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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입문] 다음 시간 자료입니다.
제 16강
1958. 7. 17.
완전성 공리의 독단론적 성격·276 | 독일 관념론에서의 완전성 요청 실현·279 | 모델들을 통한 대상영역의 변증법적 규명·279 | 막스 베버의 이상형·281 | 에드문트 후설의 본질직관·283 | 모델들을 통한 사유·284 | 문학작품들 속의 미로적 커뮤니케이션(카프카, 발자크, 도데러)·286 | 체계 개념의 역사적 변천·288
데카르트의 이 공리들 가운데 마지막 규칙인 넷째 공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디서나 완전히 다 열거하고 보편적으로 개관하도록 하여, 내가 아무것도 빼먹지 않았다고 확신하도록 하라.” 여러분이 합리주의라는 말로 무엇을 이해해야 할지 명확히 알고자 한다면, 특히 칸트가 합리주의에 가한 비판에서 합리주의의 독단론적 요소라는 말로 지칭한 계기를 생^생히 떠올리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이른바 철학의 기본조류들에 대한 일반적 성격규정들에 만족하는 대신, 실제로 이 데카르트의 명제를 통해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또 아주 구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 요구 속에는 일단 전적으로 독단적이고 실제로 어떤 식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전제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어떤 구속력 있는 인식 본연의 기준으로 여기는 그 완전성을 실제로 얻기 위해 여러분이 염두에 두어야 하고 또 여러분이 처분할 수 있는 요소들을 여러분이 사실상 완전히 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232)(입문276-277)
여러분은 완전성 공리가 구상된 수학의 극히 협소한 영역 바깥에서 이 완전성 공리를 적용할 경우 실제로 인식의 사물화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사물화 개념을 실로 빈번히 사용했는데, 내가 여러분에게 바로 이 예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 의미에서 사물화와 관련된다고 하겠습니다. 즉 인식의 대상과 인식 자체 사이에 어떤 제삼의 것, 말하자면 직접적 경험, 인식 대상 자체에 대한 인식의 직접적 관계를 중단하고 실제로 정지시킨다고 할 수 있는 어떤 질서, 주체에 의^해 사태에 자의적으로 부여된 원칙, 일종의 도식주의가 끼어든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233)(입문277-278)
따라서 실제로 이 완전성의 원칙은 자명하게도 어떤 포괄적 체계의 원칙과 직접 동일한데, 그것은 처음부터 어떤 인식의 자의적 행위를 통해 여기까지만 인식되어야 하고 그 이상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될 때에만, 그리고 마치 이 사유경제적 행위를 통해 준비된 질료 속에서 그 다음에 그러한 질서가 수립될 수 있을 때에만 의미 있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제한을 하지 않을 경우,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완전성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사실상 완전성 공리는 단순한 독단으로 되고 맙니다.(입문278)
칸트 이후 독일 관념론의 노력과 역설적으로 심지어 헤겔 자신의 노력을, 인식에 접근하는 질료를, 그러니까 우리가 무조건 체계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 자체를 나름으로 또한 의식에 근거해 지어냄으로써, 그러니까 의식으로부터 그것을 연역하려 시도함으로써 −그 다음에는 이 질서가 실제로 그것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엄청난 난관을 해결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객관을 완전히 주관으로, 혹은 좀 더 엄밀히 말해 존재자를 완전히 정신의 절대성으로 용해하려는 근본적인 독일 관념론의 의도는 다름 아니라 이 체계적 모티프에서, 그러니까 사실상 여기서 데카르트의 경우 단지 독단적으로 확정되어 있을 뿐인 것, 즉 그런 부류의 완전성을 인식의 구성을 통해, 인식론 자체의 정초를 통해 정당화하려는 모티프에서, 따라서 인식 자체를 어떤 점에서 외부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어떤 것으로, 본래 의식이 모든 것을 자체로부^터 산출한다는 단순한 이유에 근거해 모든 것을 자체 내에 받아들이는 어떤 것으로 규정하려는 모티프에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234)(입문278-279)
다만 그럴 경우 물론 한 가지 어려움이 생겨납니다. (…) 인식 자체의 총괄개념이 인식된 것의 총괄개념일 뿐이라면, 도대체 인식의 의미는 무엇이어야 하고,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인식하는지를 설명하는 난관이 그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처럼 실제로 엄격히 수행된 동일성을 통해 실제로 인식 전체가 단 하나의 동어반복으로 변하지 않는가, 또 인식이 실제로 언제나 그 자체를 반복함으로써 바로 그것이 본래 의도하는 것, 즉 그것 자체와 동일하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 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 그 난관입니다. 