 같은 버드네란 데를 또 찾아간단 말씀이 오니까!"
상화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길 나설 준비를 하는 허준을 건너보았다.
그렇다. 그래야 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고 아니 가고는 또다른 얘기다.
자기 입으로 다시 오마 약조한 버드네의 병자들이 지금 이 시각도 일각이 여삼추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사실을 기억해낸 것이다.
그건 자신이 내의원에 붙고 아니 붙고와는 상관없는 의원으로서 병을 앓고 있는 자들에 다짐했던 어김없는 약속일 터이다.
썰렁했던 허준의 가슴속에 다시 온기가 소생했다.
도지의 초대에도 응할 것 없고 오늘 하루 자기와 도성 구경이나 하며 장차의 의논이나 하자는 상화의 위로 어린 말을 오히려 허준이 달래며 두 사람이 양화나루에 이르렀을 때 희우정 언저리에 등방한 동패들과 술추렴이라도 하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여긴 허준의 추측은 빗나갔다.
희우정 언저리에 도지의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리 없다고 고개를 갸웃대는 상화가 허준을 세워놓고 강변 어부의 집 서너 집을 뛰어다니고서야 술과 기생을 실은 도지들의 유선이 아침 나절부터 나루를 떠난 것을 알았고 이에 두 사람이 거의 반 시각이나 하류로 더듬어 내려갔을 때야 강 건너 수양버들이 숲을 이루어 휘날리는 곳에 장고소리가 왁자한 차양 친 배 한 척을 보았고 소리쳐 불러대는 상화의 목소리가 세번 네번 비껴갔건만 잇따라 장고소리만 낭자한 채 분명히 도지요 임오근으로 보이는 선객들은 돌아보는 기색이 아니었다.
상화가 발을 굴러 욕지거리까지 퍼부었으나 허준은 더 기다릴 것을 포기하고 상화에게 작별을 나누고 발길을 돌렸다.
갑자기 버드네의 병자들이 보고 싶었다.
십여 명은 잠시의 고통뿐 별탈이 없을 것이요 서너 명은 약이 꼭 필요했고 두어 사람은 그 병으로 목숨을 떨구고 말 그 얼굴들 ...
그 면면들을 떠올리며 허준은 초여름 강변길을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끌고 있던 말고삐를 잡아채어 말잔등에 뛰어올랐다.
곧 가슴이 탁 틔어왔다.
이상도 했다. 떠오르기 시작한 병자들 면면의 고통들이 들려왔고 그들에게 가까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허준은 행복했다.
사람들이 푸른 하늘을 본 지 오래 되었다.
5월의 장마가 지루했다.
남편 허준이 내의원 과장에서 생애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건 지 꼭 한 달이 지나고 있었으나 허준의 소식은 묘연했다.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한 자락의 기쁜 소식을 갈망하던 허준의 어머니는 날이 새면 하루같이 유의원댁으로 달려갔다.
도보로 간 아들에 비해 아무래도 나귀를 타고 간 유의원의 아들 쪽이 먼저 한양의 소식을 전해오리란 짐작에서였다.
그 하루같이 찾아드는 허준의 생모에게 꺽새, 영달 등 유의원댁의 제자와 마당쇠들은 짐짓 알지 못하는 얼굴인 양 튕기는 얼굴이었고 더러 되바라진 언동을 보여도 손씨는 늘 웃는 얼굴로 그 꺽새나 영달을 잡고 밤 사이 한양으로부터 무슨 소식이 없는가를 묻는 것이 일과였다.
"없소!"
하고 그나마 한마디 대답해주는 날은 기쁜 날이었고 그 대답도 없이 공연히 바쁜 척 들은 척도 돌아보지도 않는 날이 많았다. 자기의 답답함은 며느리의 애태우는 마음에 비해 참을 수 있는 것이었다.
손꼽아보던 취재의 날이 임박하면서부터 며느리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갔고 취재가 끝난 지 달포, 행여나 행여나 그리고 다시 행여나 ... 하며 날이 새면 현 북쪽 마연동산 나루의 십리길을 종종걸음쳐 달려가는 며느리의 초췌한 뒷모습을 볼 적이면 아들 허준이 취재에는 떨어져도 저 며느리의 소원만은 이루어지는 그런 앞뒤가 맞지도 않는 소원을 품다가 손씨는 갑자기 고개를 젓곤 했다.
