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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구원받지 못합니다. / 마 22:1-14
오늘도 계속해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시며 천국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분명 예수님께서는 가장 많은 부분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나라에 대한 설명을 하고 계시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전하시며, 그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회개를 촉구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존재와 그분에 대한 믿음에 촛점을 맞춰 믿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달을 가리켰는데,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킨 손가락만 쳐다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달도 중요하고, 손가락도 중요하죠, 하나님 나라도 중요하고, 그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나라를 들어가기 위한 열쇠이신 예수님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은, 우리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을 원하십니다. 딤전 2: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는 사람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이 조금 넘는데, 그리스도인의 수는 600만 명, 좀 늘려 잡아서 800만 명 정도입니다. 600만~800만 명도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전체 인구로 볼 때, 600만이면 12%이고, 800만이면 16%에 지나지 않습니다. 600만~800만 명도, 다 구원받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실제로 구원받는 숫자는 상당히 줄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엡 2: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결코 무엇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반응, 곧 믿음으로 받습니다.
알렉산더 우턴이라는 전도자가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우턴은 “너무 늦었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습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구원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위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를 믿는데 무슨 단서가 붙지 않습니다. 최소 몇 년은 믿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 깊이 믿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 역시 없습니다. 얼마만큼 잘 믿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도 붙지 않습니다. 그냥 믿으면 됩니다. 참되게 믿으면 됩니다. 거짓 없는 믿음이면 됩니다.
그렇다고 대충 믿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 7:13-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믿음에 대충은 없기 때문입니다. 취미생활은 대충 할 수 있습니다. 취미생활로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축구와 탁구, 배드민턴, 싸이클, 테니스, 등산 등 다양합니다. 월 회비를 내고, 회원으로서 활동을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정기 모임 시간에 빠지지 않고 나갑니다. 취미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기쁨으로 참석합니다. 몸이 웬만큼 나쁘지 않은 상태에서는 참석하려고 애를 씁니다. 등상과 싸이클은 아주 먼 지역으로 까지 갑니다.테니스 하는 목사들을 보면, 매주 월요일 정기모임이 김제에서 있기에 전주에서 김제까지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물며 신앙생활을 그것에 비하겠습니까? 주일예배 드리는 것을 취미생활 하는 것에 비하겠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말은, 예수만 믿는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인 것입니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게 너무나 당연함에도 실생활에서 쉽지 않습니다. 그게 쉽다면 주님이 좁은 문 얘기를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이 주일성수와 십일조입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가 기본인 것은, 소유권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일성수는 시간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십일조는 물질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 전부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신앙고백으로서 주일성수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물질 전부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신앙고백으로서 십일조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청지기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앙생활의 기본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과 신앙생활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신앙은 없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몇 년을 다녀도, 교회 등록을 했어도 정회원이 아닌 준회원처럼, 그것도 아니면 게스트(손님) 수준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경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경계인은 결정적일 때, 어느 쪽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의 입문은 어렵지 않습니다. 입문을 하고 나면,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달리 좁은 길이 아닙니다. 그 동안에는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 뜻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바뀌면, 내 뜻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내 뜻을 예수님의 뜻에다 맞춰야 합니다. 대신 예수 믿는 순간부터, 그분이 나를 영원토록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의 피가, 삼천리 반도강산을 적셨습니다. 지금은 정치 집권자들이 좀 뭐해서 그렇지, 조금만 잘하면 민족 역사상 가장 긴 평화와 번영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데 외부적인 박해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조금씩 크고 작은 제약이 따를 거 같습니다. 그러다 환난과 박해가 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마 10:22절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예수님과 그 직후 시대만 해당될 거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예수 믿는다고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때, 과연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확실하게 믿어도, 그 때 돌아서는 사람이 있을텐데, 지금 시원찮게 믿으면 그 때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신앙은 견디는 것입니다. 견디되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의 최종 관문을 통과합니다. 자신만 구원받으면 끝입니까? 이 한 몸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까? 가족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는, 무관심해도 전혀 상관없습니까?
