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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
혁 명 본 색
1. 거리
흘러가네 하염없이
반나절분의 정의, 반시간분의 사랑, 사고팔고 낚는 길
열과 성을 다해 굴러가네
산(山)만한 바위가 뒤를 밟아오건만 의젓이 마스크 쓰고
사회적 거리 유지하며 흐르고 있네
손안의 청색광에 눈을 박고, 귓속에 이별 노래 가득 채우고
잰걸음 게걸음 팔자걸음 오리걸음, 저마다 넉넉한 슬픔들이여
베이비, 베이비, 친구 누나를 풍선인형처럼 주물럭거리던
무쇠솥뚜껑 같은 미군병사의 손
로터리엔 지금도 미군지프와 탱크가 착검 대기 중인데
눈동자 부은 채 미용실 도는 곡각 길
우다다다다 겨드랑이 사이 오토바이 뛰어드네
지하철 환풍기 타는 내 뚫고 생닭 끓는 호프집 비켜
생살 저미는 횟집 도마소리 깨부수며 흘러가네
거대한 바위 뒤통수까지 쫓아 왔는데
“할로 쪼꼬레또 할로 쪼꼬레또” 목소리 간절하구나
미군 매형에게 초콜릿을 조르던
동네 친구의 아슬아슬한 평화
하니, 하니, 머 하니? 친구 누나의 목덜미를 감던 무쇠솥뚜껑
그때였을까? 처음 만난 혁명의 불꽃
양말 한 묶음에 5천원 혁명 한 두름 1천원
할인마트 옆 난전에서 딴눈을 팔며
길 잃은 패잔병들 빨갛게 토끼눈 뜨고 가고 있네
2. 결실
혁명은 시시때때시 가을을 거두었지
혁명 위에 혁명 앉고 새 혁명 다시 혁명 발목 잡아채면서
진실이 진실을 탈피하고 양심이 양심을 변태(變態)하고
자유는 자유의 피를 말리고 정의는 정의의 뼈를 녹이었지
병(病)이 아닌 것이 병이 되고 신(神) 아닌 것이 신이 되어
인간 밖의 병원, 지구 밖의 교회가 호황을 맞았지
시인은 풀벌레 우는 소리에 죽은 척 엎드렸다가
때맞춰 별유천지비인간 명시 명창 영원의 나발을 부네
쏟아져 나온 문장들 폐기물 처리장에도 둘 데가 없고
살진 임금님, 앞에는 칼잡이 뒤에는 미중 제국 입김 두르고
건들건들 어기적어기적, 나 빼고 모두 무기 버려라!
기망독점 부정 독점 질서독점 양심 독점
옥상도 지하실도 비상구도 판 쓰리
자유도 상식도, 정보 기술 인간 자연 혼자 다 쓸어 담네
가상자산 진상재화 주식채권 조작매매 선택적으로 정산하고
깔려 죽고, 울다 죽고, 성이 나 죽은 쓰레기들 앞에
영결식 만발하네, AI 챗 봇 추도사 낭독한다네
깔리기 줄서기가 반만년 전통이요 상식이요
서는 듯 엎드리기 지성이요 예술이로다
눈물 없는 슬픔 얻었네 분노 없는 침묵 얻었네
종소리 맞추어 종의 행렬 따르던 얼뜨기들
은인자중 분노조절 윤리헌장 무릎 꿇고 갖다 바치네
3. 내실(內實)
노력하면 못 될 거 없다고 가르치지만
남들한테니까 하는 소리
실상 출세의 길은 새치기 날치기 가로채기에 있나니
명문 중고 대학에 군필(軍必)이며 해외 유학까지
보결 보궐 땅굴 파고, 특례 특별 낙하산 타고
사시 행시 의사 회계사 감정사 토익 토플 아이엘츠
야매로 터널 뚫고 안 되면 집돈 쓰며 9년 10년 노니다가
