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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감정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것들
안녕하세요? 오늘 가져온 책은 아마도 많이는 들어보시지 못하셨을 작가의 제목인,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입니다! 제가 써야할 책들이 차고 넘치지만 굳이 굳이 이 책을 가져와서 쓰는 이유는 이 책이 다루는 내용들이 정말로 논쟁적이기 때문입니다. 출간된 일도 21세기 이후이기 때문에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들이고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기에 읽어보시고 한번 생각해보시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다루고 있는 것들도 문학에 대해서, 동물권리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감각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만큼 주제가 조금은 더 세련되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거 같네요. 이번에 이 책을 읽고나서 다른 사람들은 알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흔히 말해서 제 3세계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문학이 있잖아요? 그런 쪽에서의 지식이 아직은 부족한거 같네요. 아프리카에서도 요즘은 잘쓴 글이 왕왕 등장하고 있는데, 관심 가지고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쿳시는 남아공에서 태어나 수학하고 결국에는 노벨상까지 받은 만큼, 충분히 관심 가져볼만 한 것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책을 제가 알게된 계기는 또다른 책에서 였습니다. 그 책에서 어떤 책이 나와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저는 어떤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그 책에 관련된게 등장해서도 아닙니다. 먼 옛날,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제가 처음 읽은 이후 모비딕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멜빌이 쓴 다른 책들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필경사 바틀비라는 이질적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제목을 지닌 책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저는 그 책을 찾기 시작했죠. 문제는 제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서점에서 얘를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아니 그냥 그거 인터넷에서 사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선호한 저는 온라인으로 산다는 걸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고, 문뜩 세계문학 코너를 돌고 있다가 창비라는 출판사를 발견했고, 거기에 필경사 바틀비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사버렸죠. 물론 원래 목적이었던 필경사 바틀비는 금전 이슈로 사지는 않았지만... 뭐 아무렴 어떻습니까.
줄거리
제임스 조이스의 책 <율리시스>에서 등장하는 인물인 리오폴드 불룸의 아내인 몰리의 입장으로 구성해낸 새로운 율리시스라고 불리는 책인 <에클리 스트리트의 집> 집필한 작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있습니다. 그녀는 그 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그 명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자신에게 유명세를 가져다준 책을 집필한 이후에도 그녀는 꾸준히 집필 활동을 이어나갔지만,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몰리의 율리시스입니다. 이제는 노년의 작가가 된 그녀는 그 명성에 걸맞게 세계 각국의, 여러 장소에서 강연 초청을 받습니다. 그녀는 강연을 통해서 인종차별과 문학, 인간과 동물의 권리, 악과 에로스의 문제, 신념, 인문학의 본질 등 수많은 민감한 주제들을 건들고 그곳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펼쳐나갑니다. 그녀의 아들이 평가한 듯이, 그녀의 말은 논리적에서 멀찍이 거리를 두고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엉성한 주장을 듣다보면 마음 깊숙한 구석 일부분이 찌르는 듯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코스텔로가 행하는 강연은 빈번히 청중에게서 큰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원래 그녀에게 주어진 주제를 벗어나기도 하며 시간도 벗어나기도 하고, 꽤나 뜬끔없이 등장하고 연결되는 주제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하는 주장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에게서 꽤나 멀어져 있기에, 청중은 그녀에게 반발하거나 반박, 비판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많은 여성으로서,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마져 힘든 노인은 기나긴 작가 생활에서 나오는 중압감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그녀는 말하고, 그 결과를 감내해 나갑니다.