헤겔은,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암시한 바와 같이 각 개별 계기 속에서 주체와 객체의 비동일성, 비-동일-화를 주장하고, 이제 바로 이 모순을, 즉 판단과 그 사태의 이 비-동일-화와 아울러 그러한 동일성을 주장하는 개별 판단의 필연적 좌절을, 개별 판단을 자체 너머로 몰아가고 마침내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의미의 체계와 같은 어떤 것을 실제로 구성함으로써, 그러한 문제도 풀고자 시도했습니다.(입문279)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 속에서 부단히 새로운 인식 요소들을 만나지 않을 것인지 알지 못할 경우, 우리 인식의 완전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대상은 그 자체 내에 무한한 측면을 지니고 있어서 전혀 새로운 것이 첨가될 필요도 없이 사태 자체가 매 순간 무한히 새로운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단순히 고집스럽게 경험주의적으로 그때그때 새로운 것에 자신을 내맡기고 이^로써 아예 모든 인식을 사실상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습니까.(235) 그렇다면 우리는 인식의 완전성을 추구하지 말아야겠지만, 다른 한편 또한 당연히 개별 인식행위들을 고립시키고 이로써 자체 내에 머무는 것으로, 그처럼 전체에 대한 관계를 내포하지 않는 구속력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될 것입니다.(입문279-280)
사실상 철학에서는 본래 모델들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나는 한 철학 혹은 한 사유의 실체가 이른바 그것의 테제들 혹은 개별 진술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유 뒤에 존재하면서 개별 대상적 계기들을 그때그때 비춰주는 광원에 있다고 여러분에게 말했는데, 이는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여러분에게 말하는 바에도 적용됩니다. 즉 이 광원, 이 불빛은 사실상 그것이 부각시키는 개별 대상들, 특정한 대상들을 비추지만 −이 점에서 실증주의와 사실상 유사하다고 해도 좋습니다− 이 경우 이처럼 특정하게 인식된 것으로부터 또한 아무튼 존재하는 다른 모든 대상들에도 빛이 비춰지고 반사됩니다.(236) (…) 어떤 확인의 단순한 제한적 타당성과 반대되는 철학적 진리의 한 척도는 그것이 특정하게 인식된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인식된 것에 얼마^나 많은 빛을 확산할 수 있느냐, 인식의 이 힘의 중심으로부터 인식하는 기능 자체 속으로 얼마나 많은 것이 실제로 이끌려 들어가게 되느냐 하는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다소 행정을 모방하여 조형된 상위개념 아래 단순히 통합하는 대신 특정한 인식으로부터 조명하게-하려는 이 의도, 바로 이것이 내게는 본래 철학적 사유에서 관건이 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입문280-281)(237)
막스 베버의 이상형 개념은 사실상 체계 없이 난관을 타개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막스 베버는 하나의 체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경제와 사회 Wirtschaft und Gesellschaft에 담긴 그의 전체 이론에서 어떤 포괄적 보편적 ‘사회’ 개념을 전혀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스 베버는 단순하게 분리를 꾀하는 과학^적 개별 확인을 넘어설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그의 이해 개념만 해도 사실 반실증주의적 개념입니다. 다른 사회학자들은 이 점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어떤 사실을 그 자체로서, 단순한 사실로서 놓아두지 않고 이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즉 그 속의 한 의미를 규정함으로써 그것을 어떤 다른 것, 그것 자체가 아닌 어떤 것에도 투명하게 비쳐지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입문281-282)
이때 막스 베버는 이상형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 개념은 이제 아주 구체적으로 상술하자면, 특수가 포함되는 보편을 지칭하는 기능을 지니지만, 실제로 이 관계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는 않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단지 발견술적 도구이어야 할 것입니다. 즉 개별 현상들, 예컨대 개별경제들은 자본주의라는 이상형에 비춰 평가되고 이로써 그것들은 나름으로 다시 개념적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형이 이러한 질서를 이루어냈는데 경우에 따라 사실들에 의해 논박된다면, 그것은 쉴러의 유명한 무어인처럼 자기 의무를 다한 다음 가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던져지는 것입니다. 또 이상형들의 수는 원칙상 무한합니다. 막스 베버의 주장에 의하면 나는 아무튼 내가 원하는 만큼의 이상형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이때 목표는 단지 조직화라는 과학실천적 목표일 뿐입니다.(입문282)
