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를 위한 미래
THE FUTURE WE WANT(2016)
바스카 순카라ㆍ세라 레너드 엮음, 황성원 옮김, 동녘 2017.
작다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팀 바커Tim Barker
자칭 진보 인사인 언론인 노나 윌리스 아로노위츠Nona Willis Aronowitz는 《굿Good》에 기고한 글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새로운 사회운동은 불황에 관심을 갖는다고 밝혔다. “우리 모두는 길거리 음식 운동을 위해 떨쳐 일어나야 한다.” 시의 법령 때문에 위협받는 거리 노점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로노위츠는 길거리 음식이 몸에 좋지 않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발 빠르게 인정한다. 그리고 아로노위츠의 생각에는 워낙 가격이 싸다 보니 노점 소유주는 직원에게 관대한 수당을 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길거리 음식 노점을 그렇게까지 싸고돌아야 하는가? 아로노위츠에 따르면 그건 “기업형 패스트푸드 유인 소매가격이면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후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길거리 노점에서 파는 팔라펠을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자주 먹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로노위츠가 어떤 마음에서 이런 주장을 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경영학 이론의 영향이 물씬 느껴지는 표현(‘유인 소매가격’이 대체 뭐란 말인가?) 속의 무언가가 날 그냥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아로노위츠의 주인공 중 한 명, 가족의 연줄로 창업 자본 수만 달러를 확보할 수 있었던 햇병아리 코넬대학교 졸업생이 자신의 음식 노점에서 “정기적으로 이윤을 내기” 시작할 때 박수갈채를 보내야 마땅할 것이다. 이 새로운 “운동”의 영웅들은 어째서 신예 자본가가 되었는가? 해당 사업이 작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답이 없다. (끔찍한 직종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모든 젊은이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익숙한) 경영진과 노동자 간의 갈등은 분명 해당 기업의 크기에 좌우된다.218-219
이는 보기 드문 관점이 아니다. 소기업은 “국가로서 우리의 정체성에 핵심적”이라고 말한 버락 오바마에서부터, 소기업은 “여러분이 싸워서 쟁취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주장과 함께 사파티스타의 선전 선동문 번역 글의 분량을 늘리고 있는 급진적인 세븐 스토리스 프레스(Seven Stories Press: 미국 독립 출판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이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많은 좌파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소기업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현상, 그것도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들은 자본주의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대기업이나 법인을 비판한다.219-220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기업의 규모를 미덕의 기준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분노의 대상으로 더 적합한 것은 더 적은 사람을 고용하고 노동계급 고객들에게 더 높은 가격을 내게 하며 직원들에게 더 적은 임금을 주는(혹은 종종 일을 거들어주는 젊은 가족 구성원에게는 돈을 한 푼도 주지 않는) 동네 구멍가게가 아닌 월마트 같은 다국적 기업이다. ‘길거리 음식 운동’은 이미 소기업에 해당하기 때문에, 아무리 건강에 좋지 못한 음식을 파는 저임금 업종이라 해도 우리는 그 오합지졸 같은 기업가들을 위해 투쟁해야 마땅하다.