딤후 4:1-2절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어떤 한 사람이 무덤가를 지나가다가 서서, 묘비를 보았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그 사람은 픽하고 웃으며 두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그러자 이 사람이 뭔가 진지해져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나 하시오!” 우리는 언젠가 죽음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엄숙히 서야할 때가 옵니다. 이건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누구도 가리지 않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릅니다. 성 프랜시스는 임종할 때, 너무 기뻐서 크게 찬송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지금 창밖에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이 조금 더 엄숙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 프랜시스가 말했습니다. “주책을 떨어 미안하네. 주님 만날 생각을 하니까, 너무 기뻐서 그랬네.” 하지만 미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기겁을 합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한 세기를 풍미한 한 지성인이 폐수종으로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문병 온 사람들에게, 고통스런 표정으로 미친 듯이 고함을 쳤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자기 병명이 무엇인지 곁에 선 아내에게도 묻지 못했습니다. 그가 바로 ‘자유’란 주제로 수많은 글을 쓰고, “죽는 문제에서도 자유를 찾으라”고 외친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입니다. 결국 그는 1980년 4월 16일 입원한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프랑스 신문들이 글을 썼습니다. “왜 싸르트르가 그렇게 수치스럽게 죽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 외쳤던 그의 말로가, 왜 이렇게 비참했을까?” 그리고 신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임종 때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구나!” 싸르트르는 하나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죽기 전에는 호기롭게 “죽는 문제에서도 자유를 찾으라”고 외쳤지만, 막상 자기에게 죽음의 문제가 닥쳤을 때, 그는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죽을 준비 중에, 너무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한 순간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오는데, 수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영국의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죠지 뮬러에게,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한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삶을 나누었던, 다섯 명의 친구들을 구원시켜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죠지 뮬러는 다섯 명의 친구를 위해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믿지 않는 친구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죠지 뮬러는 이 두 친구를 위해서, 무려 52년 간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죠지 뮬러는 이제 노년이 되어서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 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죠지 뮬러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간절하게 최후의 설교를 했습니다. 마지막 설교를 하던 그 날, 그의 한 친구가 거기에 참석했다가, 뮬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후 죠지 뮬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까지 믿지 않았던 한 친구가, 뮬러의 죽음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죠지 물러가 자기를 위해서, 52년간이나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죠지 뮬러가 죽은 그 해, 이 친구는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 그는 전 영국을 순회하면서 간증했습니다. ”죠지 뮬러의 기도는 다 응답되었습니다. 저는 그 기도의 최후 응답입니다. 당신의 모든 기도도 다 응답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가족 구원을 위한 눈물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전도대상자를 위한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혹 시간이 걸릴 수는 있습니다.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혹시 이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면 구원의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은,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긴장이 됩니다. 예수님이 시편 118:22절 이하의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을, 자신들에게 적용했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발끈했습니다. 하지만 무리가 무서워, 실제로 예수님을 잡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긴장감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또 하나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1-2절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비유의 내용은,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 이야기입니다. 임금 곧 왕이니 며느리를 고르는데 애를 썼을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자기를 이어서 왕이 되면, 며느리가 왕비 곧 국모가 됩니다. 한 집안의 결혼식도 큰일인데, 왕세자의 결혼식이니, 국가적 경축행사입니다. 혼인 잔치의 규모도 엄청났을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혼인 잔치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결혼식 당일이 되었고,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3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왕세자 결혼식이니, 아무나 올 수 없습니다.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면, 미리 청첩장을 보냅니다. 그래서 초청을 받은 사람만 당일에 올 수 있었습니다. 종들이 청첩장을 가져가면, 그것을 받은 사람은 참석 여부를 사전에 말해줘야 한다. 자리가 정해져 있어서입니다. 요즘 결혼식이야 자리가 있어도 앉지 않고 서 있고, 또는 축의금 전달만 하고 먼저 밥 먹으러 가곤 하지만, 왕세자 결혼식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신분사회였던 당시엔 좌석 지정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청첩장을 받을 때, 참석 여부를 알려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결혼식 하루 전에 다시 종이 확인합니다. “내일이 왕세자 혼인잔치가 있습니다. 오셔서 축하해 주세요.” 하고 알립니다. 그런데 청첩장을 받았던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한 것입니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단 말입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세자 결혼식입니다. 전에 청첩장 받을 때, 분명히 참석하겠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별다른 이유 없이 오기를 싫어하니 말이 됩니까? 종들은 어쩔 수 없어 돌아섰습니다. 임금에게 그 걸 사실대로 알려야 했습니다. 임금은 그 소식을 듣고는 무척 기분이 상했지만,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이 좋은 날 잔치에 재 뿌릴 수 없어, 이를 악물고 참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4절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역시 예전에 청했던 사람들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초청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아주 정중하게 주인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5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들은 자기들을 찾아온 종들을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갔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습니다. 남의 밭도 아니고 자기 밭인데, 뭐 가볼 수 있습니다. 사업에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오래 전 약속입니다. 당장에 불러도 사양하지 않고 가야할 자리입니다. 물론 임금도 봐줄 수 있는 상황은 있습니다. 아내가 출산을 한다거나, 가족 중에 누가 위독하거나, 아님 집안에 초상이라도 났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오래 전 약속을 깨고, 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하러 가는 것은, 임금에 대한 무례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더 고약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6절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그 남은 자들이 종들을 못되게 대한 것입니다. 잡아 모욕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건 정말 임금을 향해, 어디 한 번 해 보자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 그냥 종이 아닙니다. 종은 임금이 보낸 대사인 셈입니다. 종을 그렇게 대한 것은, 곧 그 종을 보낸 임금을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왕세자의 혼인잔치에 참석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한 날에 밭에 간다, 사업에 간다는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는 것도 큰 무례입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들의 행위는, 임금의 노를 폭발시키고 말았습니다. 임금도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7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임금도 좋은 날이니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도가 있습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한 것입니다. 임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결국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 군대는 출동하여 임금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까지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들은 심판의 불을 자초한 것입니다.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종들은 선지자들, 전도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잔치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선민인 유대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관심 없어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보낸 종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도 참을 만큼 참으셨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유대인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군대로 무장한 로마의 심판을 받았고, 예루살렘은 불사름을 당했습니다. 임금은 고민하다 결단을 내렸습니다.