'취재에 떨어지다니, 아니고말고.
내 아들은 돼. 겸이 애비는 붙고말고!'
처음엔 손씨도 '첫술에 배부르랴.' 하며 겸양 어린 생각을 했으나 손씨로 하여금 아들이 이번에 꼭 되리란 확신을 갖게 한 것은 오히려 주위의 떠들썩한 소문이었다.
허준 일가가 아들의 한양행을 놓고 주위의 그 소문을 안 것은 아들이 한양으로 떠난 4, 5일 후였다.
취재는 자기 일가의 사건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세상이 그렇지 않았다. 산음 사람들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넓지도 않는 지리산 기슭의 한적한 고장에 영남에 정 울리는 명의 유의태가 산다는 것이 자랑이요, 그 유의태 때문에 산음 사람은 명이 길다고 타 현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터에 그 유의태 문하에서 다시 유의태의 뒤를 이을 두 사람의 신진 기예의 의원이 나타나 나라 안 최고의 의원을 뽑는 내의원 취재에 응했다니 그 기쁨으로 잠잠하던 산음고을 안은 시끌벅적했다.
"둘이 다 될끼다!"
"그걸 말이락꼬! 하모!"
이건 한 사람은 유의태의 친아들이요 한 사람은 비록 파문은 당했으나 창녕 성대감댁에서 펼쳐보인 허준의 기적을 전해 들은 사람들의 확신이었다.
그 확신파에 속하고 싶으면서도 세상살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곤 못 겪어본 신중한 패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건 욕심이고 ... 아, 나라 안서 수천 명씩 몰리는 취재라카는데 둘 다 되면 그런 경사가 어딨겠노마는 그 기대는 과분한 기고 하나는 틀림없다."
"그 하나가 눈교?"
"누구겠노. 그래도 유의원 자식인데 도지 그 사람이제. 난 도지데이."
"파문이라캐도 솜씨가 모자라 파문이 아닌 기라.
너는 소문도 못 들었나, 허준이 틀림없이 한 수 위라카더라이까."
"그럼 니는 허준이 쪽에 걸으라모! "
"걸으라니 내기하잔 말가?"
"자신 없으면 빠지그라."
"미친놈, 내가 왜 빠질 끼고.
내 여편네를 걸으라캐도 걸 게다. 난 허준이다."
"난 도지데이."
"나도 허준이다."
"관아에 이방들캉도 온통 허준이 쪽이라카더라. 나도 술 한병 허준이 한테 건다."
"미친놈아, 상수리 사람들캉 하수리캉 동네들끼리 돼지 한 마리 걸고 붙었는데 상수리 사람들은 다 도지 한테 걸었다카더라."
"그쪽이 미더우면 그쪽에 걸으라모."
"자네들은 의리도 없나. 유의원댁 약 묵고 무탈하게 지내면서 타관서 흘러온 허준이가 뭐꼬. 모두 도지한테 걸어라!"
"이기 사람 내긴고 재주겨루긴데. 난 누가 뭐라캐도 허준잇시더! 하모요!"
그 떠들썩한 고을의 흥분과 기대를 반영하듯 하루는 현감이 이속들을 거느리고 유의태의 집에 나타나 과묵한 유의태를 잡고 고을의 경사를 스스로 한참 뽐내며 돌아가니 온 고을 안 도지와 허준의 내기에 불을 붙인 꼴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도지와 허준의 신화적인 얘기까지 만들어 살을 붙이며 이젠 한양으로부터 허준이나 도지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은 양가만의 것이 아니도록 소란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생업에 종사하다가도 거창, 산음, 진주로 뻗은 관도를 달리는 파발마의 발굽이 지나갈 적이면 저도 몰래 손을 놓고 기대에 찬 눈을 했다.
그 동안 장마에 곳곳의 강물이 불어 길이 끊겨 못 오고 있거니 여겼으나 현감이 인근 역참에 영을 띄워 주막에 갇혀 있는 두 사람의 소식을 파발마의 마군들에게 부탁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러나 아침 저녁 뛰닫는 파발마들도 두 사람의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관용, 그것도 부사나 도의 관찰사급의 인물들에 전달되는 중대 관령을 대동해 뛰닫는 역참의 마군들에게 있어, 중인이나 천것들의 과거의 하나인 내의원 취재에 누가 붙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관내 양반 자제의 문과, 무과의 급제 소식이라면 그 문중 관찰사부터가 나서서 요란하게 생색내며 선전할 호재이긴 할 것이로되.
