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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Cannibal Capitalism: How our System is Devouring Democracy, Care, and the Planet and What We Can Do About It.(2022)
낸시 프레이저 지음,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23.
21세기에 사회주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나는 제1장에서 ‘자본주의’가 돌아왔다고 지적하며 이 책을 시작했다. 그러니 ‘사회주의’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하며 책을 끝맺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 역시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일컫는 탁월한 이름으로 역사 속에서 오래 사용된 덕택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복귀했다. C로 시작하는 단어가 공적 담론에 복귀한 것이 현재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파열 상태를 반영한다면, S로 시작하는 단어가 다시 부상한 것 역시 전혀 놀랄 일이 못 된다.261
어쨌든 ‘사회주의’도 돌아왔다! 수십 년 동안 이 말은 골칫거리, 그러니까 경멸의 대상이 된 실패이자 지나간 시절의 유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적어도 미합중국에서는 그렇다. 오늘날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같은 미국 정치가들은 자랑스럽게 이 표식을 달며 지지를 얻고 있고, 미국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같은 조직들에는 신입 회원이 쇄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비록 환영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이 말을 향한 열정이 자동으로 그 내용에 관한 진지한 성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사회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 의미해야 하는가?261-262
앞 장들에서 전개한 논의가 이에 관해 한 가지 답을 제시한다.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사회주의에 관해서도 확장된 인식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무엇보다도 일단 우리가 자본주의를 단지 경제로만 바라보는 관점을 폐기한다면, 사회주의 역시 더는 대안적인 경제 시스템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자본이 상품 생산의 ‘비-경제적’ 기둥을 놓고 제 살 깎아먹기를 하도록 생겨먹었다면, 이에 대한 바람직한 대안 역시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만드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필수사항(내가 전적으로 지지하는)에 더해, 생산이 이뤄질 수 있게 하는 배경조건과 생산 사이의 관계 또한 변혁해야 한다.262-263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조건이란 곧 사회적 재생산, 공적 권력, 비인간 자연, 그리고 자본주의의 공식 회로 바깥에 있으면서도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부의 형태들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는 자본의 임금노동 착취뿐 아니라 무급 돌봄 활동, 공적 권력, 인종화된 주체로부터 수탈된 부, 비인간 자연에 대한 자본의 무임승차도 극복해야만 한다.263
이 논점을 통해 우리 논의에는 처음부터 단서 조항이 하나 붙게 된다. 사회주의 사상의 확장이란 단지 동심원을 추가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단순히 기존의 통념에 더 많은 특징을 부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 앞 장들에서 내가 자본주의를 놓고 벌인 작업이다. 나는 흔히 부차적이라 여겨지곤 하는 사안들(무엇보다 젠더⋅섹슈얼리티, 인종⋅제국, 생태계, 민주주의)을 자본주의에 구조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다루었다. 이제 이 장에서는 사회주의를 놓고 같은 작업을 하려 한다.263
나의 목표는 사회주의 역시 하나의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재인식하는 것이며, 이렇게 포괄적이어야만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믿을 만한 대안이라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나는 사회주의 사상의 많은 고전적 기본 주제에도 새로운 빛을 비추고 싶다. 가령 지배와 해방, 계급과 위기, 소유⋅시장⋅계획, 필수노동⋅자유시간⋅사회적 잉여가 그런 주제들이다. 일단 사회주의 역시 경제를 넘어서는 것으로 바라보게 되면, 이 주제들 모두 전과는 다른 외양을 띠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소련식 공산주의나 사회민주주의와 명확히 구별되는 사회주의,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윤곽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263-264
하지만 사회주의 논의에서 필수적 출발점인 자본주의를 재론하며 논의를 시작해야겠다. 무엇보다 사회주의는 ‘단순한 당위’나 유토피아적 꿈이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사회주의를 토론할 가치가 있다면, 이는 오히려 사회주의가 역사 속에서 출현하는 현실적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를 통해) 손이 닿을락 말락 하는 지점까지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아직 실현되지는 못한 인간의 자유, 좋은 삶, 행복의 잠재력 같은 것 말이다.264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곤경과 불의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주기적으로 촉발하는(그러나 시원히 극복하지 못하는) 교착 상태에 대한 대응이고, 자본주의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고 있는(그래서 그 안에서는 결코 근절될 수 없는) 지배 형태에 대한 대응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질병을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리고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을까?264-265
