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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비단길, 말만 들어도 가슴 뛰게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와 보기를 고대 했던가? 이 비단길은 파미르 고원, 타클라마칸, 중앙 아시아 초원을 지나 지중해 연안에 이른다. 지금의 러시아에서,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북인도 등 10여 개 국을 거친다. 중앙아시아를 가로 지르는 실크로드를 따라 펼쳐진 중국인 거주지의 서쪽 끝에 해당된다. 서양에서 중국통치 영역으로 들어가는 외국 상인들이 처음으로 거쳐가는 교역도시이다.
돈황시는 동쪽에 삼위산. 남쪽에 명사산, 서쪽은 사막, 북쪽은 고비사막이다.
돈황의 역사는 기원전 11년 한무제가 흉노족을 정복하고, 하서 4군의 하나로 돈황군을 설치해 다스렸다.
장건이 실크로드를 개척한 이후 돈황은 탐리목 뷴지의 북과 남을 지나는 북로, 남로의 거점지로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오아시스 도시다.
한인, 페르시아인, 투르크인, 인도인등 여러 종족이 모여사는 국제 무역도시로 번성하였다.
이 비단길을 따라 서역에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데는 무려 7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서안,감숙성의 난주를 거쳐→ 장예→ 돈황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양 옆으로 길게 누은 기린산은 온통 흰빛이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바람에 모래가 날리는 모래밭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 삭막함이 오히려 상쾌하다.
고비 사막에 위치한 돈황은 란저우에서 시작된 하서주랑이 끝나고 실크로드의 남조와 북조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이 때문에 중국어로’크게 번성하다‘ 라는 뜻의 이름처럼 당나라 때까지 지정학적 요충지로 번영을 누렸다. 돈황 공항은 시내에서 동쪽으로 13km 떨어져 있다. 성수기엔 네이밍, 상하이, 난징, 칭다오, 난저우, 시안, 우루무치에서 극내선이 운항된다. 비수기인 11월 – 3월에는 시안과 란저우 항공편만 운행. 기차는 동쪽 12km 떨어진 돈황역에서 매일 6차례 운행한다. 돈황 터미널에서는 1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출발한단다.
포플러 나무로 둘러싸인 도심은 녹주(錄州)라 불리는 오아시스이지만 외관으로 나가면 사주(沙州)라 불리는 자갈 사막과 황금빛 모래사막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이 사막의 건조한 공기 덕분에 완벽하게 보존된 ’막고굴‘이 핵심 볼거리이다.
사막의 박물관막고굴
막고굴은 간쑤성 둔황에 있는 천불동으로 세계문화유산이다. 빨간 언덕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사막, 사막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설산. 하염없이 풍경을 바라보며, 북막(北漠)의 막자를 왜 외로울 막을 썼는지 몸으로 체험하였다. 돈황 예술의 상징은 비천상이다. 거의 90도에 가까운 허리의 굴곡, 환조의 비천상이 우리를 맞는다. 1000 여 년에 걸쳐 불교 예술이 발달해 온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에겐 신라 승려 ’혜초‘가 쓴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으로 의미가 각별하다. 여기에 황금처럼 반짝이고 결이 부드러운 사막 ’망사산‘이 낭만을 더해준다.
막고굴은 명사산 동쪽 기슭에 있는 사암지역의 대단위 인공석굴이다. 중국 3대 석굴(운강,용문,동황) 중에서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서기 366년 ’낙준‘이란 승려가 만들기 시작,하여 번성기에는 천여개가 넘는 석굴이 있어 천불동이라 불리어 왔다.
이후 13세기까지 이어져 오다 지금은 429개의 석굴이 남아 보존되고 있단다.
