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0 주일설교
네로에게 상고(上告)한 바울
사도행전 25:1~12
12월 7일 서울고등법원에서 검찰은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습니다. 조희연씨는 친(親)전교조 교육감인데 해직된 전교조 교사 5명을 부당하게 특별채용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조희연씨는 특별채용을 하면서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며 항소했고 2심에서 검찰이 2년을 구형한 것입니다.
교육감은 흔히 교육 대통령이라고 불릴 만큼 권한이 막강한 자리인데 이렇게 재판을 하면 나중에 유죄가 확정되더라도 교육감 임기를 다 채울 것 같습니다. 조희연 재판만이 아니라 오늘날 재판은 다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3심 제도는 억울하게 처벌받는 사람을 없애기 위해 만든 제도인데 때로는 죄인에게 권리를 다 누리게 해 줍니다. 재판 결과 유죄가 된다면 그동안 범죄자가 교육부 수장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재판과 비교해서 바울의 재판은 정반대였습니다. 로마법은 모든 법률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법의 나라 로마의 총독이 진행한 재판은 매우 불합리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부당한 재판을 받은 바울의 선택을 통해 신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배워봅시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한 걸음씩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벨릭스에게 재판받고 2년 후에 총독이 교체되었습니다. 새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Φῆστος)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을 만났더니 그들이 바울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2절의 ‘고소할새’(ἐμφανίζω)라는 말은 5절의 ‘고발하라’(κατηγορέω)라는 단어와는 달리 총독에게 일러바쳤다는 뜻입니다. 또 그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도록 호의를 베풀어달라고 베스도에게 부탁했습니다. 여기서 호의(好意)는 헬라어로 χάρις인데 은혜(恩惠)라는 말입니다.
“총독 각하, 전임자 벨릭스 총독에게 악독한 사람 하나를 잡아 주었더니 그걸 처결하지 않고 2년이나 묵혀두었답니다. 부디 저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불러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자의 죄상을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제사장이 총독에게 은혜를 부탁하는 것은 상당히 수상합니다. 자기들이 가이사랴에 가서 바울을 고발하면 되는데 굳이 바울을 데려와달라고 은혜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이상합니까? 사실은 그들이 바울을 데려오는 도중에 기습해서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3절).
베스도 총독도 그게 이상했든지 혹은 벨릭스에게서 바울을 암살하려는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든지 그들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거절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바울은 가이사랴에 잘 구류해 두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가이사랴에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걸어 다니던 시절에 사람을 가이사랴에 보내어 바울을 데리고 오려면 여러 날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가이사랴에 와서 고발하라고 했습니다.
베스도는 예루살렘에 8일 혹은 10일 있다가 가이사랴로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8일 혹은 10일은 무슨 뜻일까요? 오는 날과 가는 날을 빼면 머문 날이 8일이고 합치면 10일이 되겠죠. 베스도가 가이사랴에 도착한 다음 날 재판이 열리고 유대인들은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울의 죄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율법이나 성전이나 황제에게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바울은 무죄입니다. 증거 없이 허위 사실을 고발하는 것은 법률 용어로 무고죄(誣告罪)입니다. 이런 허위 고발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2년 전에 벨릭스 총독 앞에서도 더둘로 변호사가 바울을 세 가지 죄목으로 고발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무죄를 주장하자 더둘로는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재판에서도 바울의 항변에 유대인들을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니 바울은 무죄이고 유대인들은 무고죄입니다.
바울의 재판은 서두에 말한 조희연 재판과 정반대입니다. 조희연은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는데 그가 항소해서 2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기간에 조희연은 서울시 교육감직을 유지하고 월급도 다 받고 있습니다. 참고로 서울시 교육감의 연봉은 135,398,000입니다. (매월 11,283,000원)
반면에 바울은 1심에서 무죄가 증명되었는데도 2년 동안 잡혀 있었고 2심에서도 무죄가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베스도 총독은 무죄를 선언하지 않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다시 재판받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법의 나라 로마의 재판관이 할 말은 아닙니다. 하여간 정치인들은 참 간교합니다.
