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백세희 작가님의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베스트셀러로 인기가 있었다.
정말 강렬한 제목이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위 책을 아직 읽지는 못했다.
작가님 죄송 죄송...
참고로 백세희 작가님과는 전혀 안면도 친분도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떡볶이.
그중에서도 나 어릴 적 엄마가 해주시던 기다랗고 가느다란 떡으로 만든 달달 짭짤한 빨간 떡볶이.
절대 기다랗고 가는 떡을 자르면 안 된다.
그럼 맛이 안 난다.
기다란 채로 먹어야 한다.
책 제목대로 죽기 직전 최후의 음식을 하나 고르라면 나 역시 떡볶이를 선택하겠다.
진월동 탁구장 옆 작은 터에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다.
술 파는 포장마차가 아니다.
거기에서 아주머니 혼자서 분식을 팔고 있었다.
진월동 최초의 분식점이다.
아주머니는 당시 엄마 나이보다는 더 연배가 있으셨던 것 같다.
들어가면 아주머니가 가운데 서 계시고 건너편에는 기다란 일자 의자가 놓여 있어 다들 거기에 앉아 주문하고 음식을 먹곤 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약간 바(Bar) 같은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면 오뎅, 떡볶이, 튀김을 팔았던 것 같다.
지금처럼 메뉴가 다양하진 않던 시절이었기에.
대성 여중고 누나들은(당시 내가 초등학생이었음) 그 포장마차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지 갈 때마다 진을 치고 있었다.
하긴 중고등학생들이 어찌 분식집을 그냥 지나갈 수 있으랴.
방앗간에 모여든 참새들 같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그 포장마차를 데리고 가 주셨다.
특히 비 오는 날에는 동생과 나를 꼭 데리고 가서 오뎅 국물을 사주시던 기억이 난다.
빗소리를 들으며 먹던 따뜻한 오뎅 국물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포장 비닐을 젖히며 엄마와 함께 그 포장마차에 들어설 것만 같다.
시간은 이리도 잘 흐르는데 추억은 기억 속에 남아있다.
동생과 나의 추억의 첫 분식점이다.
한번은 셋이서 떡볶이를 먹으러 포장마차에 갔는데 옆에 대성여중 누나들이 삼삼오오 모여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엄마는 그 누나들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말을 붙이신다.
엄마 “얘들아, 맛있겠구나. 용돈으로 사 먹는 거니?”
누나들 “예, 용돈 받은 걸 모아서 함께 사 먹는 거예요.”
엄마 “중학생이 되면 보통 용돈을 얼마씩 받니?”
누나들 “얘는 한 달에 3,000원, 얘는 한 달에 5,000원 받아요.”
내가 곧 중학생이 되기에 관심이 생기셨는지 용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내가 중학생이 되면 용돈을 주시려나 보다.
옆에서 나와 동생은 조용히 듣고 있다.
아직 초등학생인 우리에게 중학생의 세계는 위대하고 멋져 보였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맛있는 것을 사 먹어도 되는 나이인가 보다.
옆에 있는 누나들이 부러워 보이기도 하고 곧 중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대도 되고 떨리기도 하였다.
‘아직 엄마 품에 안긴 병아리 같기만 한데 2, 3년 후면 스스로 공부하고 저렇게 친구들과 학교에 다녀야 하는구나...’
떡볶이와 오뎅을 먹으며 옆에 누나들을 보면서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엄마도 그런 중학생들을 보며 나와 내 동생의 중학교 생활을 미리 생각하셨나 보다.
엄마의 떡볶이도 무척이나 맛있었지만, 나가서 먹는 오뎅, 떡볶이, 튀김도 상당히 맛있었다.
엄마의 음식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미료 맛이었을까?
집밥이 최고이긴 하지만, 한 번씩 외식하면 바깥 음식이 맛있는 것처럼.
그래도 지금 난 엄마의 떡볶이가 더 생각이 난다.
그 포장마차 아주머니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실까?
30년이 지난 지금 내가 그런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어 있을 줄 꿈에라도 생각했을까?
나도 동생도 엄마도 아무도 생각 못 했겠지?
세월이 흘러 엄마는 우리 아이들의 할머니로 나와 동생은 한 가족의 가장으로 잘 자랐다.
다 엄마의 떡볶이 덕분이다.
그래서 나는 저 위의 책 제목을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
‘죽고 싶지만 엄마의 떡볶이는 먹고 싶어’로...
#나의진월동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