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년 12월, 존 파이퍼가 톰 라이트에 대한 복음주의/개혁주의 진영의 의구심을 담아 책 한 권을 출간했다. 「칭의 논쟁: 칭의
교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부흥과개혁사 역간, 원제는 「칭의 교리의 미래: 톰 라이트에 대한 응답」)라는 제목이 붙은
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 톰 라이트는 2009년 4월에 출간한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에클레시아북스 역간, 원제는
「칭의: 하나님의 계획과 바울의 비전」)를 통해 파이퍼와 자신을 비판하는 다른 비판자들에게 답변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해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두 권의 책이 출간된 뒤, 복음주의/개혁주의자들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존 파이퍼는 톰
라이트를 거의 이단에 가깝게 평가하면서 칭의에 대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이에 대해 톰 라이트는 존 파이퍼가
여전히 전통에 갇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회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다며 냉소적으로 답변한다. 존 파이퍼의 주장이 옳다면,
복음주의자들이 톰 라이트의 글을 읽고서 칭의에 대한 다른 복음의 위험성을 파악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톰 라이트의 성경 주해와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고 여기는 이가 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현재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선 톰 라이트의 주장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의 문제 제기와 표현 방식을 좀 더
저자의 의도에 합당하게 해석하면서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이 필요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존 파이퍼가 톰
라이트를 평가하면서 라이트의 문제의식과 논리 전개를 지나치게 자신의 신학적 입장의 틀로 접근해 톰 라이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복음주의/개혁주의 구원론의 스캔들
티머시 곰비스는 지난
7월호에 실린 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울”에서 개인주의적이고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선호하는 현대 복음주의의 문제점을 최근의
바울 연구 성과에 기초해 교정하고자 했다. 즉, 복음주의가 현 시대의 필요에 따라 해석한 바울이 아니라 1세기 바울의 모습을
되살려 개인주의와 리더십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로잡으려 했다. 스캇 맥나이트는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 예수님과 바울의
사상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 사상을 ‘칭의’가 아니라 ‘복음’이라는 주제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한 바 있다(이
글은 추후 게재 예정이다).
이런 일련의 시도들은 모두 복음적 신앙이 개인 내면의 문제로 축소된 것에 우려를
표명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칭의 교리를 복음의 전부인 것처럼 이해해 좁은 의미에서의 개인의 구원, 곧 칭의의 문제에만
매달리는 복음주의의 현 상황에 대한 우려인 것이다. 이런 형태의 구원론에는 교회나 하나님 나라가 있을 자리가 없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어떤 곳에 불과하다. 도대체 이런 기형적인 구원관은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좁은 의미의 칭의 중심 구원론이
복음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현대 복음주의 문제의 출발점을 많은 이들은 종교개혁자 루터와 그의 후예인 루터파에게서 찾는 듯하다.
내면의 고뇌와 번민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를 해결한 루터, 그 루터와 그의 후계자들이야말로 율법과 심판의 하나님을 넘어
개인적인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는 칭의가 곧 구원이라고 주장한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루터(파)적인 칭의
중심의 바울 해석이 오늘날의 문제를 낳았다고 본다. 여기에 루터파와 개혁파/개혁주의를 역사적, 신학적으로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현대 복음주의의 개인주의와 내면화된 칭의 중심의 신앙에 대한 혐의를 루터파와 개혁주의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바울
연구가인 스티븐 웨스터홀름은 바울신학의 새 관점을 개관하는 자신의 책 제목을 「바울에 대한 옛 관점과 새 관점: “루터파의”
바울과 그 비판자들」이라 붙였다).
위에 언급한 내용은 북미의 복음주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구원은 칭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구원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표현되는, 소위 내세 중심의 천국행
티켓을 소유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울뿐만 아니라 예수님조차도 오늘날의 필요에 따라 왜곡
해석되는 경우도 많다. 상황이 이러하니 바울이 말했던 칭의, 바울이 말했던 구원, 바울이 바라보았던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학자들이 판단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 밖에도 예수님 당대의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등장하게 된 데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학문적인 노력(특히 유대인들의 노력)이 그 밑에 깔려 있기도
하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구 사회는 언제나 아우슈비츠에 대한 부채 의식을 지고 학문적 작업을 진행하면서 반유대주의의 등장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신학의 새 관점(들)에 있어서 1세기 유대교 해석의 문제는 바울 서신 해석의 문제를 넘어
훨씬 큰 맥락에서 다양한 이슈들을 제기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톰 라이트,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뒤집다?