둔황 석굴은 동남쪽 25km에 위치한 명사산 동쪽 벼랑에 남뷱으로 1600m에 걸쳐 조성된 서천불동, 만서유림굴, 수협구굴등 600여개의 동굴이 있고, 그 안에 2400여개의 뷸상이 안치되어 있다. 총 면적은 45000㎢ 이다. 거대한 불교 중심지로 중앙아시아의 여러 왕국에서 건너온 승려와 표교사들이 머문 주요 도시였다. 수많은 석굴 사원은 시대를 거듭하며 건축되었고, 이때부터 돈황은 중요한 불교 중심지이자 순례지가 되었다. 돈황은 척박한 실크로드의 길 속에서도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이었고, 갈증을 달래주는 물이었다. 때로 사람들의 땀을 닦아주고, 때론 길을 밝혀 주기도 했다. 돈황은 실크로드의 빛나는 보석이다. 천년이 넘는 과거의 숨결을 따라서 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켜켜히 숨겨진 역사를 알게 된다..
, 막고굴이 감동적인 이유는 돈황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내맡긴 장소이기 때문이다. 막고굴은 삶이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희망의 공간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며 고통스러운 삶을 버텼을지..., 막고굴에는 사람들의 절망과 희망의 기록이 남겨있다. 돈황 문서에는 그 내용이 생생하게 적혀있다. 아비는 빚을 못갚아 아이를 노예로 팔아넘겼고, 아이는 낯선이의 손에 이끌려 떠나갔다. 가난한 집 사내아이는 출가를 하며 어미에게 편지를 남겼다. ‘어머니, 부디 동생들과 행복하게 살아가십시오’ 죽음을 앞둔 노승은 막고굴 속 동굴에 들어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가난한 화가는 강한 신념으로 막고굴의 벽화를 완성했다. 이름 모를 수많은 불상을 조각하며 가족들의 행복을 기원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염원이 이 불상에 담겨있는 것일까,
돈황 문서는 아쉽게도 1900년대 초반 돈황의 많은 벽화와 불상. 문서들이 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돈황을 지키던 ‘왕원록’은 ‘스타인’등, 많은 외국 탐험가나 고고학자들에게 문서를 팔기도 했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돈황 문서에는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방대한 기록 덕분에 돈황학이라는 독특한 학문까지 생겨났다. 문화재 반환 확률은 극히 드물지만, 현재 보존되어 있는것만 보더라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막고굴 현장으로 가기 전에 영상소개는 두 개의 영상실에서 각각 20분씩 진행되었고, 동서교역 요충지로서 돈황의 지리적 위치, 사막을 달리는 군인들. 모래바람, 말 우는 소리, 한 편의 대하 드라마처럼 박진감 넘치게, 삼면의 대형화면으로 소개하였다.
2호 영상이 나오는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막고굴의 중요한 석굴들을 생생하게 원형 돔 스크린으로 보여주는데 영상 기술과 처리방식이 뛰어나,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한국인을 위한 오디오 써비스도 완벽했다. 총 8개의 석실을 관람했다. 석실 내부는 촬영금지다.
막고굴은 북굴과 남굴이 있는데 무려 10km에 달한다. 북굴에는 주로 승려들이 수행하는 장소였고, 현재는 발굴이 진행 중으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현재는 남굴만 관광이 허락된다. 158굴 석가모니불, 열반 채색 와상 조각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길이 15.8m, 머리길이 3m, 포동포동한 얼굴에 콧등이 높고, 왼손으로 왼쪽 얼굴을 배고 옆으로 누워 꿈을 꾸듯 편안하고 행복한 얼굴이다. 248굴 고수상은 북위 시대것으로 앞을 보고 앉은 당당한 모습에 채색이 아름다웠다.
