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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 선출직 제14대 오경린 감독회장과 연회 감독들
1980년 10월 29일 오후 2시 기독교대한감리회 제14회 총회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1980년은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자치적으로 총회를 조직한지 50년이 되는 의미 깊은 해이다. 10월 30일에는 총회 창립 50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으며 1회 총회와 1회 연합 연회 생존 회원들에게 메달증정과 원로목사를 위하여 헌금했다. 다음날 10월 31일은 새로 조직된 5개 연회에서 각각 감독선거를 했으며 서울연회 감독에는 오경린 목사가, 중부연회 감독에는 최기석 목사가, 동부연회 감독에는 윤춘병 목사가, 남부연회 감독으로 노상준 목사가, 삼남연회 감독으로 최상봉 목사가 선출되었다.또한 감독회를 이끌고 실질적인 감리교를 대표할 감독회장을 선출함에 따라 서울연회 오경린 감독이 총 투표수 416표 가운데 229표를 얻어 감독회장에 선출됨으로써 선출된 감독회장이 이끄는 다원제 감리교회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오경린(吳慶麟, 호 飛岩) 감독회장은 1914년 9월 2일에 평안남도 진남포시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그의 나이 7세 되던 1920년에 부친을 여의고 8세인 1921년부터 남포중앙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이경선 담임목사에게 신앙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였고 청소년 시절부터 민족과 농촌 사랑의 뜻과 꿈을 품게 되었다. 1932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동경동양상업학교, 1939년 일본대학 사회과를 졸업하고 귀국 후에는 서울 감리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였다. 이듬해 1942년 민족 사랑과 농촌사랑의 꿈을 가지고 황해도 연백군 백천읍에서 농촌복음학교를 설립하여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백천교회에서 목회도 겸임했다.
1949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한으로 내려와 전적으로 목회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충남 예산읍의 예산감리교회에 첫 목회를 시작했다. 오경린 전도사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에 남한에서 목회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1950년 목사 안수 받고 예산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오경린 어려운 농촌의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믿음과 기도의 본을 보이며 목회에 헌신했다. 이때 30여 명을 신학교에 보내는 등 지도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60년에 서울로 올라와서 1982년까지 동대문교회에 목회하였다. 1977년에는 감리교 신학교 이사, 1980년에 기독교대한감리회 제1대 서울연회 감독 겸 감독회장에 당선되었다. 그해 협성대학교 이사, NCC 재단이사로 활동하였으며 1982년에는 부활절연합예배 대회장, 한국기독교백주년사업협의회 공동의장,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대표회장을 맡았다. 오경린 감독은 제15회 총회(1982년 10월 27일~29일, 정동제일교회 개최)와 제1회 서울연회(1981년 3월 3일~5일, 정동제일교회 개최)와 제2회 서울연회(1981년 3월 23일~25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개최하였다. 제14회 총회 특별총회(1981년 4월 28일~29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 1982년~1983년까지 기독교지도자협의회 대표회장을 역임했다. 1985년 서울연회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 1985년~1992년까지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로 일하면서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2007년 11월 17일에 향년 94의 일기로 별세했다. ‘진실한 사람’이란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오경린 감독은 아내 손계옥 사모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오인철 장로, 오인호 목사, 오인자 장로, 오인화 권사)를 두었다.