강연과 문학, 픽션과 논픽션 그리고 팩션
글의 경계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요? 누군가가 흘려쓰는 듯이 썼던 글의 편람이, 문장들이, 심지어는 글귀라는 것마저도 모이고 모여 출판되는 하나의 책으로서 만들어지는 것이 현재 출판 업계의 상황입니다. 상황도 상황이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등장으로 사실 글은 이게 글이야?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문학이 지향하고 있는 방향성은 일반적은 문학의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이전부터 많이 보여왔습니다. 당장 돈 키호테만 하더라도 세르반테스는 자신은 이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듣고 받아쓴 이야기에 불과하다며 문학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였으며, 드라큘라는 자신이 작성한 수기와 편지와 신문 등의 매체들을 활용함으로서 이야기를 묘사했고, 호메로스의 고대 그리스 이야기들은 애초부터 사실성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문학은 픽션에서 출발해 논픽션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이 두가지가 혼재되어 있는 팩션의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탈문학성이 최근에 와서 주목을 받게된 이유는 다른 것도 아닌 문학 그 자체에 대한 회의로 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이런 흐름을 직선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이 책의 구조적인 모습도 그러하고 담긴 내용조차도 그것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줄거리에서도 나왔지만, 명성이 있는 소설가이며, 여러 곳으로 강연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녀가 강연을 한다는 것, 흔히 우리가 비문학에서 강연 내용을 적어서 그것을 모은 기록물들이 출판되는 것처럼, 강연이라는 요소는 우리에게 이것이 문학인가 라는 의문점을 남겨주게 됩니다. 또한 후기에 등장하는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보내는 레이디 챈도스, 엘리자베스의 편지 같은 경우에는 이름만 공유할뿐 우리의 이야기의 등장인물로서 엘리자베스와는 다른 인물을 그리고 있습니다.이런 특성 때문에 작품 중간에 나오는 문학에 대한 생각들은 과연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생각인가 또는 작가의 생각인가하는 애매모호한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모든 책에는 작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런 모호함이 더 부각되는 이유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말을 말하고 있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코스텔로가 이야기한 내용들은 수많은 반발을 낳습니다. 그녀의 주장은 일관성을 보이고는 있지만 그것을 뒷바침해줄 근거나 이유가 너무나도 빈약하게 등장합니다. 그녀는 논쟁 중에도 감상적인 영역으로 넘어가 그것을 그저 밀어붙이기만 하기도 하는 등. 이에 비해 그녀의 대적자들은 너무나도 정교하고 정연합니다. 대학 교수의 반박이라던가 같은 작가의 반박이라던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어 있는 쪽이 논리정연할 텐데, 뭔가 반대로 되어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이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녀가 지니고 있는 문학에 대한 의견조차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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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소설은 일차적으로 영국인이 영국인을 위해서 써요. 그래서 영국 소설인 거죠, 러시아 소설은 러시아인이 러시아인을 위해 써요. 그런데 아프리카 소설은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인을 위해 쓰지 않아요. 아프리카 소설가는 아프리카에 대해서, 아프키카적 경험에 대해서 쓸지 몰라도, 내가 볼 때는 글을 쓰는 내내 자기들 책을 읽어줄 외국인을 어깨 넘어로 힐끔거리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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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학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문학을 국지적인 위치로서 파악한다면, 우리는 국가의 문학인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용문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영국 문학, 러시아 문학, 아프리카 문학 등 국가라는 요소를 활용해서 문학을 구분하는 것을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문학이라는 것에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x의 국가의 문학'이라는 것의 정의를 위해서 의도성을 활용합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좋은 문학이라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을 위해 쓰인 것 입니다. 그녀가 비판하는 아프리카 소설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에서 시도되는 자국민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문학으로 소비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비단 그녀에게서만 나온 문제 제기는 아닙니다. 빼어난 포르투갈의 시인인 페르난두 페소아도 그의 조국의 문학에 대해서 동일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편은 어떤 포르투갈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포르투갈에 관한 최악의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포르투갈인들조차 포르투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점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이 표현은, 이런 식의 말들이 대게 그런 것 이상으로 참인 것도, 거짓인 것도 아니지만, 그 창시자들이 감각주의라고 부르는 포르투갈의 흥미로운 문학 운동에는 유난히도 잘 들어맞는다.", "포르투갈 현대문학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게 나타날 때 '딴 골목으로 피해버리는' 게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의미에서 포르투갈 문학은 문학이라고 하기도 힘들고, 거의 절대로 포르투갈적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것은 프로방스적이고, 이탈리아적이고, 스페인적이고, 프랑스적이고, 가끔은 영국적이기도 하다." 그들의 문학은 누구의 문학인가요?