산음 사람들이 이잰 둘 다 떨어졌다고 쉬 기대한 것을 후회하며 내기의 열이 식어간 그런 날, 한달하고 엿새가 되던 날의 새벽 드디어 산음고을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도지가 나타난 것이다.
사비로 미리 해입은 내의원 관복에 첩지를 왕지처럼 앞세우고 임오근과 상화 그 수하와 어디서 동원한 농악대를 뒤에 딸리며 마연동산 나루 너머에 나타난 것이다.
강을 건너 있던 허준의 아내가 임오근과 상화에게 함께 보이지 않는 남편의 소식을 물었으나 임오근은 대답도 않았고 상화는 상화대로 가슴이 아파서 "저녁에 가서 따로 뵙지요." 그 말 한마디만 했다.
소식이 뛰닫고 굴러 도지가 아버지의 의원에 닿기 전에 생모 오씨와 그 아내가 엎어지며 구르며 달려나왔고 금의환향한 도지의 행차가 구름같은 구경꾼들의 손뼉과 환호에 둘러싸여 집에 닿자 유의태가 나타나 그 병사의 마당에서 아들을 얼싸안았다.
"애썼다! 믿지 않았는데 애썼어."
아들의 어깨를 다시 잡아 흔드는 유의태의 감격을 보면서 구경꾼들 속에 따라온 손씨는 집으로 향했다. 허준의 노모는 울고 있었다.
.........
"무엇이 어쨌어? 이실직고하라거늘 어찌 이놈이 턱만 덜덜거리고 있느냐."
벌떡 일어선 채 다시 앉지도 못한 유의태가 소리쳤다.
"도지 불러오너라!"
"서방님은 아까 감축하러 온 현감 이하 이속들과 술이 과음하여 안채에 누워 있사옵고 ..."
"오라 하라 ...!"
핏기 가신 임오근의 말이 끝나기 도 전에 또 한번 유의태가 고함 쳤다.
임오근이 더 얼버무리지 못하고 굴러나갔다.
행려인의 행색으로 찾아와 있던 안광익과 김민세는 묵묵히 술잔을 기울일 뿐 유의태를 만류하려 들지 않았다.
병사 쪽에는 아직도 하객으로 온 인근 촌로들이 도지를 화제삼아 떠들썩했다.
도지가 한양에서 돌아온 지 아흐레째의 해질녘이었다.
"혹 잘못된 소문인지도 모르니 고정하시고 잠시 앉아서 기다리시게."
김민세가 달랬으나 또 유의태의 격노한 음성이 쌍학이 춤추는 발을 뚫고 마당으로 튀어나갔다.
"상화놈도 불러라!"
취안이 몽롱한 채 뜻 아니한 사랑채의 고함에 찾아와 기웃거리고 있던 꺽새와 영달이 걸음아 날 살려라 내뺐다.
'결국 그랬었단 말인가 ...'
아들의 출현을 기다리며 방안을 오락거리던 유의태가 뜨거운 한숨과 함께 천정을 쏘아보았다.
이럴 수가 없다 싶었다.
안광익이 들어온 소문 한마디.
근자 한양 가도에 떠들썩하게 번져난 소문.
내의원 취재에 향하던 한 인물이 충청도 진천 일대에서 가난한 병자들을 구완해 주느라 취재의 기회도 스스로 버렸는데 그 의인의 이름이 허준이란 젊은 의원이다.
예고 없이 찾아온 두 붕우가 전한 얘긴 이토록 짧은 것이었으나 그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유의태는 뇌수에 일격을 당하는 충격을 느졌다.
김민세가 세상에는 동명이인도 있을 수 있지 하고 유의태에게 말했으나 유의태의 얼굴은 모닥불을 뒤집어쓴 듯 무안했다. 마치 만인 환시중에 벌거숭이가 되어 서 있는 그 참담함이 거푸 유의태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그 아이야 ... 동명이인일 수가 없어.'
함께 떠난 것은 알고 있었고 애써 허준이의 성적을 관심두지 않았고 또 양쪽으로 나뉜 온 고을 안의 떠들썩한 호사가들의 내기라는 것도 듣고 있었으나
"한 개의 과일도 '때'가 되어야 익는 법"이라 여기며 유의태는 어느 쪽에도 기대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들 도지가 첩지를 들고 돌아온 것이다.