최기석(崔基奭, 호 起石) 감독은 1926년 5월 5일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 강령리 218번지에서 태어났다. 1949년 성결교 서울신학교를 졸업하고 강화 오상교회부터 목회를 시작하여 1951년 강화 흥천교회를 담임하던 중 1954년 중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6년 3월 부천제일교회에 부임하여 1997년까지 은퇴할 때까지 담임하였다. 1966년에는 단기 선교사 경험도 하고 1971년에 시작한 부천시기독교 연합회장을 4회에 걸쳐 활동하였다. 1972년부터 1978년까지 한국 기독교 구라회 회장을 역임, 1973년부터 6년 동안 감리교 속회공과 집필위원으로 일했다. 1974년에 이화여자대학교 다락방 전도 협회 부회장, 1975년에는 인천북지방 감리사, 1977년부터 안산전문대학 이사, 1980년에는 부천제일교회 안에 성서신학원을 설립하고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80년 중부연회 제15대 감독으로 당선되어 연회를 이끌었다. 최기석 감독은 제40회 중부연회(1981년 3월 11일~13일, 숭의교회 개최)와 제41회 중부연회(1982년 3월 24일~26일, 화도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1982년에는 학교법인 배재학당 재단이사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재단 이사로 1986년까지 역임했다. 1983년에는 한국선교대회 대회장을 맡았으며, 1986년에는 한국 기독교 청소년 선도회 이사장으로 일했다. 1992년에는 부천 생명의 전화 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1997년 3월 중부연회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최기석 감독은 이정애 사모와 결혼하여‘무언 겸비 사랑’이란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을 함께 살다가 2013년 2월 25일 향년 88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2002년 1월 속회부문 감독회장상을 수상하였으며 저소로는 「미래를 보는 눈」, 「동트는 새벽을 향해」, 「속회운영과 교육」,「교회기념문집」이 있다.
윤춘병(尹春炳) 감독은 1918년 9얼 27일(음 8.23)에 평안남도 중화군 양정면 대신리 120번지에서 아버지 윤극순(尹極淳)과 어머니 최주숙(崔周淑) 슬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7세인 1922년 중하군 중화면 정특리 외가 마을로 이사하여 중화군 동두면 채송리 장로교회에서 신앙 생활한 아버지를 따라서 주일학교를 다녔다. 중화읍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 경의소학교(儆義小學校)에 입학했다. 1930년 가을 평양에 이주하여 장대현교회에 출석하여 사립 숭덕학교(崇德小學校)로 전학하여 그 학교에서 졸업하였다. 1932년 3월 창과산교회에서 소년 면려회장,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는데 창광산교회는 그의 아버지가 이희섭 목사와 같이 설립하고 장로가 된 교회다. 1937년 가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가 전도사 직첩을 받은 석양교회를 다니면서 주일학교 교사, 찬양대에서 봉사했다. 이듬해 1938년 평양요한신학교에 입학하여 1943년에 본과 3학년 연구과 3학년을 졸업하고 만주로 도피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여 11월에 전영택 목사와 동행하여 월남하고 성탄절을 서울에서 보내게 되었다. 1948년 조선신학교 3년 재학 중에 병을 얻어 휴학하였으며 이 시기에 중앙신학교를 졸업했다. 1948년 8월에 김응태(金應泰) 목사의 소개로 천안지방 박만춘(朴萬春) 감리사의 파송을 받고 월랑교회 서리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1950년 중부연회 준회원 허입했다. 이때 곽철영 김지길 전도사도 허입했다. 1951년 4월 한국전쟁이 한창 일 때 1.4후퇴로 남한으로 내려온 권용희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52년 천안 성실학교 파송받고 시무했으며 1953년 중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해 천안기독교병원 이사, 도립충남후생원 이사로 취임했다.
1956년 3월에 연회 정회원에 허입하고 신철원교회를 시작으로 1960년 가산교회, 밀양교회에서 목회했다. 1963년 4월에 서산읍교회와 서산지방 감리사를 역임했고 남부연회 과정고시위원 및 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일본 기독교 초청으로 기독교교육연구회와 일본기독교교사(목사) 연수회(제17기)에 참가했다. 1967년 삼남선교연회 연회장에 취임하고 총리원 이사, 한미협력위원회 재정위원, 진우원 이사장,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원, 장로회부산신학교 강사로 활동하였다. 1971년 5월에 제주 서귀포교회를 담임하고 제주지방 감리사, 총리원 이사를 역임했다. 제주대학교 농과대학 기독학생회 지도목사, 서귀포 다방교회 운영, 제주 어린이집 원장으로 활동했다.