8-9절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초청하여 오라고 했습니다. 본래 이들은 초청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청한 사람들이 오지 않음으로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게 아닙니다. 가는 곳마다 회당을 찾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이방인에게로 복음을 돌렸습니다. 우리는 본래 이방인으로서, 네거리 길에서 만나 혼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한사코 거절함으로, 우리에게까지 구원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종들은 주인의 말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10절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그들도 주인 아들의 혼인 잔치를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태껏 준비하느라 고생했으니, 느긋하게 잔치를 즐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청함 받았던 자들이, 별다른 이유없이 참석하지 않음으로, 안 해도 될 고생을 했습니다. 같은 동료였던 종들 중에 모욕을 당했고, 몇은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종들은 주인의 말을 따랐습니다. 길에 나가 만나는 대로 데려와, 잔치 자리를 채웠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이 있는데, “악한 자나 선한 자나”입니다. 애초에 선한 자들을 초청했을 것입니다. 특히 이름 있는 자들을 초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리가 채워지지 않자, 초청 범위를 확대했습니다. 당일 네거리 길에서, 누구든지 만나는 대로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자리가 채워졌습니다.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비로소 잔뜩 굳어 있던 임금의 얼굴이 펴졌습니다. 웃음도 되찾았습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던 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11-12절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발견된 것입니다. 궁중에서 벌어진 잔치에 참여한 사람에게는, 예복이 주어졌던 모양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길에서 만나 당일 초청을 받은 사람에게도, 궁중에 도착해서는 예복으로 갈아입게 했습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혹시 모를 왕의 신변보호를 위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임금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이 사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왕을 시해하기 위해, 또는 왕세자를 시해할 목적으로 숨어든 자객으로, 충분히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13절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그는 즉석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분명히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초청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체포되어 심판을 받은 것이, 악한 자여서가 아니라, 예복을 입지 않은 자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도 예복을 입었다면,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선악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가 선한 자여서 구원을 받고, 그가 악한 자여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복, 곧 의의 옷을 입지 않아서입니다. 의의 옷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진 성도의 옷입니다. 누구도 자기 옷 입고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 선행의 옷, 자기 도덕의 옷, 자기 윤리의 옷 입고 있다가는, 천국 문앞에서 쫓겨남을 당합니다. 자기 옷을 벗고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신 의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14절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주님은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유대인 모두 구원의 청함을 받았지만, 구원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소수만 구원에 이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의 소수만 예수를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양이 아니고 취미생활도 아닙니다. 절대적인 생명을 향한 강렬하고 거룩한 욕망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말하면, 구원을 향한 열망입니다. 여러분이 흔히 들었던 이야기지만, 실질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돈만 좀더 있으면 만족스럽고, 건강이 더 좋아지면 행복하고, 자식들이나 잘 되면 좋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서 재미있게 살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예수가 생명이라는 교회 용어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 떨어지는 이유는, 세상살이에서 잘못된 학습 때문입니다. 서로 경쟁하고 소유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 외에는, 더 이상의 것을 찾지 않게 하는 학습이, 우리 몸에 배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더 착하고, 똑똑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학습입니다. 그런 상황을 오늘 본문은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무엇인지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게 더 큰 불행입니다.
인생이 한 번뿐이라서, 특별히 소중하다는 생각은 누구나 합니다. 그런 생각은 옳습니다. 그 소중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잔치에 청함 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 받은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구에서 살도록 청함을 받았지만, 모두가 기쁨과 평화의 삶에 참여하도록 선택받지는 못했습니다. 이게 누구 책임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바로 그런 삶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14절 말씀은 유효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모든 민족이 청함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초청장을 받고, 다 예수 믿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으로 택함을 입은 자는 적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임금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부르시며, “그 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푹 쉬려무나.” 할 때까지 그 일을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천국잔치의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는 적음을 알게 하옵소서. 구원의 초청장을 받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그런데 우리에게는 구원의 초창장이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이 초청장에 응답하고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가진 구원의 초청장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모욕을 당해도, 죽임을 당해도, 우리는 그 일을 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임금되신 예수님이, “이제 자리 다 찼으니 그만하려무나.” 할 때까지 초청장을 전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천국으로 부르시며, “그 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푹 쉬려무나.” 할 때까지 초청장을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라. / 마 22:15-22
어느 동네에 술집의 단골손님들이, 그의 바텐더가 그 동네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라 확신하고, 1000달러 내기를 걸었습니다. 바텐더는 손으로 레몬을 짜 레몬즙이 모두 유리잔으로 들어가게 한 후, 그 레몬을 다른 경쟁자에게 넘겼습니다. 누가 그 레몬에서 한 방울만이라도 더 즙을 짜내면 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테면 역도선수, 부두 노동자 등이 시도해보았지만, 아무도 해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키가 작고 마른 대머리의 남자 한 사람이 술집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바텐더에게 “제가 한번 도전해 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습니다. 웃음소리가 그치자 바텐더는 “좋소” 하면서 레몬을 잡고 꼭 짰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마르고 주름 잡힌 레몬을 작은 남자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 남자는 레몬을 손에 넣고 꽉 움켜잡았는데, 한 방울이 유리잔 안으로 들어가자, 군중의 웃음소리가 완전한 침묵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한 방울, 그리고 또 한 방울, 다 마른 레몬 껍질에서 모두 합해 여섯 방울의 레몬즙이 빠져 나왔습니다. 군중이 환호하는 가운데 바텐더는 1000달러를 건네주면서, 그 작은 남자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도대체 당신 직업이 뭡니까? 분명히 벌목하는 사람이나 역도 선수는 아닌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미소가 그 남자의 입술을 스쳐 지나가면서, 작지만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국세청에서 일합니다.”