운으로 합격하고 지름길 승진한 뒤 고위직 낚아채어
정의 공평 폭파하고 반칙 탈법 위조 찍고 편취 약취 새치기
투기 정보 미래 정보, 특허기술 산업기밀 귀신 몰래 탈취하나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얼뜨기들
눈치 보기 오락가락 줄잡기 줄타기 전쟁에 여념이 없네
이런 얼뜨기도 많았네
야매시장에서 생쥐 눈치 늑대이빨 얻어 걸치고
구호(口號)부대 해킹부대 맞불부대 댓글부대 자원입대하여
남의 음치에 분노하고 남의 평발 개탄하고 남의 쌍꺼풀 비웃으며
안 돼도 하면 된다 코피 흘리며 따라 외치고
양심 물러가라 너도 그렇다 치고 빠지면서 내실 기한 얼뜨기들
그러나 얼마 멀리 못가 바람 빠져서
사방으로 머리 조아리며 못 갖춘 죄 반성하고
모다 팔자소관이요, 공수래공수거요
인생 즐거웠다 소풍 잘 다녔다 내실 기하는 얼뜨기들
4. 건달 세상
혁명의 심장은 피를 먹고 박동하느니
겁먹은 얼뜨기들 자연에 살겠노라, 핑계 후에 종적 감추고
죄 많은 이부터 공적비 세우고 요소요소 집안사람 심어
혁명에 목숨 걸었던 시인, 변절자로 위리안치
미제 뜬구름 중국제 황사구름으로 요령(鐃鈴) 치며 길을 잡는데
불공평을 공평으로, 하찮은 것들을 같잖은 것들로 읽고
당한 자, 찢긴 자, 과거사 털자는 자, 불순분자로 낙인찍고
고꾸라져도 협동헌신, 민생(民生) 팔아 얼뜨기들 다독이네
포만한 착취의 뒷짐, 법치의 팔자걸음 걸어올 때
양심 없는 학자의 올곧은 소신, 백로처럼 파르르 날개를 떠네
개천에서 나던 용(龍)은 콧김도 조짐이 없고
용 대신 축산 오물, 플라스틱 비닐 쪼가리 개천마다 길을 막네
아홉 식구 한 방에 누워
동치미 무 씹고 국물 넘기며 볼 살 올리던 추억
동지섣달 한 이불 밑에서 발끝으로 서로의 체온을 재던
배고파도 배고픈 줄 모르던 시절 찾을 길 없네
요령 따르던 얼뜨기들 속 불에 눈귀가 멀어
나이트클럽, 코인투기장, 다단계 매장, 놀이 없는 운동장에서
아니면 인간 밖 예배당 조명아래서
찌르고 소리 지르며 서로 끌어안고 몸을 불사르네
엉 엉 엉, 불안하고 불공평한 불만이여, 비현실적인 현실이여
엉 엉 엉, 무엇이든 하면 다 이루어지는 건달들의 세상
5. 외로워도 그립지 않고
해악 크게 입힐수록 복 받는 세월
모르는 것 없는 이, 아는 것 없어서 출세를 하고
복 받고, 출세한 자, 더욱 쌓아 힘을 뻗치니
젊은이들 애 낳기 사절하고 조상 차례 기제사 멀리 돌다가
더 가진 것 없어? 조상님 안주머니나 들추고 돌아다니네
춥고 배고픈 자 피땀으로 반성할 때
한 푼 베푼 적이 없는 시인 국가 지원금 받으려고
허상이 진상이다 진상이 허상이다 난문(難文) 삼매경에 깨춤을 추네
참고래 뱃속에서 비철금속 플라스틱 쏟아져 나오고
폐유에 갇힌 앨버트로스 숨구멍 뚫느라 몸부림을 치나니
사라졌구나, 내기 없이 즐거웠던 자치기, 점수 없는 무반주 노래
샅바 없이도 하하 헤헤, 온종일 땀 흘리던 민둥씨름
속 빌수록 자랑 되던 엿치기 사라졌구나
우리가 가득 들었던 우리 집 어디로 갔나?
