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강신주의 무문관과 철학] 48.
조주무자(趙州無字)
불성이라니,
무슨 똥막대기와 같은 소리인가
개에게 불성 없다는 말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 돼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불성은 소용없는 개념일 뿐
업식 작용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없고
만약 이미 부처 되었다면
불성, 그 자체가 의미없어
어떤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조주(趙州) 화상은 대답했다.
“없다!”
- 무문관(無門關) 1칙 /
조주무자(趙州無字)
1. 일체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
‘열반경(涅槃經)’에는
중국, 한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불교계에
파란을 불러일으킨
유명한 구절이 하나 등장합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
(一切衆生, 悉有佛性)”이란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일체 중생들은 모두
불성(佛性, buddhat?)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선한 품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
한 마디로 불교의 가르침을
불신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에게도
과연 불성이 있는지의 여부와
관련된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지요.
물론 당시 동아시아 대승불교계에서는
일천제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방향으로 합의를 보고 있었습니다.
일승(一乘, ekay?na),
그러니까
모든 존재를 하나의 수레로 태워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대승불교의 기본 입장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선한 품성이 전혀 없는 존재가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불가피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일천제가 부처가 될 수 있다면,
그에게는 이미
불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일천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셈이 됩니다.
사실 일천제가 아니어도 됩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즉 중생(衆生, sattva)에는
좁게는 마음과 욕망을
가진 인간만을 가리키지만,
넓게는 모든 생명체들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논의가
복잡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하면 다람쥐 부처, 뱀 부처,
혹은 말라리아모기 부처 등등도
가능할 테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점점 더 동아시아 대승불교는
불성과 관련된 논쟁에
깊숙하게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불성 논쟁을 주도했던 것은 교종(敎宗),
특히 천태종(天台宗)의 이론가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불교의 다른 경전,
특히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과
같은 경전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구절이 속출합니다.
그러니 논쟁은
종식될 기미를 보이지 않게 된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지적인 논쟁으로 수행자들은
스스로 부처가 되려는
치열한 수행을
등한시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아니 등한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적인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서로를 집요하게
공격하고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정도면 수행자들은
사실 자비를 마음에 품은
불교도이기는커녕
권력욕에 취한 정치가나 이데올로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한심한 일이었지요.
자비를 실천해야 할 수행자들이
오히려 가장
무자비한 비난과 독선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으니까요.
바로 이럴 때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면서
선종(禪宗)이 등장한 겁니다.
그렇지만
선사들도 불성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건 선사들이
불성 논쟁에 뛰어들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선사들을
스승으로 찾아온 수행자들이
자꾸 물어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선사들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불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선사들은 불성에 대한
제자들의 이론적 집착을
부수는 방향으로 문답을 진행합니다.
2. 그렇다면 개에게도 불성은 있는가
‘전등록(傳燈錄)’을 보면
흥선(興善, 755~817) 스님과
그의 제자 한 명 사이에 일어났던
불성과 관련된 대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제자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묻자,
흥선 스님은 “있다(有)”고 대답합니다.
이 순간 제자는 흥선 스님이
‘열반경’의 일승 사상을 따르고 있다고
확신했을 겁니다.
확인삼아 제자는 흥선 스님에게 물어봅니다.
“그럼 화상께서는 불성이 있으십니까?”
아마 제자는
“있다”라는 대답을 기대했을 겁니다.
그러나 흥선 스님은 제자로서는
경천동지할 대답을 합니다.
“내게는 불성이 없다.”
당연히 제자는
당혹감에 물어보게 됩니다.
“일체 중생들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무슨 이유로 화상께서는
혼자 불성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흥선 스님의 대답은 압권입니다.
“나는 일체중생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일체중생이 아니라면,
흥성 스님은 이미 부처가 된 겁니다.
이미 부처가 된 사람에게
불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야기 아닌가요.
얼마 뒤 조주(趙州, 778~897)에게도
불성이란 개념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던
한 명의 제자가 찾아듭니다.
‘조주록(趙州錄)’에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조주는 “없다(無)”고 대답했다.
스님은 물었다.
“위로는 여러 부처들,
아래로는 개미까지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개에게는 없다는 겁니까?”