석굴에 들어갈 때는 표 검사를 한번 더 한다. 석굴은 대부분이 문이 잠겨 있고, 오픈된 건 많이 없다. 내부는 촬영이 금지라, 그냥 눈으로만 담고 와야 한다. 석굴 내부는 정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작은 석굴 안에는 불상과 벽화들이 가득했다. 시대별로 부처님의 미소가 다르고 불상 제작 방법이 다르고 벽화 스타일이 다르다. 시대별로 구분하긴 힘들지만 모든 불상과 벽화가 조화로웠다. 그리고 돈황에서 가장 유명한 96호 불상인 북대불, 높이가 34m 엄청난 크기와 아래에서 올려다본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에 전율이 흘렀다. 당나라 때 측전무후가 조성, 자신의 상으로 만든거란다. 사실 일반인이 막고굴의 건축적인 기법이나 불교 미술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한무제는 흉노를 몰아내고 돈황에 국경초소를 설치 교통 상업의 중심지로 불교문화 예술을 포함,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만나는 장소로 만들었다. 인구 18만명, 한나라 시대 서부지역 방어를 위해 만든 요새, 양관고 옥문관이 남아 있다. 막고굴은 4세기부터 시작해. 천 년간 끊임없이 만들어지다 보니 불상의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막고굴이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는 같았을 것이다. 세습 통치자들은 사원을 적극 후원했고, 승려들 가운데 대부분이 비 한족 이었다.
명사산(모래산)과 월아천 ,
어린왕자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야”
돈황에서 남쪽 5km, 높이 1600m 크기 동서40km, 면적 800㎢ 하늘과 부드러운 경계를 긋고 있는 모래 능선, 그 아래에선 낙타행렬이 길게 늘어서 천천히 움직인다. 수십 마리의 낙타가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길게 낙타를 탈 수 있는 구간이라고 한다.
낙타행렬이 길어 신호등도 만들어 두었다. 여긴 낙타만 천마리가 있단다) 낙타의 수명은 40-50년 그 옛날 수천 길을 오가던 낙타는 지금은 나를 싣고 비탈진 모래 언덕을 갑니다.
가는 길에 스폿장소에 쉬어 사진을 찍어 주신다. 낙타 몰이꾼들은 포즈까지 지시하며 사진을 찍어주고 쫘-악 동영상도 찍는다. 사막 곳곳엔 그늘 집이 군데근데 보인다. 최소한의 비, 그마저도 금방 증발해 버린단다. 한낮의 기온차가 심해 밤에는 영하의 기온이다. 최근에는 도시의 급격한 발달과 농경지의 확대로 지하수가 고갈되면서 도시 전체가 사막화될 위험에 빠졌는데 ’사막의 미술관 ‘막고굴’이 모래에 파묻힐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자, 여행객은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다. 7 – 8월에는 여행객이 너무 많아서 벽화 대신에 사람 뒤통수만 쳐다보게 될 수도 있단다..일몰과 일출이 이름다은 명사산, 사막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한 곳이 바로 명사산과 월아천이 아닐까?
새벽의 일출과 한낮, 일몰과 밤을 다 지켜볼 수 있었던 잊을 수 없는 공간,
모래 우는 소리가 마음속 깊이 울림을 주는 곳.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어려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탄 작은 낙타의 눈은 갓난아기의 눈을 닮아 천사처럼 빛났다. 사막은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언제나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월아천‘이 꿈처럼 아련하다.
해발1600m,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사구너머로 멀리 끝없는 고비사막이 이어진다. 언덕을 올라가서 내려다 보는 뷰가 최고라기에 오르려는데 발이 푹푹 빠지기 때문에 진짜로 힘이든다.
명사산을 기어 오르는 여행객들이 개미떼 같다. 명사산은 산이라고 이름은 되어 있지만 모래구릉 지대이다. 아무것도 없다, 그저 막막한 사막일 뿐, 가도 가도 또 걸어가도 오직 사막뿐, 작은 모래알갱이가 모여 산을 이룬 명사산,
황색부츠를 빌려신고 사구를 오르며 우리모두 어린 왕자가 되어본다.
명사산 모래언덕의 사구 위를 걷는 것은 힘들지만 기분은 최고다. 손으로 만지면 감촉이 없을 정도로 보드라운 모래다.