자기 자신만 소중하고 자기의 생각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우리는 ‘자아 중심성’이라고 일컫습니다. 사람들이 자아 중심성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언제나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아 중심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남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므로, 자기의 생각만이 항상 옳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움직이기를 바라며,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의 모든 사건이나 사물, 심지어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재단하려 듭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환경 세계를, 세상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아 중심성은, 발달심리학자 피아제에 의하면, 4세에서 7세 사이의 아동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사고의 특성이라고 합니다. 자아 중심성이 강한 이 시기에 어린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림자는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를 따라 다닌다고 생각하고,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것도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하늘이 눈을 만들어 보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모든 세상 사람이 심지어 강아지마저도 게임을 좋아할 것이라 착각합니다. 자아 중심성은 어린 아이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일종의 착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자아 중심성이 어릴 때 한시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인 정부에서는 고소득자들에게 증세하겠다고 했을 때, 여론조사에서 찬성 비율이 높게 나왔습니다. 당연합니다. 자기는 증세대상에서 빠지고, 부자들한테서 더 걷어 복지혜택을 늘리겠다는데, 거기에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현 정부는 반대로 조세 정책을 펴고 있는데, 여론조사에서 반대 비율이 높게 나왔습니다. 부자감세를 하면 서민의 세금부담이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내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와야 한다면 부담스러워 합니다. 건강한 소유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제 물건과 남의 물건을 엄격히 구분하고, 제 물건이 아닌 것에는 욕심을 내지 않으며, 노력을 통해서 얻은 정당한 가치만을 자신의 소유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는 가치 있는 물건이 무수하게 많은데, 소유로 보면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내 것이거나 남의 것입니다. 물론 내 것도 남의 것도 아닌 우리 것도 있긴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유를 ‘내 것’과 ‘남의 것’에 ‘우리 것’ 정도로 분류하는데, 거기다 한 가지를 추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임자 없는 것’입니다. 유치원 다니는 꼬마가 길을 걷다가, 땅에 떨어져 있는 1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놀란 꼬마가 “엄마, 저기 돈!” 하고 외칩니다. 그러자 엄마가 대답합니다. “뭐해, 빨리 줍지 않고.” 길에 떨어진 물건은 빨리 주어야 할 물건이 아닙니다. 그 떨어진 돈은 임자 없는 물건이 아니라, 임자가 있는데 잠시 잃어버린 돈입니다. 임자 없는 것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세상에 임자 없는 물건은 없습니다.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출 20: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탐내다보면 언젠가 죄를 짓게 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 결과 노년이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아간이 그랬습니다. 그 결과 아골골짜기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게하시가 그랬습니다. 그 결과 몸에 나병이 들었습니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까지 했습니다. 골 3: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 숭배의 근본적인 동기가, 탐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눅 12:15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왜 내 것과 남의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할까요? 탐심 때문입니다. 탐심은 물리쳐야 합니다. 문제는 이 탐심이 본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탐심은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어,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탐심은 때론 어떤 고상한 것으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선언합니다. 갈 5: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런데 우리 안에 여전히 탐심이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은혜 충만하면 잠깐 기절했다가, 은혜가 바닥나면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러니 신앙이 제자리에서 맴돕니다. 한 해 한 해 교회 다닌 햇수는 늘어가지만, 신앙의 깊이는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신앙은 교회 다닌 연수와 꼭 비례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말씀으로 기본기를 다졌느냐, 훈련으로 기술을 연마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거기에 인성을 따져야 하고, 열정 곧 헌신도도 따져야 합니다. 불행 중의 하나가 신앙의 정체입니다. 신앙이 자라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것에 대해 별로 답답해하지 않습니다. 괜히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만 답답하여 조바심이 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화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화요일에 종교지도자들과 몇 가지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주님은 종교지도자들이 걸어온 논쟁을 피하시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셨습니다.
15절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종교지도자들은 당시 가장 민감한 문제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얼마나 성가신 존재였는지 모릅니다. 저 변방 가버나움에서 소식이 들려와도 탐탁치 않은데 상경했습니다. 언젠가는 상경하리라 예상했지만, 막상 그 일이 닥치니 영 껄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로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며칠 있으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유월절입니다. 그러니 종교지도자들은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급히 모여 회의를 가졌습니다. 회의 의제는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거였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의 정적과도 힘을 합치기로 했습니다.
16절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헤롯 당원들은 세속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보통 때 같으면, 자리에 합석하는 것도 불편해 합니다. 도저히 한편이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라는 공동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뜻을 모았습니다. 한마음 한통속이 되었습니다. 주의 일을 위해서도 한 뜻이 되는 게 어렵습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도 한 마음이 되는 게 무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이 뜻이 척척 맞았고 손을 맞잡았습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순한 의도를 숨긴 채, 예수님한테 나아갔습니다. “선생님이여!” 그들은 공손했습니다. 예수님께 아주 깍듯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의아하게 했습니다. ‘야들이 왜 이러나,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지금껏 살아온 대로 앞으로도 삽니다.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말투 바꾼다고 속이 바뀐 게 아닙니다. 표정 바꾼다고 마음까지 바뀐 게 아닙니다.
예수님보다 곁에 있는 제자들이 더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몇 번 당해봤기 때문입니다. 몇 번 당하고 나면, 잔뜩 경계심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보통 때와는 달리 얼굴이 밝았습니다. 비록 속에는 비수를 품고 있지만, 겉으로는 웃음을 띠었습니다.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보통 찬사가 아닙니다. 누가 이 정도의 찬사를 받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한껏 띄웠습니다.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맘에도 없는 말을 해댔습니다. 물론 그들의 말은 사실입니다. 그들의 말 중에 틀린 말이 없습니다. 주님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신 분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의 말은 맞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봤습니다. 이렇게 믿고 따른다면 100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 목적으로, 그런 말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빤히 속을 들여다보시는 분한테, 그런 시커먼 속으로 나아오니, 예수님의 속도 불편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잠자코 듣고만 계셨습니다. 드디어 그들의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17절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당시 가장 민감한 세금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머리를 써서 짜낸 아이디어가 세금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세금 문제야말로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세금을 내는 것은 정상입니다. 국민은 납세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라는데 있습니다. 자기 나라 왕이 아닌, 로마 왕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하는 것입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거둘 때, 유대인들을 세리로 썼습니다. 그들은 일정한 세금을 걷어, 그중 일부를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착복했습니다. 그들은 인정사정이 없었습니다. 아니 인정사정 봐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세리들은 동족으로부터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세리 때문에라도 세금 문제는 더 민감했습니다. 열심당은 아예 대놓고 세금을 납부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유대인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갈릴리 사람 유다는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이방 왕들에게 세금을 바쳐 그를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가이사에 대한 납세의 적법성 문제는 계속하여 제기되었습니다. 힘없는 일반 백성들도, 어쩔 수 없어 세금을 내기는 하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은, 이런 민심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기도 그렇고, 내지 말라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자니, 열심당과 바리새인, 일반 백성들로부터 지탄받을 수 있습니다.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자니, 헤롯 당원과 사두개인들, 로마 총독으로부터 정치적인 문제에 걸릴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님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몰아놓고, 예수님의 입만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을 하느냐에 따라, 예수님은 자신의 말의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그 때 주님이 천천히 입을 여셨습니다.