그래서 다시, 자본주의란 정확히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은 앞 장들의 논의를 다시 요약함으로써 간략하게 짚고 넘어갈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를 존립할 수 있게 하는 네 가지 비-경제적 조건을 포함하는 하나의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서 자본주의를 재인식했다. 그 조건의 첫 번째는 제2장에서 상술한 대로, 주로 토지, 천연자원, 종속적인 무급·저임금 노동에 바탕을 두고 피정복민(특히 인종화된 인민)으로부터 수탈한 부의 거대한 적립이다. 사실상 강제로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 부는 자본이 대가를 거의 혹은 전혀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무상이거나 저렴한 생산 투입물을 꾸준히 제공하는 샘물 노릇을 한다. 이는 (이중으로) 자유로운 임금노동을 비롯한 다른 투입요소들과 혼합되는데, 임금노동의 재생산 비용은 (원칙적으로는) 자본이 지불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축적의 진정한 비밀은 이러한 착취와 수탈의 결합이다. 예속민의 수탈이 없었다면 자유로운 노동자를 착취해도 수익성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은 수탈을 통해 얻은 부에 의존하면서도 이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회피하며, 이를 보충하기 위한 비용도 지불하길 거부한다.265-266
자본주의 경제의 두 번째 비-경제적 전제조건에 관해서는 제 3장에서 설명했다. 대개 여성이 수행하는 사회적 재생산에 투입되는 무급·저임금 노동의 꽤 큰 적립이 그것이다. 인간 존재를 ‘만드는’ 이러한 돌봄 활동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생산이라 칭하는 활동, 즉 이윤을 내기 위해 사물을 만드는 활동에 필수 불가결하다. 재생산 활동이 없다면 ‘노동자’도 없고 ‘노동력’도 없으며, 필수노동이나 잉여노동도, 착취나 잉여가치도, 이윤이나 자본 축적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자본은 돌봄 활동에 가치를 부여하더라도 아주 미미하게만 값을 매기며, 그 보충에는 무관심하고 가능한 한 비용 지불을 피하려 한다.266
제4장에서 검토한 자본주의 경제의 세 번째 비-경제적 전제 조건은 비인간 자연에서 비롯된 무상이거나 매우 저렴한 투입물의 거대한 적립이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물적 토대를 공급한다. 즉 노동을 통해 변형되는 원자재, 기계의 동력원이 되는 에너지, 신체의 동력원이 되는 식량, 그리고 일군의 환경적 필요조건이다. 이를테면 경작 가능한 토지, 숨 쉬기 적당한 공기, 마실 수 있는 물, 지구 대기의 탄소 순환 용량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투입요소와 필요조건이 없다면 경제적 생산자도 없고 사회적 재생산자도 없으며, 수탈할 부나 착취할 노동도, 자본이나 자본가 계급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자본은 자연을, 무한히 자유롭게 스스로를 도울 수 있고 따라서 보충하거나 수선할 필요가 없는, 길 가다 주운 지갑 취급을 한다.266-267
자본주의 경제의 마지막 네 번째 전제조건은 국가와 여타 공적 권력이 제공하는 공공재의 거대한 구현체다. 제5장에서 봤듯이, 여기에는 법률 질서, 억압 기구, 인프라, 화폐 공급, 시스템 위기를 관리하는 메커니즘이 포함된다. 이런 공공재와 이를 책임지는 공적 권력이 없다면 사회 질서도, 신용도, 재산도, 교환도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지속적인 축적 역시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본은 공적 권력에 원한을 품는 경향이 있으며, 공적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과세를 회피하려고 애쓴다.267
이 네 가지 조건은 모두 자본주의 경제의 필수 불가결한 기둥이다. 각각에는 저마다 사회관계, 사회적 행위, 사회적 부가 장착되며, 이들 모두는 축적의 필수조건을 이룬다. 자본주의의 공식적 제도(임금노동, 생산, 교환, 금융) 이면에는 이런 공식 제도에 꼭 필요한 기둥과 이 제도를 존립할 수 있게 하는 조건들, 즉 가족·공동체·자연, 영토국가·정치조직·시민사회, 그리고 특히 다양한 형태와 엄청난 규모의 무급 피수탈 노동이 버티고 있다. 이 조건들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필수적인 요소이자 또한 구성적 요소이기도 하다.267-268
자본이 책임을 저버린 이러한 배경조건들을 식별함으로써 우리는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애초의 물음에 비정통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는 경제가 아니라 사회의 한 유형이다. 이 사회에서는 경제화된 행위 및 관계의 무대가 다른 비-경제화된 영역들과 분리돼 그 바깥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경제화된 영역은 비-경제화된 영역들에 의존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은 나 몰라라 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정치’ 혹은 정치적 질서(에 의존하면서도)와 구별되는 ‘경제’, ‘사회적 재생산’ 영역(에 의존하면서도)과 구별되는 ‘경제적 생산’의 무대, 무책임하게 내버려진 수탈 관계(에 의존하면서도)와 구별되는 착취 관계의 조합, 비인간 자연의 물적 토대(에 의존하면서도)와 구별되는 인간 행위의 사회역사적 영역이다.268
이런 시각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통상의 편협한 자본주의관 대신 새롭고 확장된 자본주의관을 얻게 된다. 이 전환은 사회주의를 다시 상상한다는 프로젝트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잘못된 게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변혁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확장한다.268
자본주의에서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가
협소한 자본주의관을 지닌 비판가들은 자본주의가 세 가지 중대한 잘못을 범했다고 본다. 불의, 비합리성, 부자유가 그것이다.
