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70년대
― 유신 홍보와 선친의 타계 ―
정치・사회적 변혁기인 1970년대, 내가 응답할 수 있는 것은 유신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 참여 독려 홍보와 삶의 기둥이자 후원자였던 선친의 타계다.
1970년대 초 대학을 졸업하고 탄광촌의 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학교 운동장 앞으로 난 큰길에 석탄 운반 트럭이 자주 들락거렸다. 한 번씩 지날 때면 시꺼먼 분진이 운동장을 넘어 교사까지 날아왔다.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하던 아이들이 먼지를 피해 이리저리 달음질쳤다. 학생들의 하얀 체육복이 석탄 색깔을 닮아 가고, 가방이며 운동화, 심지어 하얀 교복까지 회색빛이다. 그래도 교육 환경을 원망하는 학부모나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학부모 대부분이 그 광산에서 일했다.
교사 초년병으로 반년쯤 근무했을 때다. 정부에서 유신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선언했다. 나는 유신헌법이 나라의 발전에 얼마나 유익한지, 국민을 어떻게 행복하게 만드는지 몰랐다. 학교에서는 교사별로 관내 담당 지역을 배정하고, 주민에게 유신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 참여를 독려하라 했다.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지정된 마을을 다녀와서 이튿날 홍보 실적을 제출했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깜깜한 밤이라 한 치 앞을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기차선로 곁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지리도 모르는 마을을 물어물어 찾았다. 다행히 이장이 따뜻하게 맞이했다. 영문도 모른 채 모인 듯한 마을 주민 몇이 우두커니 쳐다봤다. 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 홍보물을 앞에 놓고는 인사를 했다. 이장이 설명은 필요 없다면서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홍보 자료나 주고 빨리 가란다. 내일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고생한다는 말과 함께…. 얼마나 고맙던지. 아직 기억 속에는 유신헌법보다 이장님의 따뜻한 배려가 더 소중하게 남았다.
유신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 참여 독려는 1970년대 초 내가 사회에 첫발을 디디며 겪은 시대의 아픔이다.
벼농사에 일반 벼보다 수확이 월등하게 많은 통일벼가 나왔다. 덕분에 선친께서는 빠듯하던 살림살이에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데 늘어난 소출만큼 일이 많았다. 그때는 논에다 베 놓은 벼를 집으로 가져와 탈곡했다. 가을이면 마당에는 벼 낟가리가 높다랗게 쌓였다. 타작하는 날은 발탈곡기가 ‘와릉와릉’ 소리를 내며 새벽부터 돌아갔다. 낟가리에서 볏단을 내려 다시 몇 모둠으로 나누어 뾰족한 고리 형태(역 V자 모양)의 급치(扱齒)를 나선형으로 달아 놓은 급동(扱胴)이 돌아갈 때 벼 이삭부터 갖다 대면 낟알이 하나하나 떨어지면서 흩어졌다. 통일벼는 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가을이면 논바닥에 베 놓은 벼를 집으로 운반하는 일이 몹시 힘들었다. 경지 정리가 되지 않은 들판의 논둑길이 미로처럼 이어졌다. 벼를 운반할 때는 지게로 직접 져 나르거나 소 등에 길마를 얹고 걸채를 덧얹어 그 위에 볏단을 실어 왔다. 그날도 선친께서 벼를 집으로 들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이 이웃집에 비해 영농 규모가 좀 컸다. 선친께서는 농사철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밭에 살다시피 했다. 가을이면 논에서 집으로 운반할 벼가 많아, 리어카의 손잡이를 고쳐 소가 끌 수 있도록 만든 수레를 이용했다. 달구지에 비해 크기는 작으나 가벼워 사용하기가 편리하다. 선친께서 벼를 가득 실은 수레를 끄는 소를 몰았다. 그때 뒤에서 버스가 다가와 경적을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에 소가 놀라 뛰는 바람에 길가로 넘어져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운명하셨다. 선친이 생각날 때마다 그때 내가 고향 집에 가서 집안일을 도와주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있다.
일요일인 그날 내가 친구들과 가을 놀이를 하지 않고 고향 집에 가 집안일을 도왔다면 비극의 순간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최악의 상황이라도 선친의 임종만은 했을 것이다. 살아오는 동안 나를 억누르고 있는 가장 큰 아픔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 근무하기 시작한 그해 가을이다. 힘들게 농사지어 마련한 돈으로 대학을 졸업시킨 아들이 선생이 되었다고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응답하라 1970년대. 참 많은 생각이 난다. 정치적인 큰 변화는 유신헌법 제정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 공업단지의 조성과 자동차 사업의 발전. 사회적으로는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데모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국민의 가슴에는 새마을 사업과 경제 개발로 잘살아 보겠다는 의욕과 희망이 넘쳤다.
그때의 정치・사회적인 평가를 내 개인의 가치 판단으로 하기는 어렵다. 아직은 평가 자체가 이르다. 역사적인 평가는 좀 더 멀고 큰 시간과 공간에서 그때 정치나 사회적으로 관련된 이들이 죽은 후 정리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만, 1970년대의 변혁기를 소시민으로 숨 가쁘게 살아온 내가 명확하게 답할 길이 없어 답답할 뿐이다.♡ (2016) (《수필과 비평》 174호, 테마수필/‘응답하라 1970년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