지금도 금상왕의 어의요 당시도 명종의 어의며 내의원 시관이던 양예수와 목벨 내기 그 구침지희 이후 출세와 영달의 길은 버렸으나 생각하면 도지가 들고 온 그 첩지는 실로 사대에 이르러 달성한 가문의 영광이었다.
일대 유술이는 명이 짧으니 절로 보내라는 늙은 중의 거짓말에 속아 찢어지도록 가난한 집안에서 입이나 하나 덜자며 중을 딸려 억지로 사문에 출가시킴으로써 유의태 집안의 의업은 시작되었다.
짧은 명이 절에 와야 장생하리라는 거짓말로 아이를 넘겨받은 운초라는 그 늙은 중은 시시때때 로 불공이 모자라면 너는 죽는다 는 위협으로 아홉살짜리 유술이를 혹사했다.
물대기, 땔감 해오기, 새벽 물긷기가 모두 불공이라는 위협에 소년 술이는 밤도 낮도 없이 중의 종살이에 바빴으나 지독한 늙은 중은 술과 계집질로 늦잠이 예사였다.
10년 적공해야 70수를 하리라는 감언에 소년 술이가 말처럼 소처럼 일하기 9년 그의 나이 18세 이르렀을 때 그 호된 노동에 그 뼈마디가 장사처럼 굵어 있었고
늙은 중 운초의 악행도 꿰뚫어보도록 어른이었다.
하여 그 술이는 어느날 그날도 득남을 빌러 절에 올라온 계집을 올라타고 씨근덕거리는 운초의 덜미를 잡아채어 절간 부엌바닥에 엎어뜨려놓고 9년 동안의 새경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이에 늙은 중이 할 수 없이 술이 에게 가르친 것이 안마술인데 특히 그 안마는 풍병에 득효하고 또 병이 있어도 함부로 의원에게 몸을 보이지 못하던 여자들에게는 성의 환희에 이르게 하는 비법의 효과가 있었다.
이에 몇 사람 산속을 출입하는 계집들에게 실험을 거처 효과를 확인한 술이는 그 길로 하산하여 의원을 자처했다.
그러나 외간남자에게 온몸을 내맡기는 그 의술은 의원이 지녀야 할 구급의 효과와는 다른 것이요 병이 어떻다 해도 제 계집 제 딸자식을 외간 사내의 손끝에 놀아나게 하는 그토록 열성적인 집안은 없었다.
자연 술이는 돈많은 늙은이의 팔다리나 주물러 겉보리 몇 되 받아드는 의원 아닌 자로 전락했고 뒤늦게 침술을 익히려 들었으나 문식이 없는 그로서는 절망이었다.
이대(유의태의 생부) 유흥삼은 전답 한뼘 남기지 않은 아비 밑에서 그 역시 먹고 살 길은 의술이다 여기고 천자문을 온 방 벽과 천정에까지 써붙여 놓고 애써 학식을 쌓으려 했으나 역시 책을 읽고 쓰는 재주까지는 갖추지 못하고 늘그막의 아비와 함께 만들어낸 것이 유가 고약이요 그 행상으로 생업을 삼았다.
그 고약은 특별했다.
지리산 1천5백92군데 골짜기와 비탈을 춘하추동 부자가 헤매며 남들이 좋다 하는 약은 모조리 캐어내어 한솥에 끓여대는 그 방법이었다.
애비도 자식도 의서를 읽고 해석하는 힘이 없으니 그저 좋다는 약초는 무엇이고 캐어 한데 버무려서는 열흘이고 보름이고 고아댔다.
이 고약 제조에는 한 가지 일화가 따른다.
흥삼이 어느 해 가을 산에서 산삼 다섯 뿌리와 오사 두 마리를 잡았다. 어느 쪽도 금쪽과도 맞바꿀 수 있는 일생일대의 횡재였다.
달려온 술이가 아들 홍삼에게 자신의 몸보신용으로 그 산삼 한 뿌리 먹기를 청했다.
그러나 흥삼은 우리 집안이 오직 좋은 고약 만드는 그 업으로 먹고 사는데 좋은 약재를 구했다면 의당 약재로 써야지 식구가 따로 먹을 수 없다며 달려드는 아비를 밀쳐내고 산삼도 오사도 끓고 있는 고약솥에 집어넣고 휘저어버렸다.