뭉근히 익어가는 화롯불에 함께 익던 형 동생 누이의 숨기척
없다, 빛깔도 냄새도 남지 않았다
떨거지도 외국풍물을 알아야 인생 아느니
눈은 일본산 입은 중국산
눈 코 두개골 미제 닮아야 미인이라 암기한다
때맞추어 미제 미사일 대금 고지서 집집이 날아 드는구나
그리움도 외로움도 길이 들어서
외로워도 그립지 않고 그리워도 외롭지 않다
떨거지며 얼뜨기며 근육운동 유산소운동
애재라, 작고 확고한 행복 줍느라 머리 감을 새 없도다
6. 혁명의 나팔소리
손발 큰 미중일러 무시로 드나들며 군사패권 경제패권 칼춤을 추고
겉으로는 상호주의 실상에는 일방주의
수틀리면 하청(下請) 줄까, 끊을까 건너뛸까
쥐어박을까 윽박지르며 삥땅 뜯기 재미 붙여
영토인력일자리 사이버우주환경 탄소배출권마저 장악하네
국회에서 법원에서 언론 교회 병원에서
정의 혁명, 선거 혁명, 혁명의 꽃놀이에 날 새우며
군자 현자 부자 건달 편당 짓고 담합하나니
악착같이 개선한다, 만인의 자유를 막연한 자유로
콕 집어 개혁한다, 노동조합연합을 근로실적증진회로
확실하게 혁명한다, 장애인연맹은 유약부랑자형제복지회로
기득권 철폐한다, 직장인기득권 노약자기득권 백성기득권
다단계 먹이사슬 뉴 네트워크 법제화에 이르렀도다
정치 경제 행정 언론 종교 교육에 다단계 튼실히 구축하도다
상처 없는 생명 없다 멀리서 보자, 시인은 여유의 미학 설파하면서
선악 애증 경계 없는 비눗방울 형형색색 마구 날리누나
죄 지어도 두렵지 않는 혁명의 나팔소리 방방곡곡 울려퍼지네
인간 수명 늘어난다고 하나 사는 날이 살 저미는 날
수재(水災) 화재 산재 인재에 살아 있는 날이 아니 사는 날
손발 비어있건만 다시 또 비우라니, 맨살 벗기 일상인 날
천사는 지하에서 눈 내리깐 채 계산기 두들기고
서로 남 먹으라, 불판 위에 남기던 고기 두어 점
배고파도 매달아두던 까치밥 홍시 몇 점 문맹으로 밀려났네
타고 난 것도 손에 쥔 것도 없는 얼뜨기들
꼼지락거려 보건만 얻어 걸칠 일이 없구나
“할로 쪼꼬레또 할로 껌”
US병사가 손에 쥐어준 혁명의 첫 시간
애재라, 그때가 혁명의 끝자리였나?
7. 웃기네
미군 병사가 남기고 간 마을누나 성병에 세상을 뜨고
누나의 동생, 초콜릿 조르던 친구는 청년에 이민 떠났네
판단의 칼 기회의 뚜껑 하수구에서 녹슬고
정의의 종 자유의 북 제멋에 울고불고 돌다 종적 감추네
법은 법 밖에서 들락날락
사회는 사회 밖에서 반사회의 날을 벼리네
심장 없는 신문 방송 면피용 후릿그물 질 날 새는 줄 모르고
고개 숙인 놈 고개 숙인 죄로 고개 들지 못할 때
고개 쳐든 놈들 머리 자랑 얼굴 자랑 피부 자랑 간땡이 자랑
별유천지 비인간― 인간계에 사람 없고 반려견계에 개가 없나니
무위진인(無位眞人) 놀아나던 시인들 놀라서 틀니 찾으러 더듬다가
저작(咀嚼)질 포기하고 물러나 시적 자율 뒤에 숨네
생일밥 제삿밥 동네방네 나누고 나면
땟거리 없이도 등 따시고 배부르던 시절 흘러갔네
한 이불에 도리뱅뱅 아홉 짝 발 함께 담고 체온 나누던 형제자매
부양(扶養)문제 유산(遺産)문제로 산산조각 흩어지고
뒷골목 비둘기 쓰레기 봉다리 뜯으며 도시민의 식생 따르네
방역마스크 목에 두른 까마귀 컵라면 빈 통을 파고 있네
신(神)이 눈 멀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린 성직자들은
거대한 방주(方舟) 몰아 멀리 인간 밖을 맴돌고
신이 계시다 믿는 얼뜨기들 제 가죽 벗어 제단의 향료를 짜네
주먹 없는 건달들이 주먹으로 주름잡는 웃기는 세상
혁명이여 무정하구나
혁명하지 못 하는 자 혁명 바로 그대뿐이다
개미떼 벌떼 쥐똥나무 은사시나무 이미 혁명을 이루었나니
자유여, 자유인 양 반죽거리지 마라
장구애비 무당거미 말똥구리도 이미 자유를 이루었나니
자유롭지 않은 자 자유 그대뿐이다
얼뜨기들 눈 감고 귀 막고 입 지운 채
배운 바 복창한다
일하지 않는 자 더 먹으며 양심 비운 자 더욱 선량하리라
8. 가면(假面) 세상
가면(假面)이로다
뱀 가면, 나무 가면, 사자 가면, 천사 가면, 용기의 가면
정의의 가면 쓴 정의의 가면
사랑의 가면 쓴 사랑의 가면
진실의 가면 쓰고 진실한 가면
맨얼굴인데 더께더께 맨얼굴 갖다 붙인 가면 맨얼굴