소기업 숭배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소기업 예찬론은 집중의 장점을 무시한다. 큰 회사는 효율성에 중점을 두는 경영자에 의해 운영되고 인사부를 따로 둘 능력이 되기 때문에 시민권, 수당, 작업장 안전 문제에 있어서 소기업보다 월등히 우월한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그것은 대자본가가 덕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기업은 매일 급변하는 시장의 변동성에서 상대적으로 영향을 적게 받고 법률 담당 직원들을 넉넉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에 동네 구멍가게보다는 연방 규정에 더 쉽게 맞출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조를 조직하기도 더 유리하다. 소기업들은 이윤을 더 적게 내면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시장 압력에 특히 취약하고 비용 절감(특히 인건비 절감)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노조 조직을 통해 가장 큰 성과를 얻은 곳은 디트로이트의 리버 루지River Rouge 같은 이런 중앙 집중형 공장들인데, 이런 곳에서는 거대한 규모와 독과점적인 이윤 때문에 과감하게 노동자 처우 개선안을 들이밀고 경영 유연화를 시행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소기업들은 미국 경제가 적은 자원과 적은 노동시간으로 많은 사회적 부를 창출할 수 있게 해준 생산성 향상을 일으키지 못한다. 소기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기업이 대기업에 비해 훨씬 많은 수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하지만, 소기업 부문은 워낙 변동성이 높아서 많은 일자리가 금세 사라지기 때문에 순 영향을 미미하다. 미국 인구 조사국Census Bureau이 발간한 한 보고서에 따르면, “요컨대 순 일자리 창출은 (…) 업체의 규모와는 그 어떤 강력하거나 단순한 관계가 없다.”220-221
진보주의자들이 소기업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미국의 경제생활이라는 넓은 흐름에서 소기업의 존재감이 워낙 미미하다 보니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맥락에서 소기업은 큰 기업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여러분이 예치금으로 지역 기업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지역 신협에 돈을 맡겼다고 가정해보자. 규모가 작든 크든 은행은 여러분의 돈을 투자해서 수익을 내는 게 목적이다. 하지만 은행이 수중에 가진 모든 돈을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익성 있는 벤처기업은 그렇게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돈은 체이스 같은 큰 은행으로 넘어가고, 거기서부터는 어디든 갈 수도, 그러니까 기업 매수자들에게 돈을 대줄 수도, 환경 재난을 유발하는 해외 확대에 자금을 지원할 수도, 노조 조직자들을 살해하는 기업을 지원할 수도 있다.
소기업 신화의 가장 날카로운 좌파 비판가 중 하나인 더그 헨우드Doug Henwood는 최근의 경제 위기가 시작되던 시기에 쓴 글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의구심에 무게를 더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브루클린 지역에서 시티은행과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지역적인” 대안을 찾던 헨우드는, 한 곳은 미국 정부에 자산을 너무 많이 투자하고 다른 한 곳은 뉴욕 외곽 자치구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돈을 대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소기업들도 이런 은행의 사례와 별로 다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돈을 최고의 수익을 찾아 떠도는 전 세계적 사냥에 예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지역 구매의 많은 환경상의 장점을 훼손시킨다. 심지어 급진적인 환경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동네 서점에서 책을 사는 게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것보다 정말로 더 나은지는 논쟁거리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소기업을 유지하려면 대부분의 물건들을 배나 트럭에 싣고 운반해야 하고 물론 이렇게 운반된 물건들은 (십중팔구 석탄을 태워 얻은 전기로 가동되는) 에어컨과 조명이 있는 가게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세계 자본주의는 촘촘하고 복잡한 그물망과 같다. 어디서 구입하든 간에 진정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상품은 거의 없다.222-223
둘째, 소기업 숭배는 대단히 문제 있는 인간 성취 이데올로기를 지지한다. 이는 진정한 성취는 재산과 사람의 소유와 통제를 통해 달성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시에 통제당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힘을 갖게 되는 과정의 중요성을 부정한다. 소기업 숭배는 문제를 소기업 대 대기업의 문제로 설정함으로써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의 자리를 노동자가 아닌 경영자들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아무리 과장하지 않으려 해도 소기업가들은 진보 집단에서 특히 믿을 수 없는 부류다. 뉴욕 시의 대학가에서 작은 서점을 소유하고 있는 크리스 되블린의 예를 들어보자.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반즈 앤 노블Barnes&Noble이 운영하는 대학서점 대신 되블린의 지역 서점을 이용할 것을 권장했고, 소기업 이상에 대한 이런 교수들의 충성 덕분에 작은 서점은 살아남았다.223-234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역 독립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 건 본질적으로 좋은 일”이라며 앞장서서 전도하는 되블린은 오랫동안 직원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임금 절도와 의료 보장 혜택에 대한 불만이 노조를 통해 폭주하듯 밀어닥치자 되블린은 “빚지지 않으려면 급여를 깎을 수밖에 없다”고 《콜롬비아 데일리 스펙테이터Columbia Daily Spectator》에 잘라 말했다. 심지어 되블린은 자신이 노조를 박살내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이야기했는데 그건 금전적 동기만은 아니었다. “노조는 그의 사업에 재정적인 제약을 가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엄청난 권리 의식을 갖게 한다.” 이 말은 소름이 끼치긴 하지만 “지역 독립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 건 본질적으로 좋은 일”이라는 말이 계급 구분 너머로 확장되지는 못함을 정확하게 상기시킨다.