이 문제는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사안입니다. 코스텔로가 아프리카 문학에 가한 비판의 함축적인 의미는, 써내려가고 있는 아프리카 문학은 아프리카 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출판되어 읽히는 국가와 그것을 읽을 사람들의 나라, 즉 타국을 겨냥하고 쓰는 행태에 관한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마치 A국가에 속해있는 사람에 A국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A국가의 시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 작가는 국민을 위해서가 아닌, 한림원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비판에도 유효합니다. 코스텔로의 입장에서 상업소설, 흔히 말해서 팔기 위해 쓴 소설은 오히려 그 나라 국민을 이해하고 그들을 겨냥하고 있기에 오히려 국가적인 것입니다. 그녀는 문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그것을 보느냐는 파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요, 아프리카인들은 그냥 조용히 앉아 작은 기계에서 돌아가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 만족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건 너무 우상숭배 같을 거예요. 아프리카인들한테는 살아있는 목소리가 필요해요." 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아프리카는 그 자신의 문화 자체로 문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에 작금의 상황에서 집필되는 아프리카 문학들은 전부 타국의 국민을 위해 쓰이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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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녀는 횔덜린이 신들에 대해 하는 이야기가 미덥지 않다. 그녀 생각에 그는 너무 순진하고, 너무 쉽게 사물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역사의 간계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사물이 보이는 대로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그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우리에게서 신들의 상실을 애통해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렇게 느끼도록 우리의 마음을 휘젖고 있는 것은 신들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신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그럴 형편도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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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정신은 문학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비단 이 인용문에서의 신이라는 어떤 개념적인 존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질에까지 펼쳐집니다. 과거에는 이런 문학적 정신성들이 활개하고 다녔으며,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는데 그리 많은 수고를 덜지 않았습니다. 신화와 관련된 것들, 호메로스의 책들, 종교와 관련된 것들, 수많은 교부들과 밀턴, 단테, 보카치오를 찾을 수 있습니다. 최근 문학의 방향성은 그런 주제들에 대한 모호함일 것입니다. 말 그대로 주어진 정신의 은폐성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흐름이 계속되기에 코스텔로가 지적한 문제점, 문학에서의 국민성도 흐릿하게 사라져 보입니다. 그럼에도 횔덜린이 말했던, 신들이 물러서가고 있다는 것에 반대해 그녀는 오히려 그들 영향력의 강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유물론에 반대해 그녀는 정신성의 영향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강화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무수한 영향력들의 발산 속에서 그녀가 말한 국민성의 욕구는 더더욱 커져 갑니다. 모든 정신은 국가와 무관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어떠한 국가도 종교적인, 신화적인, 죽음과 감정과 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소속된 국민으로서 정신의 등장은 그 나라의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국가의 국민에게서 쓰인 책이 아니라면 그것이 우리의 국가를 대변하거나 표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국의 문학을 우선시해서 생각하는 경향성도 여기에서 기인하는것 같아 보입니다.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 그것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의 연속성을 바라는 일입니다. 진정으로 문학이라는 문화의 한 분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쓰여야 하고 미래 지향적이어야합니다. 물론 그것은 타자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을, 또는 국민을 향해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코스텔로는 말합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소설은 궁극적으로는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학으로 시작한 이 책은, 문학으로 끝나며, 다루고 있는 모든 주제들은 문학이라는 거대한 물줄기에 휩쓸려 문학이 지니는 영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학에서의 윤리와 문학에서의 악과 문학에서의 아유화. 내가 된다는 것. 문학과는 무관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흘러 지나가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문학에 대해서 말합니다.
윤리와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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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한테는 우리한테보다 삶이 덜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살려고 몸부림치는 동물을 자기 두 손으로 감싸 안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 몸부림에 그 동물은 존재 전부를 남김없이 투입해요. 그 몸부림에 지적이거나 상상적인 공포의 차원은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지적인 공포를 느끼는 건 동물의 존재 양식이 아니죠. 동물의 전존재는 살아 있는 몸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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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또다른 강연장에 가서 교수와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녀는 여전히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합니다. 문학에서 현재 문학이 지니고 있는 비-국민성에 대해 지적한 것과 같이, 그녀가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인간이 과연 동물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존재인가를 꼬집어 물어보며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요소가 옳은가 당당히 도전합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을,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x의 동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동물이라던가 이성적인 동물이라던가 등등등... 그럼에도 일반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그냥 동물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을 뿐더러 조금 더 자연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무리를 비하적인 의미로서 짐승이라고 사용하기까지 합니다. 이것마저 하나의 종적 차별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언어에서 그런 것들을 꽤나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단지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건가요?