첫째, 그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핵심 불의가, 자유롭지만 무자산 상태인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의 착취라 규정한다. 노동자는 많은 시간을 보상 없이 일하며, 엄청난 부를 생산하면서도 자기 지분이 전혀 없다. 이익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 계급에게 흘러들어가며, 자본가는 노동자의 잉여노동과 그것이 발생시킨 잉여가치를 전유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이 지시하는 그들 고유의 목적, 즉 더 많은 축적을 위해 이를 다시 투자한다. 더 큰 틀에서는 이로써 자본이 끝없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여 자본의 생산자인 바로 그 노동자를 지배하는 적대적 권력으로 부상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것이 협소한 자본주의관에 따라 정의된 핵심 불의, 즉 생산 지점에서 벌어지는 임금노동의 계급적 착취다. 그리고 그 장소는 자본주의 경제, 더 구체적으로는 경제적 생산 영역이다.269
둘째로, 협소한 자본주의관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주된 비합리성은 경제 위기로 나아가는 내적 경향이다. 영리기업이 사적으로 전유한 잉여가치의 무한 축적을 지향하는 경제 시스템은 본래 스스로를 불안정에 빠뜨리지 않을 수 없다. 기술 향상으로 생산성을 증대시켜 자본을 확장하려는 충동은 이윤율의 주기적 하락, 상품의 과잉 생산, 자본의 과잉 축적을 초래한다. 금융화와 같은 교정책은 심판의 날을 뒤로 미루기만 할 뿐이며, 오히려 다가올 심판이 훨씬 더 혹독해지도록 만든다.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발전 과정은 주기적 경제 위기로 중단되곤 한다. 즉 경기 순환, 주식시장 폭락, 금융 패닉, 연쇄 부도, 가치의 대규모 청산, 대량 실업 등이다.269-270
마지막으로, 협소한 자본주의관은 자본주의가 심층적이고도 구성적인 측면에서 반민주주의적이라 주장한다. 물론 자본주의는 정치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약속하곤 한다. 하지만 이 약속은 한편으로는 사회 불평등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허물어진다. 게다가 자본주의에서 작업장은 민주적 자치가 이뤄지는 척조차 하지 않는다. 이곳은 자본이 명령을 내리면 노동자는 복종해야 하는 구역이다.270
즉, 협소한 자본주의관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세 가지 주된 잘못의 원인이라고 본다. 계급 착취라는 의미에서 불의, 경제 위기를 초래하는 게 본성이라는 의미에서 비합리성, 사회 불평등과 계급 권력에 의해 민주주의가 허물어진다는 의미에서 부자유가 그것이다. 어쨌든 곤경은 자본주의 경제의 내적 역학에서 발생한다. 즉 협소한 자본주의관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잘못은 자본주의의 경제 조직화에 있다.270-271
이 그림은 잘못됐다기보다는 불완전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내적인 경제적 질병은 올바로 잡아내지만, 자본주의의 또 다른 구성적 요소인 광범한 비-경제적 불의, 비합리성, 부자유를 명부에 올리지는 못한다. 반면에 확장된 ‘식인’ 자본주의관을 받아들이면, 이런 잘못들이 선명히 눈에 들어오게 된다.271
첫째, 식인 자본주의관은 더 확장된 불의의 목록을 공개한다. 불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경제 안에만 자리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와 그 경제를 존립할 수 있게 해주는 비-경제적 조건들 사이의 관계에도 뿌리내리고 있다.271