여기서 여러분은 바로 이 자리에서 내가 도입한 모델 개념과 그가 지극히 가까운 사유 유형을 사용하려 시도했다는 점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238) 다만 그는 근본적으로 실증주의적인 견해를 지녔을 뿐입니다. 즉 그의 경우 특수에 비할 때 보편은 궁극적으로 특징단위들의 약어일 뿐이며, 그는 우리가 여기서 원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파악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보편이 특수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한다는 점을 전혀 보지 않습니다. 이로써 이 광선, 그러니까 현상에 담긴 실제로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이 인식은 단순한 보조작업이 되고 이에는 실제로 아무런 신뢰도 보낼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은 전혀 실체가 없는 어떤 것인데, 왜냐하면 그 대상, 즉 포괄적 보편성 자체가 어떤 실체 없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그것은 다시 무효화됩니다. 달리 말하면 막스 베버의 인식 모델 자체는 변증법 이전 모델, 전통적 논리학의 모델임으로 인해, 그는 무게가 실린 인식론적 범주로서의 모델 개념을 곧 다시 무효화합니다.(입문282-283)
후설은 내가 어떤 개별 대상에서 이 대상의 다소 우연한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그 순수한 본질, 그 본성(Quidditas), 그것을 실제로 그것이게 만드는 것을 직관해낼 수 있고, 이때 나는 그런 대상들 다수에 호소하고 그것들로부터 공통점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다고 믿는데, 이 경우 후설 역시 실제로 개별자가 빛나게 해 주는, 그것을 사실상 그 본성의 차원에서 파악하게 해 주는, 그 실제 상태를 파악하게 해주는 개념, 그 개념이 일련의 대상들을 그 단순한 형식적 통일 아래에서 파악하게 하는 식의 질서개념(Ordnungsbegriff)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전적으로 올바르게 알아차렸습니다. 다만 후설도 내가 개별자로부터 직관해내는 것, 그러니까 나에게 빛을 발하는 본질인 것, 말하자면 모델을 −개별 대상이 나에게 그런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사실상 그 보편개념으로서만 생각한 한에서 전통적인 논리학을 지향하고 있는 점을 보면, 막스 베버와 아주 비슷하게 변증법을 향한 결정적 발걸음 앞에서는 놀라 물러섰습니다.(239)(입문283)
그는 본질 자체에 대해, 개별 대상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보편개념 말고 다른 관념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또 그는 내가 보기에 모델과 유사한 인식방식으로 이 보편이 특수에서 등장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보편성을 다시 전적으로 통상적인 분류법적 논리학의 의미에서 이해했고 이로써 그 자신의 본질 이론에서 엄청난 난관들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외연논리적 보편, 그러니까 질서를 위한 집합(Ordnungs-klasse), 개별 계기들을 받아들이는 개념 등은 물^론 내가 개별자로부터 직관해낼 수 없는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입문283-284)
내가 여기서 여러분에게 암시하려고 한 이 모델 개념은 개별 계기들 가운데 다른 계기들에 빛을 던지는 것이 빛나도록 하려는 시도인 셈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에게 이 점을 털어놓아야겠습니다. 실제로 나 자신이 철학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 내가 출판하는 모든 말은 한 영역을 완전히 다루고자 하는 시도가 결코 아니고, 오히려 모델들을 구상하려는 시도입니다. 물론 그 다음에는 이 모델들로부터 전체 영역으로 그러한 빛이 비춰지고, 이로써 어떤 식으로든 전체영역 또한 수정되거나 규정됩니다. 나 자신은, 그것들이 지금 다소 쓸모가 있든 없든, 아주 엄격히 이 모델 개념을 지향합니다.− 이 모델 개념은 물론 고립되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시킬 때만, 실제로 또한 자체를 넘어서 무엇을 가리킬 때만, 즉 이 경우 밝혀진 특수가 또한 다름 아니라 하나의 보편이라는 요구를 어떤 식으로든 충족시킬 때만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 그것의 필수 규정임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240)(입문284)
이 소통은 모든 것이 하나로 뭉뚱그려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밀한 통로들이 만들어진다는 혹은 가능하다면 그 은밀한 통로들로 가는 문들이 이 모든 개별 인식들에서 열려^ 이 모델들이 서로, −이렇게 말하고 싶기까지 합니다− 은밀히 서로 연관관계를 가지지만, 이 연관관관계가 이제 질서를 부여하는 사유의 자의에 의해 그것들에 각인되지는 않는다고, 오히려 이 연관관계는 나름으로 사태 자체의 통합으로부터 짜여야 한다고, 그것에 대해 사유하는 자는 실제로 아무 힘도 갖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또 이렇게도 말하겠습니다. 즉 개별 모델들의 이러한 소통이 자체로부터 산출되느냐, 아니면 그것이 피상적으로 산출될 수밖에 없느냐 하는 것이 진리의 또 다른 척도, 인식의 풍부함과 구속성의 한 가지 증거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일찍이 지난날 언젠가 체계에 요구한 바를 실제로 수행하는 사유의 연관관계, 모델적 인식들의 연관관계, 이 연관관계는 체계의 성격보다 오히려 미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습니다.(241)(입문284-285)(242)