제가 생각하는 이러한 인식의 원인은 정복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류사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데, 초기 인류와 현대 인류가 동물에 대해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과거 인간은 종교가 아닌 믿음으로서 '미신 같은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연현상과 조상과 그리고 동물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그들만의 -이즘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동물에서 기인한 것을 우리는 애니미즘이라고 부릅니다. 동물은 한때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는 동물을 보고 두려워 했으며 감사해했고 그것에 기도하며 공물을 바쳤습니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소라는 동물에 의미를 부여하여 신들에게 소 100마리를 바치는 의식인 헤카톰베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동물이라는 존재는 이처럼 종교적인 의미와 동시에 반-신 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다 정착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집단이 커져감에 따라 가축이 등장했고, 애완 동물이 등장했습니다. 이전까지는 미지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동물은 인간에게 친숙한 것이 되어갔고, 나아가 인간 사회의 발달에 따라 자연마저도 동물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동물을 가축화한 것처럼, 자연 또한 정복하려고 했고, 이는 동물에게 또다시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연과 동물은 상징적인, 종교적인 의미를 서서히 잃어버리고, 우리에게 유용한 도구로서 비춰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티프를 채용한 것이 모비딕으로 보이는데, 종교에서도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고래라는 생물을 기름이라는 경제적인 욕망으로 바라보는 인간들이 그것을 사냥해나간다는, 정복적이며 동시에 인간의 한계지어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동물을 우리의 아래에 두는 것은 일반적인 것일 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동물을 타자화 해서 인식했기 때문이죠. 인간과는 모습이 다르고, 연약한 인간과는 다르게 강력한 무기들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 단순한 외형 만으로도, 불러일으키는 감정마저도 인간과는 달랐던 그들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타자였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그러했듯이, 우리는 여전히 동물을 다른 것으로서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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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독일에서 사람들이 어떤 선을 넘었고, 전쟁의 일반적인 살기와 잔인함을 넘어 죄악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상태로 들어섰다고 말합니다.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고 그런 죄악의 상태가 종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혼의 질병이 계속해서 그 세대를 나타내는 특징이 됐죠. 제 3제국 시민들 중에 사악한 행위를 저지른 자들도 그렇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그 행위에 대해 무지했던 자들 역시 그런 특징을 띠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실상 제 3제국의 모든 시민이 그런 특징을 띠었습니다. 수용소에 있던 이들만이 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처럼 도살장으로 갔다.' '그들은 동물처럼 죽었다.' '나치 백정들이 그들을 죽였다.' 수용소에 대한 비난은 가축 수용소와 도살장의 언어로 충만해서, 제가 이제 하려고 하는 비교에 대한 사전 작업은 거의 필요가 없겠습니다. 제 3제국의 범죄는 사람들을 동물처럼 다룬 데 있다고 고발의 목소리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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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 관해 이책이 다룬 논지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부분입니다. 흔히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끔찍한 행위로 인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것을 넘어서 동물과 연결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그토록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어째서 인간을 동물과 같은 대우를 하면 안되는 걸까요? 인간성은 인간에게만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박쥐의 박쥐성은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인간을 동물과 같은 대우를 해서 그것을 비판한다면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 어디에서는 이미 인간이라는 종이 동물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가 아닌가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위의 인용문에서 인간적인 행위와 비인간적인 행위를 동일시 해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이 가스실에 들어가 고통받은 것은, 양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간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인 학살을 보고도 방관했던 자들이나 그것에 무지했던 사람들은 양들이 도축장에 끌려가는 것을 알고도 모른척하거나 알지 못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한가에 대해서 우리는 그 사실을 계속해서 부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코스텔로는 동물의 권리를 인간만큼 끌어올리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의 권리를 동물과 같아지도록 끌어내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이 왜 권리의 측면에서 차이가 나야하는가, 나야하지 않는가는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주제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생각해보는건 어떨까요? 현대 사회가 동물의 가축화를 기계적인 방식으로 진행해오고 있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그런 행위에 대한 비판도 점차 강도가 높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채식주의도 결과적으로는 동물권 보호의 연장선으로 이해될수 있기도 하고, '동물해방'이라던가 '동물권 옹호'와 같은 논쟁적인 책들도 꾸준히 출판되고 있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보는건 충분히 가치있어 보입니다. 이는 동물은 인간과는 전혀 다르지 않는다는 것에 도달할 수도, 또는 인간이 여타 종에 비해 우월한 이유에도 도달할 수 있습니다. 두가지 결과는 매우 상반되기에, 각자의 삶의 방식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네요.