대표적인 사례가 경제적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의 분할이다. 경제적 생산의 경우는 필요노동시간에 대해 현금 급여로 보상하지만, 사회적 재생산의 경우는 무급 혹은 저임금 노동으로 마치 자연처럼 취급하거나 값싼 감정으로 포장하고 사랑으로 어느 정도 보수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긴다. 역사 속에서 젠더화된 이 분할은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에 중대한 지배 형태를 깊이 박아놓았는데, 여성의 종속과 젠더 이분법, 이성애 규범성이 그것이다.271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는 (이중으로) 자유로운 노동자와 종속적 ‘타자’의 구조적 분할을 제도화한다. 전자는 자신의 노동력과 재생산 비용을 교환할 수 있는 데 반해, 후자는 그 인격·토지·노동이 손쉽게 정복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 분할은 전 지구적 분할선과도 일치한다. 이는 착취‘만’ 당하는 이들을 전적인 피수탈자와 구별함으로써, 피수탈자를 본래부터 불가침하지 않은 존재로 인종화한다. 그 결과 인종적 억압, 제국주의(구식이든 신식이든), 선주민에 대한 박탈, 인종 학살 등의 광범한 구조적 불의가 굳게 자리 잡는다.271-272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 존재와 비인간 자연의 선명한 분할을 제도화하며, 이에 따라 둘은 더 이상 동일한 존재론적 우주에 속하지 않게 된다. 수도꼭지와 하수구로 전락한 비인간 자연은 야만적 추출주의와 도구화에 노출된다. 이것이 ‘자연’에 대한(혹은 비인간 동물에 대한) 불의가 아니라면, 적어도 더욱더 거주 불가능해지는 지구에 남겨진 인류의 현존 세대와 미래 세대에게는 분명 불의다.272
즉,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계급 착취를 포함하면서도 이를 훨씬 넘어서는 구조적 불의의 확장된 목록을 눈앞에 드러내 보여준다. 따라서 사회주의적 대안이라면 이런 또 다른 불의 역시 치유해야만 한다. 경제적 생산의 조직화‘만’을 변혁하는 게 아니라, 경제적 생산이 사회적 재생산과 맺는 관계, 젠더·성적 질서와 맺는 관계가지 변혁해야만 한다. 또한 자본이 자연에 무임승차하고 예속민의 부에 대한 수탈에 무임승차하는 것을 종식시키면서, 더불어 인종·제국주의적 억압 역시 끝내야 한다. 요컨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불의에 대한 치유책이 되려면, 자본주의 경제‘만’이 아니라 제도화된 질서 전체, 즉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어야만 한다.272-273
이것이 다가 아니다.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자본주의의 ‘위기’라 이해되는 바(두 번째 잘못인 비합리성)에 관한 우리의 관점 역시 넓힌다.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에 내장된 것을 훨씬 넘어선 몇 가지 내적인 자기 불안정화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273
첫째, 사회적 재생산을 놓고 제 살을 깎아먹음으로써 돌봄 위기를 부채질하는 체계적 경향이다. 자본이 자신이 기대는 무급 돌봄 활동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려고 하는 한, 이 활동의 주된 제공자인 가족, 공동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에게 주기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가하게 된다. 금융화된 현재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는 오늘날 바로 이런 위기를 발생시키는데, 예를 들어 사회서비스의 공적 제공을 감축하길 요구하면서 동시에 여성을 포함해 전반적으로 각 가정마다 유급 노동시간을 늘리길 요구한다.273
둘째,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생태 위기를 초래하는 내적 경향 역시 눈에 잘 띄게 만든다. 자본은 비인간 자연에서 취하는 투입물에 대해 실질적인 대체원가replacement costs 따위는 결코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토양을 고갈시키고, 바다를 더럽히며, 탄소를 흡수하는 숲에 침범하고, 지구의 탄소 순환 용량을 훨씬 넘어서는 탄소를 배출한다. 자본은 천연자원의 덕을 보면서도 이를 보충하거나 수선하는 비용은 나 몰라라 하기 때문에, 자연의 인간적 구성요소와 비인간적 구성요소 사이의 물질대사적 상호작용을 주기적으로 불안정에 빠뜨린다. 오늘날 우리는 그 후과와 격돌하고 있다. 지구를 태워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절대로 ‘인류’가 아니며, 바로 자본주의다.273-274
*[저자주] 대체원가-자산을 재조달하는 데 소요되는 원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산과 동일한 자산을 시장에서 구입할 때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다.
