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광주선교부 개척자
오웬(Owen) 선교사
광주시 남구 양림동 108번지(호남신학대학교)에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묘지가 있다.
여기에는 1909년 광주에서 최초로 순직한 오웬 선교사를 비롯하여 12명의 선교사, 1913년 사망한 코잇(Coit) 선교사 자녀와 10명의 선교사 가족 등 모두 22기의 묘가 있다.
목포에 전라남도 최초의 진료소를 개설한 C. C. 오웬(1867-1909)
오웬(Owen, Clement Carrington, 한국명: 吳基元)은 1867년 7월 19일 미국 버지니아 주 블랙 월넛트(Black Walnut)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 햄덴 시드니(Hampden Sydney)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유니언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전공하고 스코틀랜드(Edinburgh)에 유학하였다.
해외 선교지에서 의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97년 5월 버지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898년 11월 6일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목포선교부에 부임하였다.
1899년 목포진료소를 개설하여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를 운영했다. 1900년 12월 12일 미국 북장로회 화이팅(Georgiana Whitting) 의료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하고 목포에 합류하여 호남지역 선교사업에 힘썼다.
목포선교부는 당초 나주에 설치하는 것으로 계획(1896) 되었으나, 1897년 10월 1일 목포항(港)이 개설되면서 목포에 선교부지를 매입하고 1898년 가을, 벨(Bell, Eugene, 裵裕祉)이 서울에서 이주하고, 뒤 이어 오웬이 부임하므로 목포선교부가 조직되었다.
오웬은 의사와 목사로서 의료사업과 전도 사업을 병행하였으며, 벨과 함께 1904년 광주선교부도 개설했다. 그는 선교 초기 목포, 광주에서 의료사업을 전개하였으나 병원에서 자유로운 복음전파가 가능하게 되자 의료 활동을 중단하고 전도 사업에 전념하였다.
전도 사업에 헌신하면서 1900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9회 선교사공의회 회장으로 선임(언더우드 후임)되어 활동하고 ‘합동공의회시대(1901-1906)’에는 광주, 해남, 완도, 보성, 나주, 고흥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1년 광주 송정리(松汀里)교회를 벨과 협력하여 설립하고, 1902년 해남 선두(先頭)교회를 설립하였다. 1904년 12월 19일 목포에서 광주로 이주하였으며 12월 25일 광주 양림(楊林)교회 설립에 벨과 협력하였다. 그리고 완도 관산(冠山)교회도 설립했다. 1905년 나주 방산(芳山)교회, 보성 무만(武萬), 신천(新泉)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06년 고흥 옥하(玉下)교회를 설립했다. 이밖에 전남 각 지역을 순회하며 프레스톤(Preston, J. F., 邊約翰), 맥컬리(McCallie, H. D., 孟顯理), 코잇(Coit, R. T., 高羅福) 등과 나주 광암(廣岩), 장흥 진목(眞木), 순천 평촌(平村)교회에서 상계(相繼)하여 시무하였다.
독노회(獨老會) 기간에 해당하는 1907년부터 그가 순직한 1909년까지 화순, 보성, 광양, 나주 지방 등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여러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7년 화순읍(和順邑)교회 설립을 비롯하여 보성 운림(雲林)교회도 설립하였다. 1908년 광양읍(光陽邑)교회, 보성 양동(陽洞)교회와 나주 내산(內山)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전남지역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광주 중흥(中興)교회에서 벨 선교사와, 장흥 삭금(朔金)교회에서 니스벳(Nisbet, 柳西伯)과, 나주 서문(西門)교회에서 탈마지(Talmage, J. V., 打馬子)와, 나주 상재(上材)교회에서 뉴랜드(Newland, L. T., 南大理) 선교사 등과 각각 상계하여 시무한 바 있다.
광주 선교사 묘지에 최초로 안장된 오웬 선교사
니스벳(Nisbet, Anabel M.)은 “목포선교는 1900년 오웬이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제일 경험이 많고 유능한 화이팅과 결혼함으로 인하여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의사이면서 목사로 지칠 줄 모르는 순회설교자였다.”라고 표현했다. 그는 삶의 마지막 해에도 13개 군의 선교지역을 담당하여 순회 전도하면서 한 달 이상을 집을 떠나 전도여행을 계속했다.
이때 200명 이상에게 세례를 베풀고, 430명의 학습교인을 세웠다. 그가 별세하기 몇 일전 그의 어린 딸은 ‘아빠는 왜 우리 집에 계시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사망 당시의 그의 모습에 대하여 차종순 총장은 “오웬은 1909년 3월 22일 광주를 출발하여 화순, 남평을 지나 장흥에 도착했다. 그러나 주일날 아침부터 뜻하지 않게 격렬한 오한으로 떨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장흥의 교우들은 가마를 준비하여 급히 광주로 향했다. 오한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그는 신음했다. 가마꾼들은 걸음을 재촉하였으나 수요일 새벽 2시에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윌슨(Wilson, R. M., 禹越淳) 의사의 치료와, 목포 포사이드(Forsythe, W. H., 保衛廉) 의사에게 전보(電報)하였으나 그가 도착하기 전 4월 3일 밤 10시 45분 급성 폐렴으로 별세하였다.”고 말했다.
장례예배는 1909년 4월 6일 광주선교부 묘지에서 프레스톤(Preston, 邊約翰) 목사 집례로 거행되었으며 광주선교사 묘지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부인(Georgiana W.)은 네 딸을 데리고 귀국하였으며 1952년 1월 24일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Denver)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하였다. 그가 살던 양림동 67-1번지 사택은 현재 광주 유형 문화재 26호(오웬기념관)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2009.12.28.교회복음신문/신호철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