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나타난 바람의 양태樣態
-이재익 시선집 『회동호 물안개 피어오르면』-
이재익
2023.3.10 간행 이재익 시선집 『해동호 물안개 피어오르면』
우선 시선집을 자축하며, 자전적인 시 한 편을 제시한다.
들이 멀찍이 나앉고 / 옆산 뒷산이 바짝 다가선 / 고향 옛집엔 대문이 없었다 //
제비, 참새, 박꽃도 / 초가 한 지붕에 보금자리를 틀고 / 물동이에 버들잎도 담겨오고 / 뻐꾸기 소리 반딧불이 드나들며 / 교교한 달빛이 창호에 놀러 오고 / 문풍지가 매서운 바람을 데려와 놀았다 //
아버지의 영혼이 빠져나간 집에서 / 나는 운명만을 짊어지고 / 대문 없는 집을 쉬 빠져나와 / 대문 없는 마음으로 살았다 //
고난과 희망, 갈등과 사랑이 무시로 드나들고 / 마침내 침잠해진 마음에 詩와 적요寂寥가 들어와 / 그 작은 대문 없는 집인 양 / 편안히 터전을 잡는다 // <대문이 없는 집> 전문
바람 하면 문풍지가 매서운 바람을 데려와 놀던 고향 초가집이 생각난다. 어릴 적 산에 땔나무를 하러 갔다가 심하게 부는 산바람 탓에 바람을 많이 타는 지게 나뭇짐을 처박힌 채 버려두고 내려와 다음날 바람 잘 때 가서 수습해 왔던 기억이다. 평생에 가장 강렬했던 바람은 1959년 9월 17일 사라호 태풍이었다. 그날 새벽에 이웃 마을 큰집에 차례 지내러 가는 도중에 만난 태풍으로 날려갈 뻔했던 기억이다.
시어詩語로서 바람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 구절 중 ‘스물 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는 구절이다.
이제 마침내 침잠해진 마음에 詩와 적요寂寥가 들어 온 나의 시 창작에서 그 바람을 중요한 주제로 받아들이며,그 바람의 양태를 통하여 시 내면적 한 단면을 엿보기로 한다.
1. 꽃을 사랑하는 풍류의 바람
@ 바람은 부드러운 입김이 되어 매화 가지를 흔든다.
‘임의 부드러운 입김인가 /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 매화 꽃가지만 흔들린다 / ’<봄이 오는 소리> 中에서
@ 바람은 비바람이 되어 봄비가 되어 잠든 매화를 깨우기도 한다.
‘매화를 깨우는 봄비 내려 / 비는 매화 되고 매화는 또 비가 되네 / 꽃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과 / 꽃잎 적시는 빗방울이 만나는 순간에 / 나는 너, 너는 또 내가 되고’<매화를 깨우는 봄비> 中에서
@ 산수유 꽃나무를 지나간 바람은 산새와 함께 되돌아온다.
‘구름과 물은 탄식하며 흘러가고 / 꽃가지 흔들고 지나간 산새와 바람은 되돌아온다’ <산수유꽃> 中에서
@ 바람은 떨어진 꽃잎마저 꾀어 멀리 데려가기도 한다.
‘작별 인사도 잊은 채 / 꽃잎은 허랑虛浪한 바람 따라나선다’ <함께 가는 길> 中에서
@ 4월 꽃바람은 꽃에 취하여 넘어지기도 한다. 꽃과 잎에 멍이 들기도 한다. 바람은 절뚝거리며 지나간다.
‘바람은, 돌부리가 아니라 / 꽃에 취하여 넘어진다’ / 꽃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 스스로 알록달록한 꽃이 되고 / 새소리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 자신도 쉼 없이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을/ 그제야 침잠沈潛해진 바람은 /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재 너머로 / 절면서 조용히 나아간다’ <4월 꽃바람> 中에서
2. 인정의 바람
@ 바람은 내 그림자와 고독과 함께 한 조가 되어 외로운 나를 위로하러 따라다니기도 한다.