그러자 조주는 대답했다.
“그에게는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
업식(業識)은
집착을 낳는 근본적인 의식,
알라야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업식성이란
집착과 번뇌로 괴로워하는
평범한 중생의 마음을 가리키는 겁니다.
결국 업식성은
불성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있는 그대로
자신과 세상을 보려면,
자신의 과거 행동으로 만들어진
습관적 무의식을 제거해야만 하니까요.
그러니까
습관적 무의식이 작동한다면,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부처가 되었다면,
우리에게 습관적 무의식은
겨우내 쌓였던 눈이 봄이 되어
태양빛으로 녹아버리듯이
그렇게 사라지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는 다릅니다.
당연히 깨달은 자의 세계와
깨닫지 못한 자의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지요.
흥선 스님은
개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했고,
조주 스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두 스님이
같은 걸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중생심을 부처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
즉 정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일이니까요.
흥선 스님은
개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처럼 깨달은 사람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불성이란 개념적으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이나
혹은 부처가 될 수 있는 바탕을 가리키니까요.
이미 실현되었다면
잠재성이니 바탕이란 말은
사용할 수 없는 겁니다.
조주 스님은
개에는 불성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업식성이 있다면
불성이 있어도
부처는 될 수 없다고 암시하면서 말입니다.
조주 스님은 지금 우리가
반드시 끊어야 할
업식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주 스님은
우리에게
불성이니 뭐니 이야기하지 말고
업식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라며 되묻고 있습니다.
‘네게는 업식성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전자라면
아직 부처가 아니고,
후자라면 부처가 된 겁니다.
3. 주인 되려면 반드시 ‘무’ 통과해야
조주 스님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면,
이건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불성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업식성이 있기는
개나 우리나 마찬가지니까요.
조주 스님의 통찰은
흥선 스님보다 더 매력적인 데가 있습니다.
왜냐고요?
그건 깨달은 자나 깨닫지 못한 자
모두에게 불성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업식성이 작동한다면,
불성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개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현될 수도 없는 불성이란
개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없다고 해도 되지요.
반대로 업식성이 소멸되어도,
불성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개념입니다.
이미 부처가 되었는데,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개에게만
불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처에게도
불성은 없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조주 스님의 “없다(無)”라는
사자후는
개를 넘어 우리 인간을 휘돌아
저 멀리 깨달음에 이른 부처에게까지
이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문관’을 편찬했던
무문(無門, 1182~1260) 스님이
조주의 ‘무자(無字)’,
즉 ‘무’라는 글자에 주목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有)’는 교종의 가르침도
‘무’라는 글자로 날려버릴 수도 있고,
불성 자체가
치열한 깨달음의 과정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믿고 있던
일부 제자들의 집착을
‘무’라는 글자로
날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한 마디로 말해
일개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의 권위에도 굴복하지도 말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불성이란
개념의 권위에도 굴복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무문 스님이
‘무문관’의 첫 번째 관문으로
조주 스님의 ‘무’라는
글자를 앞세운 이유가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그래서 무문 스님은
첫 번째 관문을
풀이하면서 이야기했던 겁니다.
“다만 하나의
‘무’라는 글자일 뿐이니,
이것이 선종의 첫 번째 관문이다.
그래서 ‘선종 무문관’이라고 부른 것이다.”
과거 선사들의
48가지 화두를 모은 책
‘무문관’은 이렇게 탄생한 겁니다.
‘무문관!’
의미심장한 말 아닙니까.
‘문이 없는 관문’입니다.
문을 찾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 문을 통해서만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통과할 수 없는 관문입니다.
문이 없으니까요.
반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문이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통과하기 쉬운 관문이지요.
문이 없으니 통과할 필요도 없고,
이미
통과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어떤 문에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경전의 권위일 수도 있고,
불성과도 같은
형이상학적 실체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모두
스스로 주인이 되려면
반드시 부정해야 할 대상이니까요.
그래서
무문 스님의 말처럼
우리는 정말로
조주의 무라는 글자를
뚫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서,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위대한 자유를 얻게” 될 테니까요.
ㅡ강신주
(출처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