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종환의 인기 시 두 편의 실상 / 이훈
왜 문학을 읽을까? 먼 옛날부터, 교훈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대답해 왔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즐거움보다는 교훈을 강조하는 쪽으로 간다. 좋은 성적을 얻고 명문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인 사람들에게 즐거움은 먼 미래의 일로 자꾸자꾸 미뤄지는 것과 깊은 관계에 있다. 학생들은 어딜 가나 놀지 말고 공부하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분위기가 즐겁게 읽어야 할 시에서도 먼저 교훈을 찾게 만든다. 물론 시인도 독자의 이런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제일 듣기 싫은 게 교훈이다. 백 번 맞는 내용이어도 교훈적인 냄새가 풍기면 귀를 닫고 하품하는 식으로 반응한다. 어린이도 어른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내 삶의 주인이라는 점을 부정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교훈일수록 스스로 깨닫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투른 방식으로 교훈을 내걸어 나쁜 시가 되고 만 작품을 읽어 보자. 교훈이 독자의 반감을 사지 않고 자연스럽게 몸에 스며들어 그 마음까지 움직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아주 쉽다. 두 번 음미하기는커녕 한 번도 멈추는 일 없이 그냥 읽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하고 궁금해할 만한 데가 한 군데도 안 보인다. 비유가 없지는 않지만 상투적이어서 그 뜻을 알아 내고자 굳이 상상력을 작동시킬 필요가 없다. ‘바람’과 ‘비’는 누구 눈에도 삶에 깃들기 마련인 어려움을 가리킬 뿐이다. 살다 보면 어려운 처지에 빠지기도 하므로 그걸 안고 가야 한다는 교훈이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것은 이 시가 시적인 장치, 이를테면 이미지라든가 거기서 나오는 여러 가지 함축적인 뜻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가 말로 이뤄진 조직이라는 점을 의식하도록 이끌지 못한다. 살다 보면 어려움이 있으니 그런 것을 견뎌 내야 된다는 날것의 산문적인 교훈과 이 시가 다를 바가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 시에서 ‘바람’과 ‘비’는 각각 ‘꽃’을 흔들고 젖게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 구도의 단순성에 있다. 전자는 ‘꽃’과 일방적으로 대립하기만 한다. 한마디로 ‘꽃’이 아름답게 피는 걸 방해하는 세력이다. 그런데 여기서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자. 여러분이 ‘비’나 ‘바람’이라면 이런 관점에 흔쾌하게 동의하겠는가? 꽃이라고 상상해도 좋다.
‘바람’은 이 시에서처럼 ‘꽃’을 흔드는 부정적인 작용만 할까? 아니, 흔든다고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 있는가? 다른 성질은 없을까? 바람은 살갗을 간질여 괜히 마음을 들뜨게 하고, 꽃봉오리를 열어 꽃을 피게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를 방황하게 한다고 푸념만 할 수는 없다. 어디 이뿐이랴. 바람이 불어야 씨를 멀리 날려 다음 해에도 꽃을 피우게 할 수 있다. ‘비’도 여러 성질이 있는 것은 ‘꽃’과 마찬가지다. 덥고 목이 마른데 마침 비가 와서 풀(꽃)이 기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비가 없으면 아예 꽃을 피울 수가 없다. 꽃에게 비가 하는 일의 예는 이만큼만 들고, 여러분의 상상력으로 목록을 채우는 게 좋을 듯하다.
세상은 흑백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두 색깔이 섞인 회색은 물론이고 다른 색도 있다. 이렇게 세상은 복잡하다. 이 시도 ‘꽃’과 대립하는 ‘비’와 ‘바람’을 삶의 요소로 껴안고 있기는 하다.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다(참고로, 이 구절은 비문이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며’라고 해야 맞다. 물론 시적인 수사로 ‘바람에 젖으며’라고 못 할 것은 없지만 1연에서 이미 ‘흔들린다’고 했으므로 억지스러운 변명으로 들린다.)고 한다. 이게 이 시가 얘기하고자 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포용이 부정적인 측면만 일방적으로 과장된 채로 삶에 편입되는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게 문제다. ‘비’와 ‘바람’의 긍정적인 요소는 전적으로 무시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바람’과 ‘비’는 복잡한 성질을 드러내는 존재가 아니라 교훈을 전달하려는 목적에 맞춰서 동원된 수단으로서만 나타난다.