‘가을바람으로 숲은 타올랐다 / 바람은 더 보람된 일을 찾아서 / 외로운 내게로 찾아왔다 / 내가 외출할 때 가을바람은 / 내 그림자, 고독과 함께 나를 따라다녔다
가을바람 덕택에 나는 잠시 평온했다 / 텅 빈 집으로 되돌아왔을 때 / 그 셋은 나보다 먼저 방안에 와있어 / 반갑고도 성가셨다.’ <가을바람> 中에서
@ 신심 깊은 바람이 슬픔도 잊게 한다.
‘삭막한 겨울 고갯마루 우뚝한 노송의 풍상風霜,/ 풍진 세상사 묻힌 기도祈禱 같은 저 바람 소리는 / 찐득한 슬픔을 거풍擧風시킨다’<동자꽃> 中에서
3. 지혜로운 바람
@ 바람은 대숲에서 한 가르침을 하는 사회자가 되기도 한다.
‘겨울 대숲 바라보면 / 초승달 차가운 별빛 머리에 이고 / 눈덩이에 휘어져도 세한고절歲寒高絶이다 / 성긴 대숲에선 바람이 토론회의 사회봉을 쥔다 ’<대나무 숲에서 > 中에서
@ 바람은 절간을 애써 찾아간다.
‘뜨거운 바람을 식혀주는 연밭이 일주문을 서고 / 당탑堂塔은 엄정 질박質朴한데 / 무엇 진중珍重한 게 그리 많다고 / 입구를 지키는 석장승 한 쌍 눈이 튀어나왔나’ <실상사 하일夏日> 中에서
@ 바람은 인내할 줄도 안다.
‘풀인 듯 꽃인 듯 / 저 순박한 꽃 속에 / 무엇을 감추고 무슨 욕심 있으랴,/ 바람보다 질기게 잊고 산다네 ’<원추리꽃> 中에서
@ 바람은 시름을 잊게 해준다
‘고불은 표주박 나무에 걸고 / 스치는 바람소리로 시름 잊고 / 소리 핑계하고 그마저 잊어 / 허유의 조장操狀은 / 어둠속 한 줄기 빛이었다’ <상쾌한 반전2> 中에서
4. 바람은 맑고 청량하다
@ 바람은 맑은 이슬과 더불어 맑은 바람이 되어 원추리꽃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산에 오르니 샛노란 원추리가 고독을 떨치고 / 그대가 날 반겨주며 말하듯 하네 / ‘맑은 이슬과 청풍은 임을 위해 쐤다’고...
<맨드라미같이> 中에서
@ 청량한 바람이 마음을 고요히 침잠沈潛 시킨다.
‘밤은 정적에 씻겨 맑은 고요 생겨나고 / 별빛에 숙성하여 여명黎明이 오듯이 / 나는 한줄기 청량한 바람에 씻겨 / 그대에게 침잠沈潛 하리니 / 그대는 꽃향기에 숙성하여 내게 오라’// <제5계절 마음밭> 中에서
5. 바람의 여러 가지 양태
@ 바람은 시련과 고난을 상징한다
‘눈물은 바람 때문에, / 웃음은 그대 덕분에, / 눈빛은 나의 마음이다 //
산춘란 맑고 향기롭게 / 도요새 무리로 날아 / 아, 서럽고 바람찬 날들, /
우렁찬 건배사乾杯辭로 다 날려 버리자!’// <축 배> 中에서
@ 바람은 세월을 싣고 지나간다.
‘들국화 속절없이 바람에 흔들리니 / 어리석음은 강물같이 흘러가고 /
소중한 사념은 파도처럼 부서졌다’<들국화 언덕에서> 中에서
@ 그리움을 싣고 사라지는 바람
‘싸리꽃 정서를 누가 읊는가 / 고향 어머니 생각 하염없더니 / 바람결에 스치는 음성 흔들리며 사라지네 ’<싸리꽃> 中에서
@ 바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오늘 하루도 인생도 황혼黃昏, / 자취는 물결을 스치는 바람 같은 것 / 사랑도 우정도 묻혀가고 쉼표 같은 어둠은 / 또 새로운 생성生成의 역동성逆動性’ <바람의 언덕 황혼> 中에서
@ 바람은 제집을 찾아가는 귀속성이 있다.