18절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주님은 그들의 악함을 아셨습니다. 그들 속에 숨기고 있는 악함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상의를 통해,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 완벽한 계획을 짰고, 즉각 실행에 옮기는 중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의 작전대로 잘 되는 거 같았습니다. 천하의 예수도 이번에는 꼼짝없이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자기들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악함을 알고 있을 줄,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당황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쏘아보며 책망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누가 이 말을 듣고 기분 좋겠습니까?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들은 악함을 숨기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숨긴 악함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 속에 깊이 숨겨진 악함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에게 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번 속아 넘어가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그걸 모릅니다. 주님은 그런 민중을 불쌍히 여기셨지만, 지도자들은 그걸 이용해 먹었습니다. 그들이 민중들에게 써먹던 수법을, 이번에는 예수님께 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순간 그들은 뜨끔했습니다. 자신들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채는, 예수님 앞에 긴장이 됐습니다. 얼어붙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19절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님이 참 지혜로우십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 것만 같은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 한 마디에 분위기가 차분해졌습니다.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에 영문도 모른 채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은 데나리온을 손에 들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20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어린 아이들에게 만원짜리를 보여주며, 이 돈 속의 형상이 누구냐고 물으면 모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받는 사람들이 애들이 아닙니다. 배움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인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그걸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물어올 때, ‘옳거니, 제대로 걸려들었구나!’ 생각하고, 얼른 대답했는지도 모릅니다.
21절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아무튼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정답을 말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그들은 대답을 한 후에, 예수님의 입을 주시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 결정적인 단서를 잡을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기대를 채워주지 않고, 전혀 예상을 빗나가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 말씀은 너무나 당연하여, 대꾸할 여지가 없습니다. 너무나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고, 우리 것은 우리 것입니다. 자기 집 것은 자기 집 것이고, 교회 것은 교회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교회 것이 자기 것처럼 사용합니다. 사적인 것은 사적인 것이고, 공적인 것은 공적인 것입니다. 어차피 내 것이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럼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내 것이 아닌데 기어이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어떻게 그때는 안 들키고 무사히 넘어갔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게 드러나 그것에 발목을 잡힙니다. 한 나라의 장관이 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하지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사리사욕을 추구한 것이 드러나, 낙마할 것이다 했는데, 입 싹씻고 임명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내 것과 남의 것, 우리 것에, 한 가지가 더 있음을 압니다. 그 한 가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도 내 것, 네 것도 내 것, 우리 것도 내 것.’ 이건 놀부 심보요, 도둑 심보입니다.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고, 내 것과 우리 것을 구별하고,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그것 구별하지 못하면, 범죄자가 되거나 최소 비난받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직접적으로 세금을 뜻합니다. 국세와 지방세, 직접세, 간접세 뭐 그런 있잖습니까? 확실한 것은 세금은 안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버틴다고 면제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깎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운전하다보면 스티커를 끊기거나 카메라에 찍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다른 운전자가 블랙박스 영상을 경찰서에 제보하여, 단속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합니다. 그럼 범칙금 내지 과태료를 내야 합니다. 고지서를 받고는 바로 낼 수도 있고 미뤘다가 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전자에 속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바로 내려고 힘씁니다. 돈내는 것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어차피 내야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내 돈 될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모아놓으면 나중에 목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금 잘 내야 합니다. 세금 문제에 있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세금을 내는데 불법은 물론이고, 편법도 동원하면 안 됩니다. 생업을 열심히 감당하여, 최대의 이윤을 창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일하는 목적의 전부가 아닙니다. 세금내기 위한 것도 포함됩니다. 하나님께 헌금하기 위해서가 일번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눔이나 기부 같은 선행을 위한 것도 포함되면 좋겠습니다.
