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친구 광희와 재회
지은이:벌마로 (김윤식)
영우부부가 운영하는 제과점이 날이 갈수록 적자만 보고 있다. 무리하게 빚을 얻어서 사업을 확장한 이유도 있었지만, 요사이 두 군대 가게를 종업원한테 맡기고
관리를 소홀이 한 이유가 더 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멀지 않은 곳에 새로운
제과점이 또 생겼다. 영우네가 빵가게를 차린지 4년 사이에 벌써 두 군데가 더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근처에 인구가 더 늘어난 것도 아닌데, 한정된 소비인구에
세 개의 빵가게가 나누어 먹는 형국이 된 것이다. 이번에 새로 생긴 제과점은
영우네 보다 상권도 좋았고 규모도 크고 세련됐다. 경쟁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 개업한 제과점 주인이 너무나 미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경쟁 사회에서 밀리면 그만인 거였다. 그나마 매출 면에서 버텨주던 안양가게마저도 날이 갈수록 매출이 줄고 있었다. 예전만큼 매상은 오르지 않았고 은행이자에 임대료에 종업원 월급으로 나가는 비용을 감당하기 힘겨웠다. 날이 갈수록 은행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은행대출을 더 늘려야 했다. 이것은 악 순환의 연속이었다. 더 이상 버티기에는 한계에 다다랐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영우네 부부는 고심 끝에 안양가게를 처분하기로 했다. 안양가게는 손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손해는 없었지만 너무 거리가 멀어서 관리가 어려웠었다. 차라리 안양가게를 처분하고 그 돈으로 얼마만이라도 대출부담을 줄이고 부천가게에 집중하기로 했다. 영우부부의 계획이 처음 몇 달은 효과를
보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종업원을 줄이고 두 사람이 한 군데 집중하니까 인건비 부담을 덜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다른 가게와의 경쟁에서 이미 기울어진 매출감소는 좀처럼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고정 지출만 줄인다고 경영상태가 좋아지지는 않았다. 영우네로 오던 손님들은 새로운 인테리어로 깔끔하게 단장한 새로 생긴 제과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손님을 빼앗긴 것도 속상한데 다른 집에서 사 온 빵 봉지를 들고 영우네 가게 앞을 지나는 손님을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자면 가슴에서 열불이 났다. 간혹
단골로 오던 손님이 들러서 새로 개업한 제과점은 빵 가지수도 많고 맛도 더 좋다고 조언을 해 주기도 하지만 지금에서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한마디로 답이
없었다. 그런 상태로 일 년을 버티다 결국 부천 제과점도 접기로 했다.
가게를 정리하면서 발생한 보증금과 약간의 권리금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살던 집도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도 했다. 영우네가 제과점을 접을
무렵 미용실 하는 은희네도 미용실을 그만두고 부천역 근처에 유흥음식점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사를 갔다.
영우의 나이 사십을 넘기고 가을이 무르익어갈 즈음 초등학교 동창회를 한다고 연락을 받았다. 가끔씩 전화 통화만 하던 영미한테서 전화가 온 거다. 영미는 동창회 총무를 맡았단다. 거의 삼십 년의 세월이 흘러서 친구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다른 친구들은 중학교까지 쭉 이어서 진학을 했기 때문에 금방 알아보고 친해지겠지만 영우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었기 때문에 친구들도 자신을 보고 어색해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동안 영우는 지난 십여 년 조그막하게 사업을 하는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곁눈질할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왔다.(살짝 일탈을 해 보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녀에게 그 시간이 가장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역동적으로 살아왔던
시기이기도 했다.
영미는 연락이 되는 친구들부터 시작해서 연락처를 확보하는 중이란다. 그러면서
영우에게도 별도로 연락이 되는 친구 있으면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는데 영우는 한 명도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친구가 없었다. 오히려 영미하고 연락하며
지낸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미는 동창회 날짜 정해지면 꼭 나오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공항 근처 번화가의 제법 규모가 있는 식당에서 동창회를 열었다. 영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친구들은 벌써 와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이 영우에게 다가와서 아는 체를 하고 반가워해 주었다.
기억이 가물가물 했지만 영우도 애써 웃으며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십 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기억이 안 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할 것이다.
얼굴들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이름을 밝히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예전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다행히 영미가 반겨주었고 뒷집에 살던 동훈이가 영우 이름을 불러 주었다. 영우도 친구들과 조금씩 대화의 폭을 넓히며, 어린시절
기억을 소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처음부터 눈에 들어온 친구가 있었다. 테이블 맨 끝에 앉아 있는 광희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무렵 친구들이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고 모두들 일어나기
시작했다. 노래방 분위기를 싫어하는 몇몇은 그 자리에서 늦게까지 술자리를 이어갔고 광희하고 영우도 끝까지 남았다. 거리에 불빛이 하나둘 꺼져갈 때쯤 누군가 그만 마시자는 말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누가 누구를 챙겨줄 겨를이 없었다. 각자 알아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떠나고 광희하고 영우만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았다. 광희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사실 친구들과 함께하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조차
마주 앉지 않으려고 했다. 친구들 앞에서 표정관리가 어려울 것 같았고, 서로가
민망해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광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 걸을까?”