악함, 악이란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악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악한 행동은 대부분의 경우에서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것은 우리 사회가 범죄라는 하나의 처벌의 원인으로서 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을 선택하지 않고 행동하며 살아가기에, 우리의 선택의 기반에는 악을 선택하지 않음이 깔려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악의 문제는 굉장히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지금 당장도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악에 동참하는 행동을 하고 있을수도 있는 것이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아니지만 타자의 입장에서 악인 행동을 하고 있을수도 있습니다. 악한 행동이라는 애매모호한 영역에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계속해서 강조했던 동물의 문제가 끼어들면,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이전까지 우리가 생각해왔던 악에 대한 관점과 방식 자체는 인간적인 것, 즉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의 권리마저도 고려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면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지에는 의구심이 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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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가 새총 한방으로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것과 도시가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쁘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 모든 게 악하다. 악한 신이 만들어낸 악한 우주인 것이다. 친철한 네덜란드의 주최자들에게, 계몽되고 합리적으로 조직되고 잘 돌아가는 이 도시의 친절하고 똑똑하고 지각 있는 청중들에게 그녀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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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 한마리가 죽는 것, 그리고 도시가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되는 것. 무엇이 더 나쁘다고 우리는 단언해서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이를 공리주의적인 관점을 취하면서 도시가 공습으로 파괴되었을때 발생하는 손해나 부정적인 감정의 총량이 더 클 가능성이 높기에 후자가 더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즉시 하나의 문제에 당면하게 됩니다. 생명의 가치는 어느정도인가? 우리가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가치는 기본적으로 주관적이며 가변적입니다. 나의 가족은 나에게 있어 가치가 높지만 나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에게는 0에 가까울 정도로 없을수도 있습니다. 참새의 생명의 가치는 어느정도인가요? 대도시를 방황하는 하나의 작은 새로서 바라보는 사람과 귀여운 동물로 바라보는 사람이 부여하는 가치의 가중치는 다를것입니다. 가치를 비교하는 것은 우리에게 필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닌 경제적인 관점 자체가 무생물을 포함한 모든 일반 존재에 대해 가치를 매기고 그것을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말은 사실으로만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어항 속의 물고기보다 다이아몬드를 귀중하게 여기며, 동물을 사고파는데 전혀 거부감이 없지만 노예제는 반대합니다.
피터 싱어는 동물에 대한 폭력과 학대를 신경계의 존재로 인해 인간에게 가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바라보고, 그것에 반대합니다. 그와 코스텔로 사이의 공통점이란, 그 이유가 어떠한 것이 되었던 간에 인간과 동물을 같은 것으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물에 대해 우리는 인간의 우월성을 계속해서 주장해야하는 걸까요? 죄와 악함의 문제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심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만약 그것이 인간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동물에 확장되어 주어진다면 그것의 강도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닌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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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있는 사람들도 고통받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들이 그들을 둘러싼 화염 속에서 소리를 지른다고는 생각지 않으세요? '나를 잊지 말아요.' 그들은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그런 도덕적 고통의 외침을 외면하는 양심이란 도대체 어떤 양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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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그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합니다. 그 과정에서 법을 어긴자들, 즉 범법자들이 처벌을 받게됩니다. 벌금형 부터 봉사, 수감까지 다양한 종류의 벌을 받는데,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보며 이들은 죄에 대한 처벌을 받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위의 인용문은 일반사람들과 코스텔로 사이에서 나타나는 범죄자들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나 범죄 저질렀었어'라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듣는다면 그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생각해냅니다. 그 이미지는 아마 벗기기 굉장히 어렵고요. 그런 그들마저 코스텔로는 수용해야 하고 용서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동물에서의 연장선에서, 인간은 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포용은 죄의 가중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동물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채식주의자인 그녀에게 고기를 먹는다는 행위조차도 끔찍한 살육행위로 비춰지며, 그 사실을 알고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는 폭력을 계속해서 자행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토록 그녀와 우리의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한가지 상황을 준비해봤습니다. 모든 감형을 받을 만한, 그리고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는 아이가 누군가를 살해한다면 그 아이는 죄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또는 그를 용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는 아이를 상상해보죠.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보내고, 고아원장은 폭력을 가하고, 학교에서는 폭력과 왕따를 당하고, 지적장해에, 어떤 방식으로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고, 살인 당시에는 괴롭히던 친구들이 강제로 술을 마시게하고 그 아이를 밀쳐서 3층 건물에서 떨어졌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이 하나 죽은 상황을요. 