1974년 의정부제일교회를 담임하고 서울성동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78년 12월에 원주제일교회 담임하고 이때 세계일주 시 영국 존 웨슬리 사적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동부연회 과정고시위원을 맡아서 열심히 일했다. 1980년 동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어 감리교본부 선교국위원장, 감리교신학대학 이사, 한국찬송가위원회 부위원장, 강원도경찰국교경협의회 회장으로 일했다. 감독 재임 시 윤춘병 감독은 제32회 동부연회(1981년 3월 17일~19일, 원주제일교회 개최)와 제33회 동부연회(1982년 3월 22일~24일, 청주제일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윤춘병 감독은 연회 지도 방침을 정하여 연회를 운영 원칙을 세웠다. 첫째, 모든 교역자와 신도가 인화 단결한다. 둘째, 농어촌과 광산지대를 가진 강릉지역에 특수목회를 개발 지도한다. 셋째, 기복 신앙에서 벗어나 섬기는 신앙으로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지도 육성한다. 넷째, 교직자의 질적 향상에 힘쓰므로 교인들의 신앙을 건전하게 한다. 다섯째, 5천 교회 100만 신도 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연회 내 교회 설립에 주력한다.
1984년 윤춘병 감독은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 원주 동부신학교 강사, 강원도 경찰국 교경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감리교신학대학 강사로 활동할 때 윤춘병 감독은 한국감리교사학회 회장을 맡아서 감리교 역사에 연구에 온몸을 바쳤다. 1986년 윤춘병 감독은 3월에 동부연회에서 정년 은퇴하고 제1대 감리교신학대학 역사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하여 본격적으로 감리교 역사 연구에 매진했다. 이때 평생 수집한 역사자료 2만여 점을 감신대 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자료들은 1885년부터 해방 시기까지의 각 교단 잡지와 신문, 그리고 해방이후 교계 잡지 등이다. 그 후에도 교회 자료 수집 차 일본, 미국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역사 자료를 수집하며 한국감리교회 역사 자료 발굴과 연구에 온몸을 불살랐다. 무엇보다 윤춘병 감독은 감리교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기념비적 사업을 남기었다. 본인이 소장했던 감리교 역사를 생생하게 담은 자료인 「조선그리스도인회보」, 「신학월보」, 「기독교조선감리회연회록」, 「조선감리회보」, 「한국찬송가전집」 외 다수의 영인본 간행사업을 추진하여 전국의 감리교 목사들과 후배 역사학자들에게 역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의 자료 발굴의 열정은 지칠 줄 몰랐다. 1989년 제2차 자료 수집 차 미국 드류대학교, 달라스의 남감리교대학교(SMU), 오하이오주의 웨슬리안대학교, 일본국회도서관, 아오야마대학을 방문하여 한국감리교 역사 자료 수집에 힘을 쏟았다. 이 공로를 인정받고 1990년 한국감리교 자치 60주년을 맞이하여 감리교 자치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로부터 공로 표창을 받았다. 1993년 7월 원주 치악산 밑으로 이사하여 협성대학교 신학대학 강사로 활동하고 1996년 12월~1997년 2월 교포들의 자료수집 차 멕시코시티 메리다니회 지방을 순회하며 역사 자료 수집과 연구에 노년의 열정을 불태웠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자료관장으로 있으면서 역사 집필에 매진하며 살다가 2010년 10월 17일에 향년 92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감신대 웨슬리채플에서 장례예배가 진행되었으며 장지는 1994년 먼저 별세하여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선영에 있는 아내 곁에 안장되었다.
“뜻은 높게, 생활은 겸손하게”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윤춘병 감독은 아내 권용희와 결혼하여 슬하에 4딸을 두었다. 그의 저서는 다수의 역작들이 많다. 주로 역사와 관련되어 감리교 역사의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여기에서는 그 중에 중요한 저서만 소개하겠다. 「원주제일교회 80년사」, 「팔일오 이후 서부연회 수난사」, 「한국감리교회 외국인 선교사」,「동대문교회 백년사」, 「한국감리교회주일학교사화」,「전덕기목사와 민족운동」, 「한국감리교교회성장사」, 「수난시대 목회자 이진구 목사」, 「한국감리회 남선교회 동부연회 활동사」, 「중부연회 70년사」, 「자교교회 백년사」, 「한국감리교회 부흥운동사」, 「강릉중앙교회 백년사」, 「여주중앙교회 백년사」, 「평양요한학교 이교신 교장」, 「한국기독교신문잡지 백년사 1권, 2권」, 「한국감리교수난백년사(개정판)」, 「교회와 교육」, 「한국감리교출판문화연구」있다. 그 외에도 신문과 기관지에 기고한 글들은 헤아릴 길이 없이 다수의 글들이 있다. 1998년에는 그이 팔순 생일을 맞이하여 윤춘병 감독의 팔순과 성역 4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후배들이 논문을 기고한 논총(論叢)인 「韓國監理敎會와 歷史」가 출판되었다.