앞서가는 광희를 영우가 말없이 따라 걸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서운 했었다고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지 지난 일인 걸. 다 잊었다고 해야 할지,,, 광희도 영우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실망했었다고 해야 할지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인 것은 다른 친구들은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입이 무거운 광희가 영우의 지난 일을 영우네 식구들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건 고마웠다. 말없이 광희가 영우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영우가 손목을 살짝 빼면서 광희의 손바닥을 잡았다. 술기운에 몸을
지탱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광희의 체온을 느껴보고 싶었다. 광희의 손에서 따뜻함이 전해졌다. 어릴 적 순수했던 소꿉친구 광희의 그때 그 체온이 영우에게 전해 왔다. 편안했다.
“광희가 말을 꺼냈다.
“나 많이 미워했지?”
“,,,,,,”
“그때는 정말 충격이 컸고 실망도 많이 했어. 어렸을 때 너는 친구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잖아”
“다 지난 일인데 뭐”
“그래도 네 인생에 내가 끼어들어서 망쳐 놓은 것 같아, 죄책감에 시달렸어. 정말
미안해”
“미안해하지마. 나, 너 미워한 적 없어 나를 가족처럼 생각했으니까 그랬겠지 그 마음 다 알아 ”
“그럼 다행이다. 그럼 다 풀어졌다고 믿어도 되는 거지,,,”
“그럼 그리고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우린 아주 오래된 친구잖아. 그런 일로 어색해지면 어떡해,,,”
“지금도 생각나,,, 여름도 다 지나간 초가을 날. 수리조합 냇물에서 내가 어른 하고 네가 애기 역할 하면서 발 닦아 주었다가 네가 감기를 혹독하게 치렀었잖아, 그 일로 너 네 엄마한테 호되게 야단 맞았잖아 너 기억나지?”
“아 창피하게 그걸 기억하면 어떡해”
영우가 얼굴을 붉히며 광희의 등을 때렸다. 광희가 영우를 보며 크게 웃었다. 광희의 웃는 모습은 화사하고 싱그러운 젊은 청춘들의 향기는 없지만 중년의 완성된 얼굴에서 풍기는 안정되고 중후한 무언의 언어를 알게 했고 뭔지 모를 믿음직한 기대와 푸근함이 느껴졌다.
안개 낀 새벽의 몽환적 분위기 탓일까. 술을 깨야겠다는 핑계로 걸었는데 영우는 어느새 광희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서로의 채취를 느끼며 걷고 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그들은 그렇게 걸었다.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며,,,
제 역할을 다한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저미게 하는 오후의 한가한 시간 기러기들이 V자 형태의 질서를 갖추고 어디론가 하늘을 날아간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기러기들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맨 앞의 대장 기러기가 이끄는 대로 줄지어 따라가고 영우는 기러기들이 아스라이 멀어져 갈 때까지 한참을 넋을 놓고 올려다보고 있다.
어젯밤 있었던 광희와의 재회가 마치 꿈결처럼 희미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그러다 문득 광희와 놀던 어릴 적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솜털이 보송보송 나고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둘은 소굽놀이를 하면서 놀았었다. 영우가 서울로 전학을 가면서 둘은 자주 볼 수 없게 되면서 차츰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중학생이 됐을 때쯤 광희는 영우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아마 부끄러움을 알게 되던 시기였을 테다. 하지만 광희는 영우를 좋아하고 있었다. 영우는 광희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었다.
토요일 영우가 집에 와 있을 때였던 것 같다. 엄마가 대문 앞에 서있는 광희한테
들어오지 않고 왜 여기 서 있느냐며 핀잔을 주는 소리를 방 안에서 들었다. 그때 광희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도망을 갔었다. 영우는 속으로 흉을 봤었다.
‘바보,,,’ 나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자연스럽게 만나서 대화할 때도 그때의 일은 꺼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제 처음으로 그때 일을 꺼냈다. 창피해하는
광희의 모습을 보며 영우는 깔깔대고 웃었다.
영우는 요즘 틈만 나면 광희하고 전화를 한다. 특별히 중요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전화수화기를 들면 시시콜콜한 수다로 반 시간은 기본이다. 광희에게선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 무슨 말을
해도 서로 공감대가 이루어져서 좋고 시시때때로 전화해서 수다를 떨 수가 있어서 좋다. 중년의 나이, 소중한 친구가 생긴 듯해서 좋다.
병휘오빠와의 관계를 폭로하는 바람에 원망스러웠던 기억도 결국은 지나간 일이 되어 버렸고 달리 생각해 보면 그것도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광희하고는 점점 편하게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을 새삼 알았다. 그들은 그렇게 긴 세월 이야기 동무로 지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