셋째, 사회-재생산과 생태의 위기를 낳는 자본주의의 경향은 인종화된 인민으로부터 부를 수탈하려는 자본주의의 구성적 필요성과 분리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자본은 강탈한 땅, 강제 노동, 약탈한 광물에 의존하며, 유독성 폐기물의 쓰레기 처리장으로서 인종화된 지역에 기대고, 점점 더 전 지구적 돌봄 사슬로 조직되는 돌봄 활동의 공급자로서 인종화된 인민에 기댄다. 그 결과 경제적⋅생태적⋅사회적 위기는 제국주의와 인종적⋅민족적 적대감과 한데 뒤엉킨다. 신자유주의는 이 대목에서도 위험을 고조시킨다.274
마지막으로,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정치 위기로 나아가는 자본부의의 구조적 경향을 드러낸다. 이 경우에도 자본은 공공재에 기생해 살면서도 그 비용은 지불하려 하지 않는 양다리 걸치기를 한다. 조세를 회피하고 국가 규제를 약화시킬 만반의 태세를 갖춘 자본은 자신이 기대는 바로 그 공적 권력을 빈껍데기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금융화된 현재 형태의 자본주의는 이 게임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거대 기업은 영토에 매여 있는 공적 권력을 한참 앞질렀고, 글로벌 금융은 자신에게 맞서는 선거 결과를 무효로 만들거나 반자본주의 정부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방식으로 국가를 훈육한다. 그 결과는 거버넌스의 심각한 위기다. 지구 곳곳의 인민대중이 기성 정당과 신자유주의적 상식에 등을 돌림에 따라 현재 이 위기는 헤게모니의 위기까지 동반하며 전개되고 있다.274-275
즉,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자본주의가 경제적인 것을 훨씬 넘어서는 다양한 위기 경향들을 장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 5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는 이런 다양한 위기 경향들을 ‘영역 간’ 모순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칼 폴라니(와 제임스 오코너James O’Connor)를 따른다. 이 영역 간 모순은 자본주의 경제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비-경제적 배경조건들을 분리하면서도 동시에 연결하는 접합부에 고정돼 있다. 앞 장들에서 설명한 네 가지 D의 논리에 사로잡힌 자본은 자신의 전제 자체를 침식하거나 파괴하거나 고갈시키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불안정에 빠뜨리는 내적 경향이 있다. 우로보로스처럼 자본은 자기 꼬리를 먹는다. 제 살 깎아먹기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잘못 중 일부다. 따라서 이는 사회주의가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275-276
결국 민주주의의 결핍은 자본주의에 내장된 숙명이다. 이 세 번째 잘못(부자유) 역시 우리가 이 사회 시스템에 관해 확장된 관점을 취할 경우 훨씬 더 크게 드러난다. 문제는 단지 작업 현장에서 사장이 명령을 내린다는 것만이 아니다. 또한 정치 영역에서 민주적 목소리를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위장이 경제 불평등과 계급 권력 탓에 우스워지는 것만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정치 영역이 처음부터 심하게 모서리가 잘려 있다는 점 역시 위의 문제들만큼이나 중대하다. 사실 경제/정치 분할은 민주적 의사결정의 범위를 사전에 심각하게 축소한다. 생산이 사기업에 내맡겨지면, 제4장에서 살펴봤듯이, 우리가 자연과 맺는 관계, 지구의 운명과 맺는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우리 자신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을 어떻게 할당할지, 우리의 필요를 어떻게 해석하고 충족할지, 그래서 결국 우리의 일과 일 바깥의 삶이 어떤 모양을 띨지를 결정하는 것도 자본가 계급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경제/정치 결합체는 자본가에게는 사회의 잉여를 사적으로 전유할 백지 위임장을 써줌으로써, 사회 발전 과정의 틀을 짜고 그리하여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을 부여한다.276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모든 쟁점들은 정치 의제에서 사전에 배제된다. 축적 극대화에 광분하는 투자자가 우리 등 뒤에서 이를 결정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자체만 놓고 제 살 깎아먹는 짓을 벌이는 게 아니라 우리도 그 식탁에 올려놓는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함께 결정할 집단적 자유를 게걸스레 먹어 치우면서 말이다. 이런 형태의 제 살 깎아먹기를 극복하려면, 사회주의는 현재의 참담한 한계를 훨씬 뛰어넘어 민주적인 정치적 자치의 범위를 확장해야만 한다.276-277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모든 잘못들을 치유하려면, 이는 매우 벅찬 과업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계급 지배‘만’이 아니라 젠더와 성, 인종적·민족적·제국주의적 억압, 정치적 지배의 전반적인 불균형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창안해야 한다. 또한 경제·금융 위기‘만’이 아니라 생태·사회·재생산·정치 위기를 낳는 경향들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위기경향들의 제도적 기반을 해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는 사전에 ‘정치’ 영역이라고 정의된 범위 안에서 의사결정을 민주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관할범위를 광대하게 확장해야 한다. 더 근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는 그 정의定義와 구획, 바로 그 틀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점이다.277-278