무엇보다 되블린의 직접적인 증언은 소기업 소유주들이 갖고 있는 잔혹한 개인주의적 정서를 드러낸다. 그는 “내가 지금 같은 방식으로 사업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월마트 가서 쇼핑하세요”하고 말한다. 그는 사회정의나 환경적인 수사보다는 기업들을 지배하고 있는 경쟁의식에 호소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비범한 개인적 재능에 의지해 살아가는 봉건영주로 여기기 때문에, 작업장을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정당하게 여긴다. 이런 사람들에게 노조는 노동자들의 진정한 이익은 자애롭고 긴 안목을 가진 소유주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음을 노동자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여 분열을 조장하는 대상일 뿐인지 모른다. 노조에 가입하려는 노동자의 욕망도 말도 안 되는 “권리 의식”(이는 배은망덕한 가신을 비난할 때 영주가 사용할 법한 표현이다)으로 비춰진다.224-225
이 같은 태도는 한 번의 일화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에서 판매 활동을 하는 업체들은 자신들이 전국적으로 사고하고 활동할 능력을 상당히 갖추었음을 증명해왔다. 회원이 수십만 명이라고 주장하는 소기업 로비 단체 전국 자영업자 연맹National Federation of Independent Business을 생각해보자. 전국 자영업자 연맹은 자체적인 정치활동위원회의 PAC에서 걷은 돈의 95퍼센트를 공화당에게 기부하고, 입법과 관련해서는 가족 의료 휴가법Family and Medical Leave Act, 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근로자 자유 선택법Employee Free Choice Act등에 반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공정을 기하자면 자유주의적 성향을 띠면서 전국 자영업자 연맹과 같은 역할을 하는 단체도 있지만, 이들이 보유한 회원 수는 전국 자영업자 연맹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 연구에서 자영업자를 임의로 선발하여 확인했더니 이와 비슷한 비율로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225-226
이제 절대 실수하지 말자. 멕시코 음식은 체인점인 타코벨보다는 허름한 동네 타코집이 더 맛있고, 예쁘장한 작은 서점에서 책 구경을 하는 게 온라인에서 책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재밌다. 하지만 작은 것이 더 낫다고 외치는 정치는 대단히 간교하다. 왜냐하면 이런 심미적 혹은 소비자들의 특성으로 실제 정치를 대체하여, 기본적인 경제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자유주의 성향의 쇼핑객들이 반문화의 전율을 만끽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우리가 일부 소기업을 애용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이는 넥타이 무늬에 대한 취향 정도의 중요성밖에 띠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앤드류 라티스Andrew Laties는 《반란의 서점: 인디 사업은 어째서 당신이 싸워서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가, 언론의 자유에서부터 지역 구매, 공동체 건설에 이르기까지)라는 장황한 부제가 달린 자신의 책에서 자신의 동종업을 자랑스럽게 추켜세웠다. “서점 업자들은 자율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량이 허용하는 만큼 기회를 추구한다.” 이 얼마나 고매한 생각인가! 어째서 맨날 경제가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좌우해야 한단 말인가?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경제를 좌우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냔 말이다. 하지만 라티스는 이런 자율성은 자신(그리고 크리스 되블린 같은 노조를 혐오하는 동업자들)이 이미 속해 있는 소규모 특권계급에만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계급은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집단도, 어쩌다 보니 작게 시작하긴 했지만 커질 수도 있는 집단이 아니라, 반드시 작은 집단이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나 소기업 소유자가 될 수도 없다. 모든 사장에게는 경영을 위해 직원이 필요하다. 자율적인 노동과 풍성한 보상이라는 이상은 소기업 물신화라는 이데올로기적 여과장치를 지나면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말았다. 우리는 완전하고 자유로운 고용을 꾸준히 찬미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게임에서 질 수밖에 없는 맥락 속에 이를 끼워 넣고 생활임금이나 적절한 수당을 받을 권리는 박탈해버린다.