자유를 독점하는 자 자유 민주 부르짖고
평등을 독점하는 자 공평사회 부르짖고
약탈을 일삼는 자 질서와 법치 부르짖나니
두꺼운 낯짝 몽롱한 말본새로
뱀 행세 나무 행세 사자 행세 천사 행세 정의의 기사 행세
코키오! D씨는 가면 벗은 본모습 더 찾으라 하고
N씨는 초인적인 변검(變臉)만이 무료(無聊)를 벗긴다 하고
F씨는 내면도 가면도 상처일 뿐이라 가면 벗지 못한다 하고
L씨는 주체라느니 양심이라느니 애초에 말짱 가면이요
나는 곧 남, 나는 없다는 가면 팔이를 하네
비닐로 땅을 덮고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세상
입법 가면, 사법 가면, 행정 가면, 언론 가면
앞에서도 뒤에서도 보이지 않고 속살 파고드는 진드기 가면
가면을 벗은 말은 말을 감추고
가면을 벗은 정의는 정의를 내세우지 않고
가면을 벗은 사랑은 사랑을 말하지 않고
가면을 벗은 공평은 공평의 얼굴을 내지 않는다 해도
가면을 쓰고 듣는 세상, 겉말도 속말도 가면인 세상
가면 없는 나라에 관한 소문조차 담 넘어간 세상
가면 없는 세상으로 가는 말도 울리지 않는 세상
가면 벗은 뱀, 가면 벗은 나무 우리 함께 살았더라는
전설조차 발을 감춘 가면의 세상
입맛이 가면, 몸매도 가면, 본심도 가면인 세상
9. 훈요(訓要)
사람이 밥이다
3대필수영양소에 앞서는 원천 영양원 인간
배고플 때 먹고 배부를 때 먹고
속 풀이로 먹고 먹을수록 더 먹히는 완전건강기능식품
날로는 쫀득쫀득, 구우면 겉 바싹 속 촉촉
남의 입엣 도로 꺼내고, 남의 손엣 도로 빼앗고
인의예지신진선미 시대적 소명 사회적 양심 밑반찬 깔고
삼켜라 인간, 건위 보양 강장 식품
생각 없이 앞장서고 사고 없이 판단하라
케이스바이케이스, 몰라도 아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케이스바이케이스, 굽힐 데 굽히고 밟을 데 더 밟고
케이스바이케이스, 똥내도 향기롭다 향내 나도 똥내 난다
먹지 않고 사는 듯 입지 않고 사는 듯 청렴 광채 뿜뿜 뿜으며
안 되는 일 없단다 마음 놓고 즐기게 하되
다음 생에도 다단계, 가진 순(順)으로 줄 설 것인 즉
밑에서 아래에서 놀게 밟아놓으라
법이란 소수의 다수가 엮는 그물
진실 되게 초지일관 진실을 멀리 하라
소수(小數)를 끌어들여 다수를 가두리하고
케이스바이케이스, 현실은 내가 갖고 환상은 남 주어라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지는 복지세상 외치다
복창하며 기어오를라치면 혁명이다! 싹 다 비우고 살라 하고
비워놓은 재화며 잔머리 낟가리 싹쓸이 쓸어 담아라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쌓지 못할 산을 쌓아라
원천 영양원 인간, 갖고 놀다 먹고 데리고 놀다 삼키고
밑 닦는 데 쓰고 깔고 자는 데 쓰고 심심풀이 쥐어박는 데 쓰라
뒤돌아보지 마라, 돌아보면 돌이 되느니
10. 흐릿한 방
막 내리고 불 꺼진 방
흐리멍덩한 그 방으로 가는 문 아직 있을까?
바다가 먼저 젖은 자의 것이 아니듯
앞선 이, 뒤선 이 없이 흐릿한 방
말이 먼저 뱉는 자의 것이 아니듯
주인 없고 등수(等數) 없는 방
새들의 노래가 새들만의 노래가 아니듯
집 지을 땅, 연명을 위한 곡식
주섬주섬 쓰는 대로 쓰다 어질러 놓는
얼뜨기들의 방
풀씨들 방향 없이 날다 저마다 자리 찾아 내리듯
셈 없이 공기 마셔도 시비에 말리지 않듯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흐리멍덩한 방
넘어진 이 일어나고 잃은 이 잃은 만큼 되찾는 방
별빛 달빛 햇빛이 어두운 구석부터 찾아들 듯
별빛 달빛 햇빛이 방향 바꾸어가며 어둠을 녹여내듯
얻은 이, 못 얻은 이 걸어온 길은 달라도
먹을거리 누울 자리 고루 갖춘 방
일 이루지 못하면 다른 일이 찾아와 꼬리치는 방
은행도 주식시장도 냉장고도 없는 방
절창도 음치도 말재주도 없는 얼뜨기들
바닥에 떨어지면 으샤샤 불기둥 되어 함께 일어나는 방
춥고 배고픈 놈부터 들이는 따시고 배부른 방
불 꺼진 그 방 흐릿한 그 방 가는 문 아직 있을까?