이런 방식으로 규정할 경우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재검토는 매우 거대한 작업이 된다. 만약 그 작업을 완수한다면(엄청난 가정법이지만), 이는 사회적 투쟁을 통해 획득한 통찰이 강령적 사고와 정치조직과 만나 시너지를 일으키는 식으로, 운동가와 이론가를 아우르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결합한 결과일 것이다. 이 과정에 기여하길 바라며 나는 짤막한 성찰의 세 가지 보따리를 풀어놓고 싶다. 그 목적은 앞의 논의들이 어떻게 사회주의 사상의 몇 가지 고전적인 기본 주제에 새로운 빛을 비추는지 보여주려는 데 있다.278
첫 번째는 제도적 경계선들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본 대로, 이 경계선들은 자본주의의 제도적 분리, 즉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 착취와 수탈의 분리,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인간 사회와 비인간 자연의 분리에서 발생한다. 이 분리들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위기의 장소가 되고, 투쟁의 판돈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따라서 사회주의자에게는 사회 각 영역들이 내적으로 어떻게 조직돼 있는가라는 물음 못지않게, 이 영역들이 과연 서로 분리되면서 동시에 연결돼 있는가, 그렇다면 그 방식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중요하다. 사회주의자는 경제라는 우물 안 조직에만 일면적으로 집중하기보다는(자연, 가족,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경제를 존립할 수 있게 하는 배경조건들(사회적 재생산, 비인간 자연, 자본화되지 않은 형태의 부, 공적 권력)과 경제가 맺는 관계를 사고할 필요가 있다. 만약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모든 제도화된 형태의 불의, 비합리성, 부자유를 극복하려 한다면, 생산과 재생산, 사회와 자연,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를 다시 상상해야만 한다.278-279
요점은 사회주의자가 이 분할들을 단번에 청산하길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의 구분을 폐지하려 한 소비에트의 재앙적인 시도야말로, 청산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 경고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제도적 경계선들을 다시 상상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최소한 우리의 목표는 이 경계선들을 다시 그음으로써, 자본주의가 ‘경제적’인 것과 관련지은 긴급한 사안들을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279
또한 우리는 그 경계선들이 더 유연해지고 상호 침투하도록 성격을 바꾸는 것에 관해서도 숙고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경계선들이 나누는 다양한 영역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대립과 적대가 아닌 방식으로 반응하게 만들 수 있을지를 반드시 풀어내야 한다. 물론 사회주의 사회라면 생산에 부여한 것들을 자연, 공적 권력, 사회적 재생산에서 박탈하는 제로섬 게임을 제도화한 자본주의의 경향을 극복해야만 한다.279-280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영역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재의 우선순위를 뒤집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정치⋅생태적 재생산의 지상명령을, 축적을 위해 설계된 상품 생산의 지상명령에 복속시킨다. 사회주의자는 이 뒤집힌 것을 바로 돌려놓아야 한다. 즉 사람들의 양육, 자연의 보호, 민주적 자치를 사회의 최우선 사항으로 놓고, 이것들이 효율성과 성장을 압도하게 해야 한다. 요컨대 사회주의는 자본이 책임을 회피하며 배경 취급하는 사항들을 똑바로 전경으로 끄집어내야 한다.280
마지막으로,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는 제도 설계 과정을 민주화해야 한다. 이는 사회적 영역들의 설계와 범위를 결정하는 일을 정치적 문제로 만든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가 우리를 위해 우리 등 뒤에서 결정해온 것을 이제는 우리가 집단적인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법률 이론가들이 ‘영역 재설정redomaining’이라 부르는 것, 즉 사회의 무대들을 구획하고 각 무대 안에 무엇을 포함시킬지 결정하는 경계선의 재설정에 우리 스스로 참여해야 한다. 이 과정은 ‘메타정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정치 공간(일차적 정치)을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영역 재설정’의 정치적 과정(이차적 정치)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어떤 사안을 정치적인 문제로 다룰 것인지, 어떤 정치적 무대에서 다룰 것인지를 스스로 정치적으로 결정할 것이다.280-281
하지만 진정으로 민주적이라면, 사회주의의 영역 재설정은 정의로워야 한다. 이것의 의미 중 몇 가지는 이미 분명하다. 첫째, 의사결정은 적절히 포괄적이어야 한다. 즉 숙고하는 모든 사안에 대해, 그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지배를 받는 모든 이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자격을 지녀야 한다. 더하여, 참여의 조건이 평등해야 한다. 즉 비록 민주주의 안에서 개인 간에 어떤 구조적 우열이 계속 존재하더라도 참여의 권리와 기회는 동등해야 한다.281