정상에 도착해서 빛과 그림자가 세상에서 가장 통쾌하게 자른듯한 선으로 나뉘어진 절경을 보고 가슴이 감동으로 확 트인다. 어쩌면 이렇게도 곡선이 매끈하고 아름다울까? 이 모래로 이루어진 거대한 언덕이 산맥처럼 뻗었는데 바람 방향으로는 완만하고 반대쪽으로는 날카로우면서 명암의 경계선이 생선의 등처럼 날렵하다. 능선은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인다. 능선 저 위를 걷기라도 한다면 발다닥을 베일 것 같다. 명사산은 바람이 조각하는 예술의 극치다. 푹푹 빠지는 걸음으로 썰매를 타듯 매끄럽게 산을 내려온다. 실제로 사막을 만나면 먼지만 희날리고 낭만이라곤 눈꼽만큼도 찾기어려운 자갈밭을 헤매기 일쑤지만 그러나 명사산은 다르다.
바람에 모래가 날리고 바람에 풍경이 스치고 나의 세월이 날이가 버렸다. 명사산은 바람의 영항으로 모래 언덕이 수시로 변하는 데 바람에도 월아천이 그대로 인건 불가사의한 일이다. 바로 곁에 마을이 있으며 거짓말처럼 눈앞에 모래산이 나타난다. 고개를 돌리면 사막, 또 고개를 돌리면 도시, 사막이 바다라면 구릉들은 파랑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의 파도...
사막이지만 오아시스 마을이기 때문에 주변에는 풀도 있고 초록이 있어서 사막의 색과 너무 잘 어울립니다.
일몰보다 밤하늘이 더 예술이란다. 까만 도화지처럼 밤하늘을 밝히는 노란 별무리, 은하수. 달님등. 아침 햇살을 받으면 붉은 빛, 낮에는 하늘빛, 저녁에는 잿빛으로 변한다고 한다.
언젠가 삶이 시들하고 진부해질 때 인생의 겸손과 열정을 겹으로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둔황의 명사산은 사막과 매력적인 오아시스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곳이다.
월아천은 초승달 모양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크로드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제공했다는 월아천, 오아시스의 남북길이는 15m, 폭 50m, 서에서 동으론 수심이 깊고 제일 깊은 곳은 50m란다. 무성한 녹지대와 황량한 사막의 경계를 이루는 명사산은 사막 한가운데 짙푸른 옥빛 샘을 품고 있다. 이렇게 황량한 사막에서 물을 만나다니! 비록 사막 한 가운데 위치한 작은 오아시스에 불과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와 풀잎이 흔들리고 있었고, 월아천 샘물도 잔잔하게 물결을 일으키고 있어 월아천은 사막의 오아시스가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보석 같은 청녹빛 샘을 무성한 갈대들이 둘러싸고 있다. 월아천의 발원지는 곤륜산맥의 눈 녹은 물이 지하로 흘러 솟아나는 것이란다. 물색이 맑고 거울을 보는 것처럼 반짝거린다.
이 물속엔 “철배어”라는 물고기가 사는 데 불로장생 약이라고 한다. 오아시스도 멋지지만 그 옆에 지어진 도교사원 월천각과 함께여서 더욱 그림 같았다. 월천각 (월천고류 수령 120년 버드나무)
지금은 주변 도시의 팽창과 매년 1백만 에이커의 땅이 사막화로 변하다보니, 인공으로 물을 대고 있답니다.
명사산에 월아천이 없다면 말 그대로 안고없는 찐빵이 아니었을까?, 월아천은 모래속에 숨겨진 비경으로 보석과도 같았다. 사방이 모래로 둘러싸여 다가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모래속에 푸른 심장처럼 작아 더 신비롭고 아름답다. 미인의 눈썹처럼 곱게 휜 초승달 모양이 더없이 는낄을 끈다. 천년 넘게 한번도 마른적이 없다는 신비의 샘.
선녀의 눈물이 고여 만들어진 호수라는 슬픈 전설을 담은 월아천,
월아천은 자연이 남긴 돈황의 보물이다
도교사원은 지은지 20년 정도, 사막의 건축양식과는 거리가 멀지만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잘 어울린다. 이런 비경이 사라지지않고 후대에 전해지길 맘속으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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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직접 그리신 그림과 함께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역사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참 잘적으셨네요. 존경합니다. 가마득한 기억속에 숨어 있던것이 나오는 느낌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여행의 참맛을 아네요.
그림도 잘그리셨어요. 고맙고 감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