탄식하는 아비와 제 고집을 피운 아들 간의 언쟁이 소문으로 퍼져 유가고약은 양심의 상표로 알려져, 이후 유가고약은 산삼 섞인 약이라며 화농에만 붙이는 약이 아니요 입으로도 삼키는 영약으로 불티나듯 팔려 나갔다.
흥삼은 돈을 모았다. 그러나 그 돈의 출처가 지리산 약초를 캐어다 번 것이라 여긴 흥삼은 지리산 골짜기 곳곳에 채약꾼들을 위한 산막을 짓고 산신령의 단을 지었으며 자신이 행상해 다니는 고장에도 흉년이 들 때면 번 돈을 아낌없이 던지는 덕행을 일삼았다.
그 흥삼이에게서 태어난 것이 삼대 유의태였다.
권력이 불러도 가지 않는 사내, 부자가 청을 넣어도 심병의 순차를 바꿔주지 않는 고집 -
그리고 큰 병 작은 병에도 따로 값을 매기지 않고 병사 바깥기둥 에 소쿠리를 내매달아놓은 채 혹여 병자의 가족들이 침값이나 약값을 물을라 치면
"가진 대로 넣어놓고 가든가 어쩌든가 하게." 하기 일쑤요
"병은 급하고 지닌 것은 없어 그냥 병자만 업고 달려 왔습니다."
할라치면 "알았네." 할 뿐 언제 갚겠느냐." "집이 어디냐?
"약값이 얼마요 시술값이 얼마노라." 한 적이 없는 사내.
또 심병 후 죽을 사람은 못 고친다 미리 끊고 그밖의 병은 백발백중 낫우는 유의태고 보니 산음 사람들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유의태의 아들 사대인 도지가 타처에 비해 의료값이 너무 싸다고 투덜거리더란 소문이 나고 제자를 자칭하는 자들 중에 웃전을 뜯어 낸다는 비난도 들렸으나 그 대상은 타관서 찾아든 사람들 에게 할 수 있는 행위지 함부로 산음 사람들에게 하는 짓거리는 못되었다.
아무튼 그 유가고약의 4대 도지가 내의원에 붙은 것이다.
어제까지 허준에게 내기의 승부를 걸었던 사람들은 이제야 그건 도지의 당연한 승리로 여겼다.
"한 개의 과일도 때가 되어야 익는다."고 본 유의태도 조부가 의업을 일으킨 이래의 이 경사에 아들을 얼싸 안고 환희했었다.
20년 전 과장의 부정을 따진 끝에 의술의 상수가 누구인가 따지고 마침내 양예수를 자기의 버선코 앞에 내꿇린 그 교만 뒤에 숨은 한..
스스로 조선 제일의 의원이 되고자 했던 야심을 아들이 이루어 온 것이다. 그 내의원 등장은 뭔가?
종실과 지존의 환후를 전담할 어의의 길이 아닌가.
궁벽진 산간의 현감에게도 허리를 못 펴고 사는 그들에게 대궐은 아득히 하늘처럼 높은 곳이요, 그곳의 임금은 함부로 입에도 못 올려보는 이 나라 억조창생의 주인이다.
'20년 전 이미 내 생애에서 출세나 영달을 버렸다 했거늘 이제 와서 내 무슨 망발이었던고!'
아들 도지를 기다리는 유의태는 스스로 자신에 침을 뱉으며 발을 굴렀다. 그 심정을 헤아렸는지 안광익도 김민세도 침묵으로 위로의 말을 대신 하고 있었다.
발 밖으로 소세를 마친 듯한 도지의 모습이 임오근과 나타났고 때아닌 벼락 같은 호통이 궁금하여 부인 오씨도 며느리도 뒤쫓아오고 있었다.
유의태가 그 아들을 쏘아본 채 자리에 풀썩 앉았다.
죄지은 바 없는 상화도 영달이에게 멱살을 꺼들린 채 끌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오!"
오씨가 먼저 물었고 이미 불려오는 사연을 임오근에게 귀띔받은 듯 들어서는 도지의 눈에 유의태의 첫마디가 터졌다.
"허준이의 행적을 낱낱이 밝히거라!"
"그자의 행적을 왜오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맞받는 도지의 대꾸가 오히려 당당했다.
계속 ~~
著者 : 放送作家 故 李恩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