마찬가지로 “대기업”에 대한 반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존경스러운 감정들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신뢰할 수 없는 소수집단이 중요한 결정을 통제하고, 계급 간 이동을 분명하게 지지하며, 투명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저항은 의도한 건 아니라 해도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기업 찬미에 반대하는 주장을 대기업에 우호적인 주장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대기업들이 더 큰 규모에서 유사한 악행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경제는 ‘좋은’ 자본주의와 ‘나쁜’ 자본주의로, ‘큰’ 자본주의와 ‘작은’ 자본주의로 무 자르듯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그보다 더 깊어서 섬세한 개선보다는 근본적인 개혁을 필요로 한다. 작은 지역 기업을 근간으로 한 경제는 제대로 작동되지 못할 것이다. 설사 작동한다 해도 우리가 그런 경제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좋은 소유주와 나쁜 소유주를 대비시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들기보다는 모두가 자신의 역량이 허용하는 만큼 기회를 추구하는, 갑이 없는 새로운 세상의 미래상을 만들어야 한다. 1000개의 작은 영지는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227-228
물론 작은 것이 미덕의 보증수표가 될 수는 없지만, 큰 것이 악덕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어주지도 못한다. 맥도널드나 월마트가 지배하는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 싸울 이유는 없다. 사실 이런 대기업의 견고한 권력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유발한 중요한 원인이다. 아무리 왜곡되긴 했어도 소기업에 대한 광범위한 열정은 분명한 병리적 현상들에 대한 건강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작업장에서는(대기업들은 노동자가 자신의 생활을 미리 계획할 수 없도록 값비싼 교대 일정 조정 소프트웨어에 투자하고 있다) 공공 영역에서든(부의 엄청난 집중은 ‘민주적’ 정치에 대한 부조리한 권력으로 꾸준히 전환되고 있다) 대기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228-229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대기업이든 소기업이든 문제의 원천은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생산적인 부를 사적으로 소유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무제한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결국 기업의 규모는 주어진 사회에서 살아가고 노동하는 모두를 길들이고 제한하는 더 큰 구조에 비하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해보면 이런 결론은 비관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급진주의자들이 미래 대안의 형태와 크기를 창조적인 불가지론에 입각해서 모색해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령 공공관리 투자기금을 가지고 소기업들을 조금씩 노동자 소유형 협동조합으로 탈바꿈시킨 뒤 소규모 조직이 면대면 관계와 직접적인 의사 결정 참여를 통해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노동자가 직접 이용하게 할 수 있다. 이웃들이 공동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협력하는 소비자 협동조합은 우리가 ‘소기업’ 하면 연상하는 지역적인 정신을 보존하는 또 하나의 방편을 제시할 수 있다. (일을 하든 하지 않든 모두에게 보장·지불되는) 기본 소득 같은 임금노동의 대안은 돈을 아예 교환하지 않고 일부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 및 이전시키는 것과 같은 훨씬 급진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완충장치가 될 수 있다.229-230
이 같은 지역적인 대안들은 실험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고유의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결코 더 큰 규모에서 관리되는 보완적인 프로그램 없이 완결된 형태의 삶의 대안을 제공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질 좋은 교육, 의료 서비스, 보육의 보장 같은 원대한 프로젝트들 역시 최대치의 공동체 참여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행될 경우 더 잘 작동할 것이다. “모든 규모에서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좌파”가 되어야 한다는 역사학자 대니얼 임머바르Daniel Immerwahr의 말을 명심하자. 그런 좌파는 작은 것이 정말 대단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지 않으면서도 지역적인 지식이 항상 옳다는 위험한 환상을 거부할 것이다.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