창세기 14장에, 아브람이 롯을 구하고 돌아오다가, 두 사람을 만난 얘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살렘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소돔왕 베라였습니다. 먼저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축복했습니다. 19-20절상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러자 아브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20절하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람은 자신이 기른 318명의 사병을 데리고 가서,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이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걸 자기 공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곧 하나님의 공로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각자의 몫이 따로 있습니다. 청지기 몫이 따로 있듯이, 주인 몫이 따로 있습니다. 주인 몫으로 정해진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아직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려면, 자기가 자기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현세 뿐 아니라 내세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누가 그럴 수 있습니까? 내세는 놔두고라도, 현세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일을 알 수 없는 인생입니다. 아니 오늘 몇 분 후의 일도 모르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핸들을 주인되신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풍파 많은 이 세상에서,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를 외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두 번째 사람을 만났습니다. 바로 소돔왕입니다.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얼마나 합리적인 제안이자 거래입니까? 아브람이 목숨 걸고 가서 구해 온 사람들은 소돔 백성입니다. 그러니 소돔 백성은 소돔왕에게 드리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은, 소돔왕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건 아브람이 갖는 게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소돔왕의 제안과 거래를 사양했습니다. 창 14:22-24절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자기 것과 남의 것을 깨끗하게 정리했다는 말입니다. 애초부터 자기 것이 아니었던 것에, 탐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내 것이 아닌 모든 것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드려야 할 헌금이든, 내야 할 세금이든, 갚아야 할 부채이든, 매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임자 없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했던 종교지도자들은, 흠칫 놀라며 살며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22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우리의 삶이 이렇게 깨끗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간관계, 물질관계가, 이렇게 깨끗하기를 바랍니다. 과거의 우리의 살아온 삶은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남은 삶은 우리를 흠 잡으러 왔다가, 도리어 부끄러워 물러갈 수밖에 없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그것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뛰어넘어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을 그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려라.”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그야말로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너희가 동전을 황제에게 바쳤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은 누구에게 바쳤느냐?” 오늘의 본문의 이야기는 결국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는가?”입니다. 물질이 사람을 부리는 주인이 될 수 없듯이, 정치권력도 사람을 부리는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듯이, 황제도 사람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되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우리 주님이 지금 이 순간 묻고 계시는 질문일 것입니다. “너희는 누구를 위해 사느냐?” 여러분, 여기에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나는 과연 나 자신을, 내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명확한 답을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나 자신의 명예를 위해, 나를 남들에게 내세우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심지어 내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남들에게 나 자신들 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닙니까?
이 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 천국갈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을, 내 생명을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 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교회 열심히 다녀봤자 뭐합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확신해야 합니다. 사람이 그리워서 우리는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뭔가를 해서 구원받으려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어 천국가야지, 죽어 지옥가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 온전히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며, 나 자신,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알몸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선물이며, 타인에게 받은 사랑이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몸도, 나의 마음도, 나의 뜻도, 나의 정성도, 나의 물질도, 나의 시간도, 나의 건강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으로, 우리 자신이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우리가 가야될 곳은 천국임을 항상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과 벌이는 논쟁 / 마 22:23-46
경상도 할마이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할매가 “어이, 예수가 죽었단다.”고 하자, 다른 할매가 “와 죽었다 카드노?”라고 물었습니다. “못에 찔려 죽었다 안카나”라고 대답하자, “어이구, 머리 풀어헤치고 다닐 때 알아봤다.”고 했습니다. 이때 암말 않던 할매가 “어이 예수가 누고?”라고 물었습니다. “몰라, 우리 며늘아가 아부지 아부지 캐쌌는거이 보이, 사돈 어른인갑지 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에 또 다른 할매가 “그래, 문상은 갔드나?”라고 묻자, “아니 안 갔다.” “왜 안 갔노?” “갈라 캤더니 사흘 만에 살아나따카드라.”고 하더랍니다. 이 유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두개인들과 예수님간의 소위 ‘부활논쟁’이라 불리는 기사입니다. 예수님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의 시점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고난주간 화요일에 되어진 일입니다.
논쟁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던 중, 헤라클레스가 사과처럼 생긴 것이 땅위에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부수려고 그 위에 발을 올려놓았습니다. 순간 그것은 아까보다 몇 배나 커졌습니다. 헤라클레스는 약이 올라서, 그것을 더욱 세게 밟고, 또 몽둥이로 내리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 커졌고, 마침내 길을 꽉 막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헤라클레스는 몽둥이를 내던지고, 놀란 채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아테네가 나타났습니다. “그만하면 됐어요. 이것은 싸움과 말다툼의 정신이지요. 도발하지 않는 한, 그것은 처음 모양으로 있지요. 그러나 더불어 싸우면 그건 한없이 불어난다오.”
십중팔구 논쟁은 논쟁하는 당사자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전보다 더 굳게 확신을 한 채 끝납니다. 당신은 논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진다면 지는 것이고, 이겨도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럼 당신이 논쟁의 상대방을 이겨서, 허점투성이인 그의 주장을 묵사발을 만든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당신은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그는 어떻습니까? 당신은 그가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는 당신의 승리에 분개할 것입니다.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논쟁을 피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방울뱀을 피하듯이 논쟁을 피해야 합니다. 논쟁에 대한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쟁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논쟁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논쟁의 성격상, 처음엔 명분 있는 토론으로 시작하였다가, 결론 없는 언쟁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지엽적인 논쟁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역사적인 실례가 있습니다. 과거 제정 러시아가 망할 때, 러시아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격렬한 신학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논쟁의 주제가 재미있습니다. 성직자의 옷단을 붉은색으로 할 것인가 황금색으로 할 것인가가 주제였습니다. 그들은 이 주제로 열흘 낮과 밤을 두고 논쟁을 벌였으나, 끝내 결론을 얻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여섯 명의 볼셰비키 운동가들이, 지하실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초안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혁명을 일으켜 소련을 휘어잡은 다음, 당시 러시아를 주름잡고 있던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을 잡아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진리 논쟁은 필요합니다. 본질 논쟁이라면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실생활에서 그 정도의 논쟁거리는 거의 없습니다. 대개 우리는 사소한 일로 논쟁합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상관없는 일로 논쟁합니다. 소모적인 논쟁에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하곤 합니다. 오죽 했으면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책이 나왔을까요?