부당하게 대상의 성질을 배제하는 대신에 꽃과 바람, 꽃과 비가 사이좋게 놀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 광경을 감각적으로 포착했으면 어땠을까? 감각적 구체성이야말로 문학의 핵심을 이룬다. 시인은 오감을 예민하게 작동시켜 그를 둘러싼 세계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목표를 이루려는 욕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대상의 전체적인 면모를 못 보거나 모른 척한다면 좋은 시인이랄 수는 없다. 시인들이 역설한바 불신을 자발적으로 유예하여 세상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려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물론 이것은 독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자질이다.
교훈을 드러나게 내세우는 도종환의 시 한 편을 더 읽자.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마침 시가 나오게 된 배경을 놓고 시인이 글을 남겨 놓고 있으므로 여기에 옮긴다.
막상 해직이 되고 나니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해직된 교사들끼리 사무실에 모여서 함께 대책을 마련하기도 하고 같이 밥도 해 먹으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교사들은 마냥 사무실에만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씩 둘씩 발걸음이 뜸해져 가 보면 몰래 노동판에 나가 막일을 하기도 하고, 부인과 함께 통닭집이나 음식점을 내서 장사를 시작하기도 하고,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을 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중략)
답답해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옆 건물 벽에는 담쟁이가 가득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저 담쟁이는 벽에 살면서도 저렇게 푸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보니 담이란 곳은 흙 한 톨도 없고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곳이 아닙니까. 저런 데서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 어린 담쟁이는 얼마나 원망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주위엔 산도 있고 숲도 있고 비옥한 땅도 널려 있는데 왜 우리만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하느냐고 얼마나 원망을 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원망만 하고 있었다면 담쟁이는 말라죽었을 겁니다. 원망만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거지요.
뿌리로 벽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붙들고는 있었던 거지요. 붙들고 포기하지 않았던 거지요. 나도 힘들지만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옆에 있는 다른 이파리들도 다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저렇게 손에 손을 잡고 있는 거겠지요. 자기만 살길 찾겠다고 백 발짝을 달려가지 않고, 백 개의 이파리들과 손에 손을 잡고 한 발짝씩 나아가느라 저렇게 느리게 가는 거겠지요. 정말 견딜 수 없이 힘든 날도 있지만 말없이 벽을 오르는 거겠지요. 저는 벽에 살기 때문에 성장의 속도가 늦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텐데도 그 어려움을 과장하거나 떠들어대지 않고 말없이 그 벽을 오르는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믿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면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다른 이파리들과 함께 연대하고 협력하며 벽을 오르는 거겠지요. 그래서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거겠지요.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저는 회의 서류 뒷면에다 연필로 조그맣게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생략)
지난해 7월 30일 어느 일간지에서 직장인 백삼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답니다. ‘내 인생에 꼭 간직하고 싶은 시 한 편을 써 달라’는 설문조사였답니다. 그 설문조사에서 「담쟁이」가 1위를 했다고 누가 연락을 해 주어서 인터넷으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시에 1위가 어디 있고 2위가 어디 있습니까? 언제부터 이 시를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느냐고 물었더니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이후부터 이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직장 들어가기도 힘들고 직장생활 하는 것도 힘들어지면서, 사람들이 위안과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는 시를 찾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나는 내 인생의 벽을 만났을 때 이 시를 썼고, 내가 쓴 시에서 내가 위안을 받으며 어려운 시절을 지나올 수 있어서 고맙게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도 자기 생의 벽 앞에서 이 시를 읽고 힘을 얻는다니 그건 또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27: 힘겹던 해직의 나날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한겨레>>, 2010. 12. 31.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6679.html)
다른 시인이 이 시를 두고 한 말도 들려 드리겠다.
벽을 타고 자라는 담쟁이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인데, 시인은 이 담쟁이에게서 생명에의 강인한 의지와 희망을 찾아가는 꿈을 봅니다. 동시에 혼자만 앞서 가지 않고 이웃과 손잡고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적 우정의 힘을 발견하죠.
담쟁이는 벽이 있을 때 주저앉아 절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지요. ‘벽’이라고 느낄 때 그 벽을 오르기 시작하는 담쟁이. 물도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기 힘든 척박한 곳에서도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자라납니다. 여럿이 손잡고 말이죠. ‘절망과 고난을 조금씩 이겨 나가는’ 담쟁이와 ‘여럿이 함께 손잡고 넘는’ 담쟁이. 도종환 시인이 담쟁이를 아름답게 여기는 것은 이 두 가지 모습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김선우, 손택수, <<교실 밖으로 걸어나온 시>>, 나라말, 2011, 179-80쪽.)