‘올라갔던 산 내려오듯이 / 바람,구름도 제집을 찾아 흘러가나요 / 함박웃음으로 입도 둥글어,/ 마음마저 둥글어져 돌아가네 ’<하산> 中에서
@ 바람은 힘이 세다
‘아직 바람 찬 날 / 가벼운 봄바람이 무거운 잔설을 녹일 제, / 향기로운 가르침이 피어나네 ’<명자꽃> 中에서
@ 바람은 주장하고 절규한다.
‘추위 속에 피어나는 / 그 암호를 풀 수 있다면 / 바람이 외치는 소리도 들을 것’ <애기동백꽃 필 무렵> 中에서
6. 끝맺으며
나에게 바람은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년 시부터 엄청난 힘의 폭력을 체험케 했다. 그러나 이제 바람의 흔적이 나의 시 속에 많이도 스며들어 순화되었음에 스스로 놀란다.
치자나 장미와 같이 향기 짙은 꽃조차도 뿌리도 없는 바람에 하염없이 지는 모습을 보고 비애라기보다 담담해질 수 있게 되었다.
옛 漢詩 구절에 ‘禮樂은 周公을 가두었고, 詩書는 孔子를 묶었다네’(唐詩 王績, ‘정처사에게’). 그 구절처럼 나도 바람과 더불어 詩文에 스스로 갇혀서 무엇 한번 반짝거리기를 희망하며, 최소한 행복한 만년晩年이 되고자 한다. 이제는 정신 세계와 심미적 고요 속에 담백한 철학이 깃든 차 한 잔 여유와 함께 인생의 경륜이 묻어나는 시문학을 지향하고자 한다. ●
수록된 시 목차
93편
[제1부 ; 사랑의 언덕길 ]
마가렛꽃
함께 가는 길
들국화 언덕에서
회동호 물안개 피어오르면
오봉산 연가
젊은 날의 사진
바람의 언덕 황혼
맨드라미같이
배롱나무
밤나무의 추억
싸리꽃
가을 보라색 꽃바다
어느 등산길 아포리즘
바위 소나무
남해 금산
한계령
각시붓꽃
이슬편지
다알리아꽃
꽃과 꿈
제5계절 마음밭
우정을 위하여
[제2부 ; 소망의 마음밭 ]
새해 첫날
새 길을 간다
마음의 길
새벽길
축배
강 건너 남촌에서
살구나무 두메의 가을
대문이 없는 집
갇힘의 역설
꿈꾸는 비
철새의 비상
허공에 쓰는 글
맨드라미와 시인
상쾌한 반전 2
냇가의 작은 모래알
산에서 바다에서
하산
저녁노을
산사의 국화
[ 제3부 ; 눈부신 자연 ]
봄이 오는 소리
사월 꽃바람
매화를 깨우는 봄비
산수유꽃
원추리꽃
명자꽃
줄장미
연꽃
동자꽃
투구꽃에 마음 붙여
투구꽃 재회
애기동백꽃 필 무렵
꽃집 트럭
7월의 창가에서
비들기와 참새
가을 바람
가을 연못
나목의 꿈
대나무 숲에서
바위 소나무
호숫가에서
몽돌과 바다
뽕나무가 돌아오다
[제4부 ; 향토의 오솔길 ]
월정사에서
봉정암 진달래
산사에 봄꽃이 피고 지고
남원 실상사 하일
가을 필봉산에서
감은사지 소망
불일폭포
영암 월출산
월출산 2
월출산 산성대 동이 튼다
주왕산 만추
사량도
성인봉에 오르며
통영 미륵산
오색 남설악
신지끼 인어상
한라산의 봄
산굼부리
한라산 윗세오름
[제 5부 ; 역사의 향기 ]
정령송
영월 입석
팔달산에 오르며
정조의 효성
소수서원 당간지주
봄날 배산에 오르다
동천석실 그 꽃
독도의 사명
송하보월도
세한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