높이 쌓기, 앞서 달리기, 환히 밝히기 흉이 되고
자연으로 내주기, 흐리멍덩하기 몸에 익은 방
하찮은 몸놀림이 신명으로 어우러져
둘이 셋이 되고 셋이 다섯 여섯이 되는
나와 너 사이 너와 그 사이
내가 있어도 나는 없고 내가 없어도 내가 엄연한 방
없음으로 확고한 흐릿한 그 방
불 꺼진 그 방으로 가는 문 남아 있을까?
11. 그날은 오지 않으리
그날은 오지 않으리
혁명이 혁명의 가면에 침을 뱉고
귓속마다 넘치는 이별의 노래, 이별에서 이별하는 날
맨 아랫것들이 수십 미터 공중 농성장에서 내려와
노래하며 식탁으로 가 앉는 날
손톱으로 철제 사슬을 끊고 가슴으로 탄환을 막아
가상과 추상의 불을 끄는 그날, 그날은 오지 않으리
주먹 없는 얼뜨기, 건사한 건달이 되고
시인 축에 들지 못한 얼뜨기, 맑은 땀내 뿜는 시인이 되어
헛웃음 벗어던지고. 줄타기 끼어들기 잔머리 벗어던지고
잡티 없이 껄껄껄, 속엣 말 해대는 날
아아, 사랑이 제 손으로 봉긋한 가슴을 추스르며
정의가 처박아 두었던 놋그릇 호호 닦아 광을 내며
가난이 슬프지 않고 외로움이 아프지 않고
만나도, 아니 만나도 혼자라도 여럿으로 깨춤 추는 날
그 날은 오지 않으리
뱀과 뱀이 늘어져 햇볕에 찬 피 데우며 얼크러지고
아침이면 나뭇가지에서 닭들이 꼬끼요, 먼동을 전하는
낮이면 참새 떼 이 집 저 집 소식 물어 나르는 날
마당에는 소 돼지 사람 따라 다니며 등 쓸어달라고 조르는 날
담장 없이 사는 주민들 아침저녁 빗자루 메고 나와
못 들어도 인사 하고 안 보여도 구시렁구시렁 안부 전하는
그날 다시는 오지 않으리
위도 모르고 아래도 모르고 오른쪽 왼쪽 방위도 없이
모르게 오고 모르고 놓치게 되리, 그러다 영영 오지 않으리
12. 그래도 가네
아직도 가고 있네, 길 없는 길
손안의 청색광에 눈 문드러지고 이별의 노래에 귀 베인 채
짓밟고도 규칙상 밟지 않은 척
밟히고도 예의상 밟히지 않은 척
폭력이 평화를 작동하고 불의가 정의를 작동하는 알고리즘
억압이 자유를 작동하고 비겁을 변명하는 철학사상 공유하며
허영을 변명하는 문화예술 둘러쓰고
발길질에 채여 굴러 가네
병든 지구를 위해 약 쓰자 악을 쓰며 나는 빠지고
지구가 폭발하면 화성 가서 살자하고 나만 빠지고
혁명? 미개의 잠꼬대, 비인간의 도로(徒勞)
비바람에 바지춤 끌어올려가면서 굴러 가네
죽을둥살둥 산정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던 자 오래전에 사라졌네
마늘과 쑥으로 석 달 열흘 목숨 보듬던 자 사라졌네
디지털 포렌식으로 내장 다 까밝혀도 눈물 보이지 않네
거대한 바윗덩이에 깔리는 순간에도 묻지 않네 따지지 않네
미용실 도는 골목 길 우다다다다 달려드는 배달 오토바이
아직도 서로 모르네
양말 한 묶음에 5천원 혁명 한 두름 얹어 1천원
할인마트 옆 난전에 눈꺼풀 내려앉네
이름도 얼굴도 보이지 않네
입 지우고 눈 지우고 얼굴 지운 채 흘러들 가네
신진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