자작시 설명이나 다른 시인의 해설이나 그게 그거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다른 책에서도 거의 같은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시는 함축적인 언어를 쓰고 따라서 독자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다고 문학의 기초를 공부하는 교실에서 배웠는데 어떻게 다른 필자들이, 거기다가 눈과 귀가 밝은 시인들마저도 마치 한사람이기나 한 것처럼 같은 얘기를 할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이 시에 동원된 수법이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알레고리는 그 뜻이 어린아이도 얼른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분명하다. 아이들에게 잘 읽히는 우화가 바로 알레고리다. 이런 데서 알 수 있듯이, 알레고리는 다루는 대상 그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작가의 생각이나 교훈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주로 사용된다. 이런 설명은 「담쟁이」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담쟁이의 성질이 한쪽으로만 치우치거나, 심지어는 왜곡될 가능성이 커진다. 시인의 관찰(이라기보다는 주장)이 담쟁이의 실상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확인하려면 사전에서 ‘담쟁이’를 찾아보면 된다.
포도과의 낙엽 활엽 덩굴나무. 줄기에 덩굴손이 있어 담이나 나무에 달라붙어 올라가며 심장 모양의 잎은 끝이 세 쪽으로 갈라지고 톱니가 있다. 6~7월에 황록색 꽃이 잎겨드랑이에서 취산(聚繖) 화서로 피고 열매는 장과(漿果)로 가을에 자주색으로 익는다. 흔히 담장이나 벽 밑에 심는데 한국, 일본, 대만 등지에 분포한다.
시인이 ‘뿌리’라고 한 것은 ‘덩굴손’이다. 뿌리는 담 밑 흙 속에 있다. 그러므로 담에 물이 없어도 담쟁이가 자라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식물학자에게 확인해 봐야겠지만, 농촌에서 자란 내 감각으로는 담에 물이 늘 있으면 오히려 덩굴손은 그곳을 피해 갈 것만 같다. 씨가 벽에서 싹을 틔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담쟁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벽이나 담은 담쟁이의 꼭 필요한 의지처다. 이게 없으면 담쟁이는 자라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담쟁이에게 벽은 희망이다.
저런 주제를 형상화하려고 했다면 담쟁이를 끌어다 이치에 닿지 않는 얘기를 하기보다는 시인이 겪거나 주위에서 본 해직 교사의 고통스러운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게 낫다. 그러면 저 시가 직접적으로 주장하는 상투적인 교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독자도 그 절망에 전염된다.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기보다는 절망을 깊이 천착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해 두자.
교훈을 의식할수록 그 교훈의 감동적인 전달에 실패하기 쉽다는 역설적인 사태가 벌어진다. 대상을 구체적으로, 다른 말로 하면, 독자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감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게끔 잘 그리는 게 교훈을 전달하는 최적의 방법이다. 소풍 가서 즐겁게 논 일을 거기에 있지 않았던 독자에게 자세히 잘 보여 주면, 필자가 앞에 나서서 내년에 다시 가야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데도 독자가 먼저 그런 마음을 먹게 된다. 이게 제대로 된 교훈이다. 영화가 어떤 예술 갈래보다도 공감의 눈물을 잘 흘리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구체성 때문이다. 말로 이뤄진 구체성을 꼼꼼하게 살피는 일은 즐거움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뛰어난 시에서 교훈과 즐거움은 같이 간다고 해야 맞다.
첫댓글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50097.html
그렇다. 담쟁이에게 벽은 사다리다.
책을 읽다가 바람이 없으면 나무가 자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림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심었던 나무 중 많은 것은 빨리 자랐지만,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기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설계자들은 어린나무가 제대로 자라려면 바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바람은 나무를 휘게 만드는데, 그러면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있는 뿌리 부분이 끌어당겨지면서 반대 방향에 있는 나무 부분이 압축된다. 뿌리계는 이에 대한 반응으로 필요한 곳에 더 단단한 닻을 제공하려고 팽창하며, 압축된 나무 세포들은 구조가 더 튼튼하고 단단하게 변한다.
이렇게 변화된 세포 구조를 ‘이상재reaction wood’ 또는 ‘응력재stress wood’라고 부른다. 어릴 때 강한 바람에 노출된 나무는 다 자랐을 때 훨씬 강한 바람도 견뎌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보호받는 온실 환경에서 자란 나무는 다 자라기 전에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일이 종종 생긴다."
조너선 하이트, 이충호 옮김, <<불안 세대>>, 웅진지식하우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