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의 귀농지원사(史) 에피소드 2 -
도시민유치 지원사업을 따내기까지...
2011년에 기술센터에 농촌체험계(뒤에 농촌체험분야 -> 농촌체험팀으로 변신)가 신설되면서 임민택 계장님이 계의 관리자로 오셨다. 바로 아래 실무자는 지금의 유준재 팀장님. 임계장님은 오랫동안 기획운영과의 교육과 조직을 담당하셨는데 모처럼만의 타과 나들이라 한다.
유팀장님은 생활개선계에서 체험쪽 일도 해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체험을 맡았고 신설된 귀농은 임계장님이 담당하셨다. 홍성이 중앙보다 앞서나간 것은 농촌진흥청에 귀농귀촌종합지원센터가 세워지기 전에 구축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임계장님이 기술센터내에서 오랫동안 조직 구성과 관리에 관한 일을 담당해오신 ‘조직의 귀재’ 이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귀농지원연구회의 태동 역시 마찬가지 과정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행정에서 관심을 갖기 전에 홍성의 귀농귀촌 지원활동은 1997년에 민간 차원에서 시작되었는데, 홍성 귀농 1호인 이기영 형님(홍동면 원천리)이 지정리 주형로 선생님댁에 안착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전국귀농운동본부 생태귀농학교 1기 출신이었던 이기영 형님이 강사로 출강했던 주형로 선생님께 부탁하여 내려온 것이 귀농이란 말이 사회적 화두로 자리매김한 후의 첫 홍성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기영 형님은 자신의 농사를 지으면서 처음 입주 안내를 받았던 홍동면 금평리 상하중 마을의 빈 집(대밭집)과 농토 정보를 당시 본부 부본부장직을 맡았던 장길섭 선생님께 알렸고, 다시 그 소식은 생태귀농학교 교육생에게 광고로 뿌려졌다. 그리고 그 광고의 수혜자가 바로 나다. 이기영 형님은 그 뒤 홍동초등학교 학교앞으로 삶터를 옮겼고, 한동안 형님댁은 동네 빨래터나 우물가와 같이 귀농 선후배들이 오가다 자연스레 모여드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보다 상세한 사항은 졸저 '도시인 홍성의 농부로 살다'중 ‘홍동장곡 귀농 20년사’참조)일종의 초기 귀농귀촌지원센터 역할과 장소를 이기영 형님이 하신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형님의 뒤를 따른 것 같다. 나만의 계기가 따로 있긴 했지만 형님을 본받아 후배들을 안내하게 되었고, 정농회 홍성지회 총무 등 형님이 먼저 경험했던 직책을 이어받기도 했다. 아무튼 구약 성경의 연대기처럼 기왕에 형성된 커뮤니티로 홍동, 장곡, 광천에 찾아오는 후배들을 안내할 수 있었고, 홍동-장곡 귀농인 모임을 기반으로 2011년에 역사적인 홍성귀농지원연구회가 태동될 수 있었다.
후배들로부터 가끔 받는 질문이 “왜 하필 연구회입니까?”라는 물음이다. 답은 “그 당시 행정의 지원을 최소한이나마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답할 수 밖에 없겠다. 이 새로운 모임 태동을 위해 기술센터내에서 별도의 예산 확보가 어려워 당시 센터가 육성하는 단체중의 하나인 품목별 연구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나 개인적으로도 합당한 이름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아직은 별다른 수익 사업이 없고 회비로만 운영하기에는 어려움이 크기 때문에 선진지 견학이나 유명 강사 초빙 교육, 수련회 등의 비용을 센터에 의지하는 한 이름의 변경은 어렵다고 본다. 연구회라는 이름이 붙어야 센터에서도 지원할 근거가 생기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군에 귀농인 지원조례가 있는 만큼 안정적인 군비 확보가 관건이나, 한 단체의 군비 확보는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예산이 줄어야 하는 제로섬의 법칙상 단기간내에 이루어질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본다.
사설이 길어졌지만 홍성군에서 본격적으로 관내의 귀농귀촌인과 홍성으로 오려는 예비자에게 예산을 쏟아붓기 시작한 것은 지난번에도 밝혔듯이 농림부 공모사업인 ‘도시민 유치 지원사업’을 홍성으로 끌어오면서부터다. 이 사업 역시 임민택 계장님의 작품인 바, 기초 사업계획을 세워 충남연구원(舊 충남발전연구원)과 당시 막 홍성군 특채 공무원으로 활동한 전영미 박사님의 자문을 거쳤고 나도 귀농인 입장에서 검토하여 미력하나마 도움을 드렸다.
특히 프리젠테이션 당일에 임계장님, 전영미 박사님과 PT 현장에 동행하여 결과적으로 환상의 공조(^^)를 심사위원들에게 보여줬을 것으로 추측한다. ㅋㅋㅋ 그날의 상황을 부연하면 이렇다. PT 현장으로 가는 차안에서 내가 계장님께 여쭸다. “계장님, PT에서는 정교한 사업계획서보다 더 중요한 것이 현장에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인데 혹시 준비를 하셨습니까?” 임계장님은 내 귀로 직접 센터 후배로부터 '따르고 싶은 선배'로 불리울만큼 생활 자체가 성실의 표상같은 분이지만, 나처럼 모사꾼(schemer ; 좋게 말하면 기획) 기질은 없으셔서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해야 하기에 드렸던 질문이었다.
그뒤 내가 계속 이런 말씀을 드렸다. “계장님 이리 해보시지요. 그간 홍성에서는 행정이 귀농귀촌인에게 지원한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해왔으니 이렇게 호소하시면 어떨까요? 요지는 ‘우리는 민간에 빚을 졌습니다. 이번 기회에 (사업을 따내어) 민간에 빚을 갚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기타 자세한 부연은 생략) 과연 그럴듯 하지 않은가! 거짓을 말한 것도 아니요 실제로 그러했으니….
그런데 발표 현장에서 계장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 나는 조바심에 중간에 치고나가 "아까 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계장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번에 잘 돼서 민간에 빚을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 고요. 이어서 전영미 박사님도 거드셨다. 나중에 알고보니 PT 현장에 행정(공무원)과 민간이 동행한 곳은 우리 뿐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한 심사위원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 내용은 “홍성이 1등 했다. 현장에서도 민간과 행정의 협치가 돋보였다”는 메시지였다. 당시 계장님의 발표 자료에는 내가 귀농 교육시마다 갖고 다니는 ‘경축 농부탄생’ 문건도 들어있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유준재 팀장님께 전화했더니 ‘좋기는 한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일이 많아져 약간 걱정이었던 것 같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민간이 좋으면 행정의 일선은 그만큼 바쁘고 어려워진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아직 도시민유치 지원사업 2기 사업이 진행중이다. 그나마 홍성은 이 사업이 있어서 충분치는 않지만 여러 다양한 혜택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군보다 큰 혜택을 주는 곳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이 더 많다.
한 4~5년 가까이 행정과 더불어 일을 해보니 우리 홍성의 귀농 지원 좌표가 대략은 가늠이 된다. 귀농귀촌인의 요구는 절박한 반면 지원할 수 있는 볼륨 자체는 크리 크지 않은 것이 지금 홍성군의 귀농지원팀이 안고 있는 숙제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전국 어디나 똑 같다. 이 문제를 앞으로 큰 잡음없이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행정과 민간이 머리 맞대고 하나하나 풀어가야할 텐데 쉽지 않은 과제라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