고집 센 사람 하나와 똑똑한 사람 하나가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논쟁의 이유인 곧, 고집 센 사람은 4✕7=27이라 주장하고, 똑똑한 사람은 4✕7=28이라 주장했습니다. 이 논쟁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입니까? 답답한 나머지 똑똑한 사람이 고을 원님께 가자고 말하였고, 그 둘은 원님께 찾아가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고을 원님이 한심스런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뒤, 고집 센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4✕7=27이라고 말했느냐?”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 말을 듣고 고을 원님은 이렇게 판결했습니다.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곤장 열 대를 쳐라!” 고집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며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곤장을 맞아야 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곤장을 맞으면서, 원님께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원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4✕7=27이라고 우기는 그런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 한다.” 그 똑똑한 사람은 똑똑하기는 했지만 지혜가 없었던 것입니다.
23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어느 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은, 앞에서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과 일치했습니다. 질문은 달랐지만 질문한 의도는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서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이 찾아와, 세금 문제를 질문할 때 지혜롭게 답하셨습니다. 본래 바리새인들은 로마에 세금 납부를 반대했고, 헤롯 당원들은 찬성했습니다. 납세 반대파와 납세 찬성파가 함께 예수님을 찾아, 세금 납부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에, 단순하면서도 지혜롭게 답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은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들은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놀라움만 가득 안고 떠나갔습니다.
한 고비 넘겼는가 싶었는데, 또 다른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세금 문제로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했는데 실패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한테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저 이 세상 보이는 것에 대한 관심뿐이었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나라는 낯설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용납하면 자신들을 부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 둘레를 태양, 행성, 달이 공전한다는 천동설을 주장해온 사람이, 그와 정반대인 지동설을 용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있는 종교지도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그 중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 헤롯당원, 사두개인 등, 각자가 주장하는 바는 다르고 대립되기도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입장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공공의 적으로 여겼습니다. 사두개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바리새파와 가까웠습니다. 부활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사두개인들이 부활문제로 예수님과 논쟁하여 이기면, 예수님께 대한 승리를 넘어, 바리새인들에 대한 승리까지 쟁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기세 좋게 부활을 주제로 논쟁을 걸었습니다.
24-28절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형식은 질문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상 논쟁을 건 것입니다. 보면 다소 현실성은 떨어진 얘기입니다. 있을만한 것을 가지고 질문을 해야 하는데, 너무 논리적인 비약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부활을 믿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공격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우는 것은 율법에 있습니다. 신 25:5절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사두개인들은 이 율법과 부활문제를 연계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 율법을 적당히 이용한 셈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지키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상해 보이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꼭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논쟁거리가 아닌 순종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논쟁거리로 이용했습니다. 논쟁을 통해 말씀이신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했습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말씀은 자신을 살립니다. 더 나아가 말씀은 타인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타인을 죽이는데 쓰고 있습니다. 사실 사두개인들은 한 여자가 일곱 번 결혼하여, 부활 때에 누구 아내가 되는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부활 자체를 안 믿기 때문입니다. 부활도 안 믿는 사람들이, 그 이후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오직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려는 목적을 위해, 자신들의 신앙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뻔히 그들의 시커먼 속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지만,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조용히 설명을 하셨습니다.
29-3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한 마디로 그들이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논쟁이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모든 다툼은 오해에서 시작됩니다. 오해란 이해의 부족입니다.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데서 오해가 생깁니다. 오해는 잘못 들음에서 생깁니다. 잘 듣기만 했어도 오해가 없었습니다. 오해는 짐작과 추측에서 생깁니다. 자기 직감을 믿고, 지레짐작하고, 나름대로 추측하면, 오해 안 생기는 게 이상합니다.
아빠가 보기에 애가 늘 늦게 들어오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언성을 높여 “너는 왜 허구한 날 늦게 들어오냐?” 애도 지지 않고 “내가 언제 늦게 들어온다고 그래.” “야, 너 거의 늦게 들어왔잖아?” “월요일은 이런 사정으로, 화요일은 저런 사정으로, 수요일은 그런 사정으로, 목요일은 일찍 들어왔고, 오늘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늦었는데.” 막상 들어보면 다 사정이 있습니다. 그쯤 되면 언성 높인 사람이 머쓱해집니다. 저도 살면서 목소리 높여서, 이문 얻은 적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럼에도 가끔씩 목소리가 올라가곤 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자신들이 성경에 대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그토록 무지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처럼 용감하게 부활에 대한 논쟁을 걸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배움에 목마른 사람은, 논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통하여, 상대방을 꺾어보겠다는 승부근성에서 논쟁이 생깁니다. 보면 꼭 싸움닭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일단 싸우고 보겠다는듯이 달려듭니다. 그런 사람은 멀리해야 합니다. 괜히 그와 논쟁에 말려들었다간, 자칫 낭패를 보게 됩니다. 논쟁은 피하고 봐야 합니다. 논쟁의 내용이 말씀일지라도, 신앙적인 내용일지라도, 영적인 내용일지라도 그렇습니다. 이단을 제외하고는 논쟁을 피해야 합니다. 이단과 논쟁하는 것도, 어쩌면 피하는 게 나을 수 있습니다. 논쟁해서 이겨봤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이긴다고 그들이 무릎 꿇고 항복하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더 센 사람 데려옵니다. 이단에 대해 알고는 있되, 이단 붙들고 논쟁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가깝습니다. 그걸 진리 수호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할 필요 없습니다. 자기 일 바빠 보세요. 그럴 시간 있습니까? 자기가 믿는 방식만 옳다고 여길 때, 논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신앙에도 나름 색깔이 있습니다. 자기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신앙 색깔이, 어느 정도는 맞아야 합니다. 너무 다르면 서로 힘듭니다.