바로 이때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그냥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겠다는 말만으로는 약하게 보일까 봐 로마에 있는 황제 앞에서 재판받겠다고 상고(上告)했습니다. (법률 용어/ 항소: 2심 요청, 상고: 3심 요청)
바울은 자기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면 죽어도 좋으나 유대인들의 고발은 모두 거짓말이므로 황제 앞에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자가 황제에게 상고하면 총독은 반드시 그 죄수를 황제에게 보내는 것이 법입니다. 그 당시 베스도를 총독으로 임명한 황제는 네로였는데 네로도 초창기에는 정신이 온전했습니다.
바울은 마음이 급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3:11에서 주님은 바울이 로마에서도 예수님을 증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이사랴 감옥에서 아까운 시간을 많이 허비했습니다. 만일 벨릭스가 반년이나 1년 만에 풀어주었다면 바울은 벌써 로마로 가서 전도하며 교인들을 양육하고 어쩌면 다른 도시로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스도는 유대인 편을 들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갈 참입니다. 2년 전에 동맹한 그 결사대가 여전히 있을 텐데 그 길은 위험합니다. 이러다가는 로마에 전도하러 가지 못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의 몸으로 로마에 가지 못한다면 죄수 신분으로라도 가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그 길도 위험합니다. 그 후에 바울이 로마로 가는 데로 6개월이 걸렸습니다. 또 로마에서 재판을 기다리며 2년을 보냈습니다. 유대인들은 황제 앞에서 바울을 고발했다가 무고죄로 벌 받을 것을 알았기에 결국 오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8:30~31을 보면 바울은 2년 동안 연금당했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벨릭스나 베스도가 바울을 풀어주었더라면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전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에게나 여러분에게나 원하는 대로 안 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특히 바울은 누구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오늘날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원하지 않는 일, 답답한 일이 벌어질까요? 그때나 지금에나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때는 지나고 나면 알 수 있는데 어떤 때는 지난 후에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이 안 될 때는 저런 방법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 것이 바울이 선택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증언할 것이라고만 하셨을 뿐 어떤 신분으로, 어떤 방법으로 간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바울은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벨릭스가 2년이나 바울을 풀어주지 않았는데 만일 베스도도 풀어주지 않는다면 특단의 조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황제에게 상고(上告)해서 죄수 신분으로 로마에 가는 것입니다.
사실 죄수 신분으로 로마에 가는 것은 모험입니다. 재판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황제가 어떤 판결을 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로마에 가야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기에 바울을 황제에게 상고했습니다.
로마에서는 연금되어 있으면서 바울은 손님도 만나고 편지도 쓸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쓴 편지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입니다. 그 편지 속에 보면 바울에게 여러 사람이 오고 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편, 사도행전 28:16을 보면 바울 옆에는 언제나 지키는 군인이 한 명 있었습니다. 군인이 따라다니면 불편함도 있지만 좋은 면도 있습니다. 그 군인은 바울을 감시하지만 자유를 구속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바울 옆에 계속 있으면서 바울이 하는 말을 다 듣습니다. 바울의 설교, 바울의 기도, 바울이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으면 그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후 군인이 교체되면 새로운 젊은이도 같은 과정을 밟게 됩니다.
저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젊은 장교 하나가 경호원처럼 따라다니며 내 설교를 다 듣고 내 기도를 다 듣고 내가 쓰는 글을 다 읽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말을 다 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인이나 가족도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군인이 있으면 그러면 얼마 후에 그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며 부지런히 기도하는데도 마음대로 잘 안 되고,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답답한 기간이 지속되는 것은 여러분만의 일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것이 모든 사람의 일상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왜 나만 이렇게 힘들고 나만 답답하고 나만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느냐고 생각하지 마세요.
차라리 그 속에서 기도하면서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름길이 열리지 않으면 돌아가는 방법을 찾자.”
“쉬운 길이 막히면 어려운 길과 맞서보자.”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나를 그 길로 인도하셨고 그 길이 더 좋은, 아니 최선의 길이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답답하고 지루한 상황에서, 힘들고 괴로운 문제 앞에서 고민하는 신자들에게 딱 맞는 찬양이 있습니다. 고백하는 마음으로 함께 찬양합시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신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 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 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