그러나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지침이 되어야 할, 익숙하지 않은 생각이 하나 더 있다. 나는 이것을 ‘내는 만큼 받는,pay as you go’원칙이라 칭하겠다. 온갖 형태의 무임승차와 이른바 원시 축적을 피하면서, 21세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참으로 냉혹하게 망쳐버린 저 모든 생산의 전제조건들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 사회는 생산과 재생산 과정에서 소모하는 모든 부를 보충하거나 수선 혹은 대체하는 과업을 떠맡아야 한다.281
첫째로, 사회주의 사회는 상품을 생산하는 활동뿐 아니라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사람들을 유지시켜주는 돌봄 활동 등)도 보충해야 한다. 더하여, ‘바깥에서’ 즉 비인간 자연뿐 ㅇ아니라 주변부 민중과 사회로부터 취하는 모든 부를 대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다른 필요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기댈 언덕이 되는 정치적 역량과 공공재를 보충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유인책을 주며 장려하는 동시에 책임을 회피하는 자본주의적 무임승차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단서 조항은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병인 세대 간 불의를 극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를 준수함으로써만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다양한 위기 경향과 비합리성을 해체할 수 있다.281-282
이를 통해 우리는 ‘잉여’라는, 사회주의의 고전적 문제에 관한 두 번째 성찰로 나아가게 된다. 만약 잉여라는 게 있다면 이는 어쨌든 사회가 현재 수준에서 현재 형태로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만큼보다 더 많이 집단적으로 발생시킨 부의 적립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는 자본가 계급의 사적 소유로 취급되며 소유주에 의해 처분되는데, 자본주의 시스템은 끊임없이 더 많이 무한 생산한다는 기대 아래 소유주가 이를 재투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는 정의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불안정에 빠뜨린다.282
사회주의 사회는 사회적 잉여에 대한 통제를 민주화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집단적 의사결정을 통해 바로, 현존하는 초과 역량과 자원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미래에 얼마나 많은 초과 역량을 생산하길 바라는지, 지구 가열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실로 잉여를 생산하길 정말 바라는지를 결정함으로써 잉여를 민주적으로 할당해야 한다. 이로써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 고착된 성장 지상명령의 제도적 토대를 해체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요즘 일부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탈성장을 제도화하여 고정된 대항 지상명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성장의 물음(어떻게든 성장이 필요하다면 얼마나, 어떤 종류로,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서)을 정치적 문제로 다루고, 기후과학의 정보에 바탕을 둔 다차원적 성찰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는 이런 문제 일체를 민주적 결정 과정의 대상이 되는 정치적 문제로 다뤄야 한다.282-283
잉여는 시간으로도 사고될 수 있다. 즉, 잉여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하고 우리가 소모한 것을 보충하는 데 필요한 활동 이후에도 남는 시간, 그러니까 자유시간이 될 수도 있었던 시간이라 볼 수 있다. 자유시간을 향한 기대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적 자유의 모든 고전적 내용에서 중심축이었다. 하지만 미래 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에서 자유시간이 엄습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서 물려받을 엄청난 부도어음에 있다. 자본주의가 생산성을 자랑하며 으스대기는 하지만, 그리고 마르크스도 이를 잉여를 생산하는 실질적인 엔진으로 간주하기는 했지만, 나는 이런 주장을 의심한다.283
문제는 마르크스가 잉여를 꽤 협소하게 계산했다는 점이다. 그는 잉여를, 임금 노동자가 자기 생활비용을 충당하기에 충분한 가치를 생산한 뒤에 자본이 임금 노동자에게서 취하는, 보상되지 않은 노동시간으로만 계산했다. 반면에 그는 자본이 여전히 자기 재생산 비용은 책임지지 않은 채 수탈하고 전유하는 다양한 무상의 선물과 값싼 물품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러한 비용을 우리의 계산에 합산하면 어떻게 될까? 자본이 무급 재생산 활동에 생태계의 수선과 보충에, 인종화된 민중에게서 수탈한 부에, 그리고 공공재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럴 경우 자본이 실제로 생산하는 잉여가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이는 가정법에 따른 질문이다. 미래 사회주의 사회가 이 물음에 정확히 어떻게 대답할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끔찍한 계산서를 물려받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284