이와같은 우리가 법적으로 감형 받을수 있는 요소들을 모두 지니고 있는 사람이 살인을 저지른 상황입니다. 판사는 이를 모두 고려해서 처벌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론도 그것에 대해서 크게 분노하거나 반대하지 않고요. 이런 상황에 왔을때 그 아이는 여전히 어떠한 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인가요? 모두가 이 아이는 죄가 없어라고 이야기할 때 피해자의 유족은 그 아이에게 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죄를 저질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타자가 발견해내는 것이고 그것을 해석해낸 결과입니다. 전쟁터에서의 살인은 죄가 아니며 문화적인 목적으로 시체에 불을 저지르는 행위는 시체 훼손으로 처벌받지 않습니다. 죄는 주관적인 타자가 발휘하는 것입니다. 예수마저도 죄를 지은 인간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고, 이런식으로 나아가서 전인류는 죄를 지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죄를 지은 범법자이기 때문에 용서와 구원이 의미 있어집니다. 죄를 지었기에 모두는 항상 도덕적인 고통의 외침을 지르고 있으며, 그것을 듣는 사람은 코스텔로로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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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오늘 제 강연의 논지 입니다. 어떤 것들은 읽기에 또는 쓰기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달리 표현하지면, 저는 예술가가 금지된 곳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함으로써 많은 것을 위태롭게 한다, 특히 그 자신을 , 어쩌면 모든 이를 위태롭게 한다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제가 이런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금지된 곳들의 금지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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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 어떠한 것을 추구해야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은 기자와 비슷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신념을 굽히지 않고 억압 받는 것을 견디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것. 살만 루슈디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자신을 몰아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말이죠. 우리가 글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식적으로 던지 무의식적으로 던지간에 누군가의 사상을 담아낼수 밖에 없습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하는 분야에서마저도 그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는 요소로서 폭력은 굉장히 좋은 도구입니다. 정제되어 보이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줄수도 있으며 사건의 극적인 전개, 에로티즘과 엮이기도 하고, 죽음, 계급과 구조를 드러낸다거나, 처절함 등의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이런 요소를 코스텔로는 제한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작가로서 스스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약간 이상하게 들립니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금지해야한다는 것을 말이요.
작가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발언을 했음에도 이 말은 그녀의 작가적 정체성을 하나도 훼손시키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것은 코스텔로의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만듭니다. 그녀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글쓰기의 방향성은 리얼리즘입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실재를 포착하고 그것을 묘사하는 행위를 합니다. 이런 실재라는 목표를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본분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합니다. 작가로서 작가의 정체성을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그녀를 새로운 작가로 만듭니다. 정체성과 자유는 상반된 개념으로 저에게 비춰집니다.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자유의 제약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한 온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내가 나라는 사람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나는 내가 하지 않을 행동의 선택지를 스스로 제한하며 나라면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를 체화해 선택지를 극도로 좁혀나갑니다.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작가로서 정체성을 구성해나가는 행위인 것입니다.
아니 그래서 왜 너무나 잔인한 것을 책으로 쓰면 안되는건데? 라는 질문은 여기서 답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그런 일이 이뤄질 수도 있었고 이뤄졌다고.... 우리는 이미 우리가 있었던 땅을 떠나왔고 우리가 있고 싶은 먼 땅에 와 있다고. 코스텔로의 문학관을 담아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문학이란 현실의 세계에서 허구의 세계로 이행하는 과정이고 위의 말은 말하고 있는데, 이는 목표 설정임과 동시에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모든 허구는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허구적인 것에서 현실성을 완전히 배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이야기한 허구의 세계는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현실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는 세계입니다. 허구의 세계가 그것의 이름의 무게와는 다르게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에, 글 속에서 폭력성의 발현은 허구의 것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을 띠게 되고 현실의 어떠한 것과 겹쳐져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폭력성은 설득력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동일하지 않으면서 애매하게 닮은 것들에 대해 불쾌함을 느낍니다. 문학에서의 폭력성은 그러합니다. 충격이 더 크게 다가오는 이유도 온전하게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허구를 느끼는 동시에 생생하게 전달되기에. 대다수의 책들이 폭력적인 것 (물리/정신적인 폭력뿐만이 아니라 외도나 불륜과도 같은 죄악시되는 모든 것을 포괄한 것)을 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을 넘어서는 것이 문학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벽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폭력을 다루지 않고 폭력에 대해서 말하는 것,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