이
제 톰 라이트에게로 돌아가보자. 톰 라이트의 책을 보면 라이트 또한 앞서 언급한 현대 복음주의/개혁주의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원래 바울이 의도했던 바를 되살리려 하고 있다. 라이트에 따르면,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당대의
유대인들이 그러하듯 언약적 사고를 했던 사람이다. 바울과 그가 쓴 편지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아브라함의 언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단일한 구원 계획을 보여주고 있다. 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언약적 맥락에서 칭의란 법정에서 피고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선언적 행위다. 이미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 안에 머물러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1세기 유대교는 행위 의를 강조하는 율법주(legalism) 종교가 아니라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6세기 맥락에서 바울이 말하는 칭의를 새롭게 설명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이해가 바울의 칭의와는 독립된 개념을 갖게 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 특히 루터파 때문이라고 본다(초기에 그는
루터파의 주장과 개혁주의의 주장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에 이르면 이를 좀 더 명확히 구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칭의론」(CLC 역간)에 있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한다.
“칭
의 교리는 그 성경적인 기원과 아주 동떨어진 의미를 발달시키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수립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이다. 교회는 칭의라는 교리 안에 하나님과 사람의 화해에 관한 논의를 포함시켰고, 그 결과 칭의 개념은 신약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는 강조점을 가지게 되었다. ‘칭의 교리’는 교리 신학 안에서 바울 서신과는 아주 독립적인 의미를 품게 된 것이다.”
존 파이퍼의 책과 톰 라이트의 책을 보면, 이 외에도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다룸에 있어서 (존 파이퍼가 정의하는) 종교개혁적 정의와 톰 라이트의 이해가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톰 라이트 vs. 복음주의/개혁주의?
상
황이 이렇다 보니 칭의에 대해 종교개혁적 이해를 유지해온 복음주의/개혁주의 진영에서 톰 라이트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이 주창하고 우리가 소중히 간직해온 ‘칭의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라이트에게서 의의 전가를 찾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라이트가 마치 이전에 다른 이들이 완전히 오해해온 바울의 칭의를
자신이 처음으로 바로잡았다는 뉘앙스로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대화’할 것이 아니라 ‘적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분에 찬 복음주의/개혁주의 진영의 존 파이퍼가 공개적으로 칭의에 대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적의 정체’를 밝히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존 파이퍼의 책으로 인해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파이퍼의 글을 보면 라이트의 주장이 나오게 된 복음주의/개혁주의의 배경을 염두에 두지 못한 것으로 보이고, 라이트의 주장을
라이트의 논리를 따라 살피는 데 상당히 아쉬움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파이퍼의 책은 라이트와 대화하는 책이라기보다 자신의
종교개혁적 입장에 동의하는 이들에게 라이트의 정체를 폭로하는 책이 돼버렸다. 물론 이것이 파이퍼가 책을 낸 주된 의도라고 봐야
한다. 이런 상황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든다. 파이퍼의 신학적 동지라고 생각했던 이들 중 라이트에게 공감하는 이들은 졸지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에게 동조하는 이가 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남는 문제는 존 파이퍼가 톰 라이트와 대화하면서 학문적 공정성을 견지하는지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지나치게 전투적으로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더 깊은 대화가 필요한 때
이런 가운데 2010년 4월 미국 시카고의 휘튼칼리지에서 톰 라이트와 복음주의 진영의 학자들 간에 신학적 대화의 장이 마련되었고, 이
대화는 「예수, 바울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N. T. 라이트와의 신학적 대화」(Jesus, Paul and the People
of God: A Theological Dialogue with N. T. Wright)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캐빈 밴후저는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라이트와 라이트를 비판하는 이들이 서로 상대방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 명백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해하지도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와중에 반목하고 있다는 점과 라이트를 비판하는 개혁주의 진영의
비판가들이 불편을 느끼는 것은 라이트가 긍정하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가 부정하는 내용 때문이라는 점이다(각각 위의 책,
245쪽과 246쪽). 밴후저의 지적처럼, 파이퍼가 라이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라이트 또한
개혁주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금은 최종 판결을 내릴 시점이 아니라 도리어 대화를 시작할 때다.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톰 라이트의 주장과 견해가 완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는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에 대해 총 다섯 권 내지 여섯 권으로 된 시리즈를 기획했으며, 바울을 다루는 자신의 대표작을 계속해서 준비해왔다. 많은
이들이 라이트의 주저가 될, 바울을 다룬 그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책의 출간은 지연되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다른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톰 라이트가 자신의 견해를 학계에 내놓으면서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이트는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개혁주의가 라이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인정하면서 라이트가 오해하고 있는 개혁주의의 신학에 대해 적극적으로 표명/해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톰
라이트의 사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현대 성경신학자 중 (조직)신학의 필요성과 해석학에 깊은 이해를 가진 대표적인
학자이기 때문이다. 더 깊은 대화를 통해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톰 라이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