사회주의 사회는 또한 보건, 주거, 영양가 있는(그리고 맛도 좋은)음식, 교육, 교통 등 지구 전역에 걸쳐 충족되지 못한 막대한 인간적 필요가 기재된 끔찍한 계산서도 물려받을 것이다. 이것들 역시 잉여를 투자할 때는 합산되지 않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항들이다. 세계 경제를 탈탄소화한다는 긴급하고도 엄청난 과업,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 임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잉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확장된 자본주의관과 사회주의관을 따를 경우에는 전혀 다른 외양을 띠게 된다.284-285
사회이론 작업의 세 번째 주요 주제, 즉 사회주의 사회에서 ‘시장’이 맡을 역할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쟁점의 경우 식인 자본주의 개념의 함의는 간단한 공식으로 압축할 수 있다. 최상층과 기층에는 시장이 없지만 그 중간에는 어느 정도 시장이 있을 수 있다는 공식이 그것이다. 무슨 뜻일까?285
‘최상층’이란 말로 내가 뜻하는 바는 사회적 잉여의 할당이다. 할당해야 할 사회적 잉여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사회 전체의 집단적 부라 간주해야 한다. 어떤 사적 개인도, 회사도, 국가도 이를 소유하거나 일방적으로 처분할 권리를 지닐 수 없다. 진정으로 집단적인 재산이라면, 잉여는 집단적인 의사결정 과정과 계획을 통해 할당되어야 한다. 이 경우 계획은 민주적으로 조직될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래야 한다. 이 수준에서는 시장 메커니즘이 어떠한 역할도 해서는 안 된다. 최상층을 규정하는 규칙은 시장도 아니고 사적 소유도 아니다.285
내가 기본적 필요의 수준이라는 뜻에서 사용하는 ‘기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본적 필요에는 주거, 의복, 음식, 교육, 보건, 교통, 통신, 에너지, 여가, 깨끗한 물, 숨 쉬기에 적당한 공기 등이 포함된다. 물론 정확히 무엇을 기본적 필요로 파악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를 만족시키려면 정확히 무엇이 필요한지를 단번에 특정할 수는 없는 게 사실이다. 이 역시 민주적 토론과 쟁투, 의사결정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이 기본적 필요로 결정되든, 이는 지불 능력을 원칙으로 삼는 게 아니라 권리의 차원에서 제공되어야 한다. 즉, 이러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생산하는 사용가치가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대신 이는 공공재가 되어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해 부언하자면, 각자 기본적 필요를 충족할 물품을 사라고 사람들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보편적(혹은 무조건적) 기본소득 방안의 핵심적인 결점은 기본적 필요의 만족을 상품을 통해 해결하려는 데 있다. 사회주의 사회라면 공공재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의 기층에서는 시장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285-286
즉, 기층에도 최상층에도 시장은 없다. 그러나 그 중간은 그럼 어떻까? 사회주의자는 중간층을 다양한 가능성의 혼합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상상해야 한다. 시장이 협동조합, 커먼즈, 자주적 결사체, 자주관리 프로젝트와 공존하며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말이다. 시장에 대한 많은 전통적 사회주의의 반대는 내가 여기에서 구상하는 맥락에서는 해소되거나 완화될 것이다. 시장의 작동이 사회적 잉여에 대한 사적 전유와 자본 축적의 역학에 의해 왜곡되지도, 이런 역학에 흡수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최상층과 기층이 사회화⋅탈상품화된다면, 중간층에서 시장이 맡는 기능과 역할도 변형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정확히 어떻게 될지 구체적으로 말하기 힘들지라도, 이 명제만큼은 더 없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286-287
21세기를 위한 확장된 사회주의관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이런 수많은 불명확한 지점들에 관해 성찰하고 해명해야 한다. 여기에서 내가 윤곽을 제시한 관점은 분명히 부분적이고 시론적이다. 가장 긴급하며 관련성이 높은 물음 가운데 일부만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솔직히 가설에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날 사회주의가 무엇을 뜻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장점이 있음을 증명했길 바란다.287
그 장점 중 하나는 통상적 사회주의관의 경제주의를 극복할 가능성이다. 또 다른 장점은 전통적 노동운동의 중심 주제를 넘어선 광범위한 당면 쟁점들, 즉 사회적 재생산, 구조적 인종주의, 제국주의, 탈민주주의화, 지구 온난화 같은 쟁점에 대해 사회주의가 시의성을 지님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세 번째 장점은 제도적 경계선들, 사회적 잉여, 시장의 역할 같은 사회주의 사상의 몇 가지 고전적 기본 주제들에 새로운 빛을 비출 수 있다는 것이다.287
무엇보다도 나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더없이 중요한 사실을 드러냈길 바란다. 그것은, 21세기에도 사회주의 프로젝트는 추구할 값어치가 있다는 것, ‘사회주의’는 단순한 현학적 전문용어나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현재 지구를 파괴하면서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사람답게 살 기회를 좌절시키는 시스템에 대한 진정한 대안의 이름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287-288
첫댓글 열공 응원합니다
열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