노상준(魯商俊) 감독은 1913년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영천리 132번지에서 태어났다. 1932년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원산성경학교를 졸업했다. 1940년부터 문천 당우리교회에서 목회를 시작으로 1942~1944년 영흥 왕장교회, 1944~1946년 고원 산곡교회, 1948~1953년 인천 영흥교회, 1953~1955년 인천 박촌교회(현계암교회)를 담임했다. 박촌교회에서 목회할 때인 1954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1955년 노상준 목사는 여주 장호원교회로 파송받고 부임했다. 그런데 이때가 호헌파로 인해 감리교회 내홍이 격화되었던 시기였다. 호헌파는 법을 수호하는 모임이라는 뜻을 가진 정치 서클이었다. 이는 1954년 3월 총회에서 류형기 감독의 재선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목회자들로 인해 시작된 것이다. 장정에 의하면 류 감독은 감독 자격에 결격 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감독에 당선 된 것은 법을 어긴 처사라고 생각하고 별도의 조직을 가지고 세를 규합하였다. 이들은 법에 따라서 감독이 선임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호헌파라고 이름 하여 모임을 결성하였다. 장호원교회는 해방 후 복흥파에 속했던 교회였고 호헌파에 가담한 목회자들은 대부분 충청권에 속하여 장호원교회도 자연스럽게 호헌파 교회가 되었다. 장호원교회에는 이미 총리원 측(성화파)에서 구성서 목사를 파송한 상태였다. 호헌파로 입장이 바뀐 교회 측에서는 구성서 목사에게 주택을 비워달라고 요청하였고 동시에 호헌파에는 목회자를 파송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구성서 목사는 주택을 비워주자 호헌파에서는 노상준 목사를 파송하여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고 교회는 호헌파 분열의 내홍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결국 1958년 류형기 감독의 임기가 끝나고 이환신 감독이 선출되면서 분열이 잠잠해졌을 시기인 1958년까지 노상준 목사는 장호원교회에서 목회했다.
이후 노상준 목사는 1958~1960년 천안 성환교회, 1969~1962년 천안 조치원교회, 1962~1968년 부여교회를 담임하였고 이때 1967년에 공주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68~1980년 천안 조치원교회, 1980~1983년 광천교회를 담임하였고 이때 1980년 남부연회 감독에 추대되었다. 노상준 감독은 제27회 남부연회(1981년 3월 31일~4월 2일, 대전제일교회 개최)와 제28회 남부연회(1982년 3월 24일~26일, 대전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감독을 마치고 1983년 남부연회에서 은퇴하였다.
최상봉 감독은 1919년 평남에서 출생했다. 평양 성화신학교를 졸업한 후 진남포 지방 유사리교회, 전북지방 계화교회, 1955년 전남지방 여수동산교회에서 목회 했다. 1971년에 2번째 부임한 전북지방 전주제일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1980년에 삼남연회 초대 감독에 당선되었다. 1980년 12월 15일에 감리교 재단본부 지원으로 부산시 중구 부평동 4가 43-2번지에 연회 사무실을 마련하고 연회 시무식을 거행하여 본격적인 삼남연회 시대를 열었다. 최상봉 감독은 제1회 삼남연회(1981년 4월 1일~3일, 부산시온중앙교회 개최)와 제2회 삼남연회(1982년 3월 30일~4월 1일, 전주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제14회 총회 감독회는 곧 다가올 감리교 선교 100주년 준비를 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다. 이에 1981년 4월에 특별총회를 개최하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규약’을 제정했다. 이 회의 목적은 1981년부터 1985년까지 기독교대한감리회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하여 실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주 내용은 ① 5천 교회 100만 신도운동 ② 100주년 기념행사 ③ 기념건물 건립 ④ 감리교회의 기반을 정립하는 각종 문서사업 ⑤ 100주년 기념 해외 선교사 파송이었다. 명실상부 한국 감리회가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의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차근히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