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연휴는 잘 지내셨나요. 챙겨보지 못할 때가 더 많지만, 명절이면 꼭 특선영화 목록을 살펴보곤 합니다. ‘벌써 이 영화를 TV에서 한다고?’라며 시간의 흐름을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설에 이어 이번 추석에도 ‘보헤미안 랩소디’가 특선영화로 편성되었습니다. 지난 설에는 동성과의 키스장면을 삭제하고 방영하여 논란이 있었지요. 이번에는 19세 등급으로 논란이 있었지만, 15세 등급 무삭제판으로 방영되었습니다. 이번 일을 지켜보며 소개하고 싶은 책이 생겼습니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단편소설집입니다. 총 8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요. 재미있는 점은 두 단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 편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앞선 단편에서 나왔던 인물 중에 한 사람이 다음 단편의 주요 인물이 되는 식이지요.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줍니다.
저는 여성노동자, 성노동자, 기지촌 문학에 관심이 크고 그 관심사가 앞으로의 공부에 한 방향성이 될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물론 앞으로 또 다른 방향성이 생길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그쪽으로 생각이 뻗어나갔던 것 같아요.
한정현 작가는 쓰고 싶고,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합니다. 첫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2019)’를 출간한 이후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위와 같이 말했던 작가는 이런 생각을 넓혀갑니다. 1년 뒤에 나온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2020)’에선 성소수자, 재일조선인, 국가폭력의 희생자 등으로 작품의 세계를 확장시켰지요.
단편소설 가운데 하나인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이 많은 이야기에 시작점이 되는 소설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역사 속에 가려져왔던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만신으로 여성의 옷을 입어야 했던 남성 희, 선화공주 역을 맡았던 국극단원 남성 주희, 마지막으로 오발된 경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트랜스젠더 제인까지. 그들 삶의 아픔과 시대의 혼란이 만나는 지점에 이야기들이 피어납니다.
처음 책을 읽을 때엔 페이지를 앞으로 되돌리기에 바쁩니다. 익숙한 시선으로 읽다보면 인물파악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지요. 한 예로, 주희는 ‘아침마다 배달된 신문을 뒤적이며 커피를 내리고 오후에는 구운 비스킷을 제철 과일과 함께 먹는 걸’ 좋아합니다. 더하여 그의 이름 때문에 어느 순간엔 여성으로 착각하게 되고, 그러면 내용이 꼬여버리게 됩니다. 이야기를 따라잡기 위해 인물의 성별을 유심히 살피며 제 안에 있던 편견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작품 속에서 제인이 말합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통해 봐야 한다며.’ 라고요. 제인의 말이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수업을 하던 중 눈에 띈 제자가 세상을 떠난 옛 연인의 환생임을 알게 됩니다. 못다 이룬 사랑을 이어가고자 하지만, 동성 간의 사랑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결국 둘은 번지줄을 메지 않고 다음 생을 기약하며 함께 뛰어내립니다. 2001년 작품인 ‘번지점프를 하다’는 전생의 인연을 소재로 동성 간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었지요. 희, 주희, 제인이 이야기 속 인물에서 나아가 하나의 인격으로 다가올 때,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계를 만나는 눈이 뜨이겠지요. 좋아하게 된 그들을 통해 편견을 넘어서,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젠더갈등이 극명한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남과 여. 둘로 똑 나뉘는 단어에 생각까지 경계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고요. 한 시대 전에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갈등하던 모습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남과 여 두 단어를 이어줄 다리가 필요합니다. 그 자리에 희, 주희, 제인의 이름들을 놓아봅니다.
‘태어날 땐 몰라도 죽을 땐 자기 자신으로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여자 옷을 벗지 않았다던 희, 멸시와 차별의 나날을 보냈음에도 소원은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 했던 주희, ‘좋아하는 곳이 제자리’임을 알고 주체적으로 살아갔던 제인까지. 성별을 넘어서 자기 삶을 사랑하고, 온전히 자신으로 살고 싶었던 그들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봅니다.
제목에 등장하는 인물, ‘이보나’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않았습니다. 주희의 친구로 나오는 이보나의 역할은 무엇이었을지, ‘소녀 연예인 이보나’를 읽으며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 과정이 젠더의 경계를 허물어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