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와 증산도(甑山道) (1)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고 있는 증산계 교단은 대순진리회이다. 대순진리회는 산하 교당이 3,000여 개, 교직자가 5만 명이 넘고, 신도의 숫자는 자칭 600만 명이나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부설기관을 가지고 있다. 대학으로는 유일하게 강북지역에서 신설된 대진대학을 비롯한 5개가 넘는 고등학교, 장학재단이 있고, 또한 분당 제생병원을 비롯한 대규모 의료재단, 연구소 및 출판소 등을 갖추고 있어 한국의 큰 종교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순진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태극도(太極道)를 알아야 한다. 태극도(太極道)는 호가 정산(鼎山)이고 본명이 조철제(趙哲濟)라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태극도의 교주인 조철제(趙哲濟)는 증산의 직접 제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현재의 증산계 교단에서는 조철제가 증산의 법통을 계승할 그만한 어떠한 조건도 갖추지 못한 ‘이단아’라고 비난한다. 그는 1895년 12월 4일에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는데, 15세 때인 1909년 4월 28일 부친을 따라 만주 봉천으로 갔다가 증산계 교단인 보천교의 교인을 만나 증산사상을 처음으로 접하고 입교를 했다. 1917경 귀국 후 안면도에 정착을 하여 30여 명의 신도들과 신앙공동체를 만들며 생활했다. 조철제는 이 공동체를 발판삼아 1921년 무극도(無極道)라는 이름으로 종교 활동을 개시하였고, 1925년에는 교명(敎名)을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로 바꾸었다. 교세 확장에 힘쓴 결과 예전에 차경석을 ‘차천자’라고 한 것처럼 ‘조천자(趙天子)’로 불릴 정도의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교단 역시 1936년의 일제의 ‘유사종교 해산령’ 때문에 해산되었다. 해방 후 다시 교단을 재건하여 1948년 부산 보수동에 근거지를 두고 교명을 태극도(太極道)라 개칭하였으며 1955년에는 부산시 서구 감천동 현 본부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감천동 일대는 신도 2,000여 세대가 집단적으로 생활을 하는 일종의 신앙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1958년 창도주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가 사망하자 교단은 증산 교파처럼 신·구파로 나뉘어 세력다툼을 벌였다. 신파는 조철제의 아들을 교주로 해야 한다고 한 반면, 구파는 조철제의 유언이라며 조철제의 수제자인 박한경(朴漢慶)을 교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 법정문제로까지 비화되는 등 10년 이상 갈등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러던 중 1968년 박한경이 용단을 내어 그곳을 나와 서울 중곡동에 터를 잡았다. 이들은 처음에는 태극도의 이름으로 전교를 하다가 1972년 드디어 교명을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로 바꾸고 태극도와는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대순진리회는 증산뿐만 아니라 조철제 역시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태극도에서 갈라져 나왔으므로 그렇겠지만, 특이한 것은 석가모니도 그들의 숭배대상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증산이 선천시대의 성인 가운데 석가모니를 가장 높이 평가했고 또 자신이 금산사의 미륵불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왔다는 그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대순진리회 도장의 영대(靈臺: 대순진리회에서 신단을 모신 건물)의 신단의 구조를 보면 왼쪽에 석가모니를, 가운데 증산 강일순을 그리고 오른편에 조철제의 초상화를 위치시켜 놓았다. 그러나 1996년 박한경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자 교단은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두 세력으로 분열이 되었고 그들의 신단체계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한다. 분열은 1999년 박한경의 처남으로 대순진리회의 종무원장이었던 경석규 측의 사람들이 여주본부 도장을 급습하여 폭력으로 점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은 양위상제론(兩位上帝論)을 주장하여 증산과 조철제만이 상제라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고, 여주본부도장 원장으로서 방심한 사이에 도장에서 쫓겨난 이유종 측의 사람들은 ‘석가모니의 후신이 진묵대사이고 진묵대사의 후신이 박한경이므로 박한경이 상제가 되어야 한다’는 삼위상제론(三位上帝論)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시 무력을 동원하여 중곡동 본부 도장을 점거했다. 현재 대순진리회는 여주본부 도장 점거파와 중곡동본부 도장 점거파로 나뉘어서 존재하고 있다. 향후에 어찌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