논쟁하면 교회가 힘 빠집니다. 교회가 힘을 모아야 영적 전투를 치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체 논쟁하다 힘을 빼버리면, 정작 영적 전투에서 힘을 쓰지 못합니다. 마귀는 그걸 노립니다. 그래서 하나 되지 못하게 합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분리하고 분쟁하게 만듭니다. 그럼 아군 적군 구별이 모호해집니다. 우리의 대적이 마귀라는 것을 순간 잊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논쟁은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인 셈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엡 4: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어떤 사람이 성령의 사람입니까? 하나 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분리하고 나누고 쪼개고 찢는 사람은,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도 성령의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과 사두개인들 간의 부활 논쟁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더 깊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헤롯당원들과 공동 작전을 펴서, 세금 문제로 예수님을 공격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을 때, 사두개인들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 있게 부활 카드를 꺼내, 예수님을 공격했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무지만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 역시 쾌재를 불렀습니다.
34-36절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재미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무식한 사두개인들 같으니라고.” 속이 다 후련했습니다. 이번에는 바리새인들 중, 보다 전문성을 가진 율법사가 나섰습니다. 율법사는 율법을 필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에 대해 능통한 율법 박사들입니다. 율법학교에서 율법을 전공한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율법학교 근처에도 못 가봤습니다. 정식 학교에서 율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쉽지 않은 싸움입니다. 율법사는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러나 정중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내가 좀 배운 사람인데’ 하는 거만함이 깔려 있습니다. 사람이 배웠을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좀 안다고 가르치려들고, 공부 좀 했다고 가방끈 자랑하면, 내색은 하지 않아도 속으론 싫어합니다. 겸손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모두가 좋아합니다. 하나님도 인격적인 분이기에, 그런 사람을 좋아하실 거 같습니다. 논쟁과 무관한 사람이 있습니다. 겸손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율법에 대해 능통했던 율법사들은, 예수님을 한 수 아래로 여기며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사실 이런 질문이 답하기 어렵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율법에 613개의 계명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 말라”는 부정형 계명이 365개이고, “하라”는 긍정형 계명이 248개라는 것입니다. 이 613개 중에 10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10가지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에서 613가지가 나왔습니다. 문제는 십계명에서 가장 큰 계명을 뽑는 것입니다. 제1계명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제 10계명이라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37-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십계명을 둘로 요약하셨습니다. 누가 봐도 논쟁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쉐마를 알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쉐마를 배우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쉐마의 앞부분이 이렇습니다. 신 6:4-5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나름대로 요약 정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쉐마에 없는 내용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이 단순히 쉐마를 앵무새처럼 읊으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둘째에 대해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 사랑을, 순서상 하나님 사랑에 이은 둘째라고 하셨지만, 그건 경중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연결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하고,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잘못 답을 하셨다면, 논쟁을 걸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너무나 완벽한 답을 듣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다분히 실력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빼어난 율법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대답에 더 이상 논쟁을 걸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실력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실력이 형편없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됩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실력이 뒤처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종교가 달라도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논쟁을 없애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실력으로 논쟁을 잠재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쉬운데, 그보다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도 최선을 다해 최고를, 생업 활동을 할 때도 최선을 다해 최고를,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최선을 다해 최고를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바리새인들은 아무 말을 못했고, 이번에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41-46절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예수님이 질문한 내용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그건 너무 뻔한 질문입니다. 애들도 다 대답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너무나 뻔한 질문이지만 대답을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이, 그것에 문제 제기를 하셨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는데,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모여 있는 바리새인들은, 그래도 한 실력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논쟁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인데, 보통 실력자들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고, 더 이상 질문도 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그 후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맞습니다. 우리를 거둬주십시오” 했습니까? 그랬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의 중심이 예수님이십니다. 역사의 중심이 예수님이십니다. 주전과 주후를 예수님의 탄생하신 것을 기점으로 삼은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세상의 중심이십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중심이십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다윗의 후손이 아니십니다. 다윗이 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주인, 우주의 주인,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역사는 마침표를 찍게 될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긴, 다르게 생긴, 못생긴 오리새끼가 있습니다. 미운오리새끼라고 놀렸는데 알고보니 백조였습니다. 거지 왕자란 동화를 보면 볼품 없는 거지, 천한 거지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장차 왕위를 이어 받으실 왕자님이셨습니다. 춘향전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행색이 초라한 거지 같은 이몽령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남루한 행색을 보고 모두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산천초목이 떤다는 마패를 가지고 있는 암행어사였습니다. 예수님! 고운 모양도 없고, 풍체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나의 구주이십니다.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이십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 교회에 성도 한 분이 의류를 만들어 수출하시는 분이십니다. 와이셔츠 한 장 만드는데 5천원 쯤 듭니다. 여기에 50원짜리 라벨을 붙이는데, 명품 라벨을 붙이면 백화점 2층 매장에서 10만원에 팔리고, 보통 라벨을 붙이면 일반 상점에서 2만원에 팔린답니다. 똑같은 와이셔츠입니다. 명품 라벨이 붙으며 명품이 되고, 보통 라벨이 붙으면 보통 물건이 됩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인생은 같습니다. 돈이 약간 더 있고, 권세가 약간 더 있고의 아주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든 인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가치가 가지고 있는 돈과 권세로 결정된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약간의 편리함의 차이입니다.
라벨에 따라 명품이 되고 짝퉁이 되는 것처럼,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인정하는 인생은 영원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 인정 받지 못하는 인생은, 저주와 심판과 멸망의 자리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존재의 이유는? 예수님이십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저주와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 해 놓으시고, 나와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제는 사나 죽으나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보여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나만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삶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살면서, 이 땅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 제자, 선한 청지기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자로 섬기다가, 주님 오라하실 때, 기쁨으로 나아가 영생과 평강을 맛보는 성도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