여러분이 카프카를 주의 깊게 읽을 경우 이 장편 혹은 단편 소설들 전체가 특정한 의미에서 서로 소통한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 배후에 있는 인격의 통일을 통해서나, 혹은 정서(Stimmung)를 통해서 (…) 혹은 세계관적 내용을 통해서 (…)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로는 자체 내적으로 특이한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고 명료하게 표현되었지만, 모든 통일된 개념을 벗어나는 하나의 세계가 온갖 가능한 측면에서 서술되며, 이에 대해 이 사유는 되풀이하여 말하게 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생^명체의 무한한 면을 잘라서 떼어내 버리지 않으면서, 하지만 또한 그것에 맹목적으로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일을 인식이 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미로적 요소를 통해서이며, 이것이 일반적으로 거대 소설형식의 충동들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입문286-287)
이 미로 같은 성격은 인식 자체의 본래적 대상이자 동시에 본래의 본질구성적 주체인 사회구조와 물론 본질적으로 어떤 관계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상 한 사회 속에서 살고, 기능의 연관관계인 그 속에서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소통하지만, 이 소통 관계 자체가 어떤 식으로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전혀 투명하지 않고 오히려 특정한 종류의 강압 속에서 표현되는데, 이 속에서 하나는 다른 것을 발견하지만 전체의 상위개념, 전체가 따르게 될 체계 그 자체가 실제로 분명하고 명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고들이 자체의 보편적 규정상태라는 의미에서 스스로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가운데, 자체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는 점, 또 사고들은 이미 그 보편개념에 환원되고자 하면 본래 그것들이 뜻하는 바를 실제로 거의 언제나 잃어버린다는 점입니다.(입문287)
착상의 개념이 어떤 특정 부류 사고의 단순한 주관적 성격규정 이상의 무엇인가를 말하려면, 따라서 ‘착상’이 누군가에게 무엇이 떠오른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려면, 착상은 실제로 언제나 다음의 계기를 의미합니다. 즉 어떤 사고가 그 추상적 상위개념에 의해 산출되지 않고, 그것이 하나의 구체적 대상에 관련되는 하나의 개별자로서 동시에 자체 너머를 가리키고 이제 개별 계기들을 그 피하조직 구조 속에서, 본래 감추어진 구조 속에서, 서로 연관되도록 하는 힘을 해방시키는 바로 그런 계기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입문287-288)(244)
체계 개념은 우선 존재자의 밀려오는 다양성과 비합리성⋅우발성⋅불가침투성에 맞서 통일의 계기를 고수하는 것 말고는 전혀 아무것도 수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일의 최소치, 말하자면 이처럼 밀려오는 우발성에 맞서 스스로를 주장하는 이 사고 통일의 실존 최소치가 칸트의 경우 바로 체계입니다. 칸트를 계승하는 주요 철학들,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헤겔의 철학에서는 (…) 체계의 요구가 그에 비해 엄청나게 확대됩니다. 즉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전체적 풍요를, 존재자 자체의 풍요를, 순수한 개념에 근거해, 달리 말해 정신에 근거해 전개하려 시도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신과 동일시됨으로써, 말하자면 정신이 모든 것을 자체로부터 산출함으로써, 또한 모든 것을 자체에 복속시키며, 이로써 그 자신이기도 한 모든 것의 주인이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데카르트가 이미 상정한 바와^ 같은 바로 그 완전하고 아무것도 빼놓지 않는 연관관계 속에 존재합니다.(입문288-289)
다만 이 연관관계는 −이는 실제로 칸트 이후 철학의 중요한 충동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더 이상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수학적으로 한정적인 수학의 도식에 따라 상정된 사물적 연관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연관관계는 그와 대조적으로 전체의 자기-자신-산출입니다.(245) 즉 체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더 이상 하나로 통합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제 모든 것을 자체로부터, 이 칸트적 통일점으로부터, 그러니까 통각의 종합으로부터 아무튼 실제로 산출하고자 함으로써 완전하게 되며, 그리하여 체계는 실제로 스스로를 확신하는 생산적 정신의 요체이며, 헤겔의 철학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진리의 고향인 것입니다.(입문289)
이제 우리가 몇 가지 이유로 일종의 시민적 사유의 후진운동, 어떤 퇴행운동에 대해 논할 수 있다면, 이는 체계 개념 자체에도 적용됩니다. 헤겔 이후 사유의 역사에서 이러한 동일성 요구가 일단 붕괴된 다음 체계 개념은 찬밥 신세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체계 개념은 단순한 질서 도식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체계화란 가능한 한 완전하게 분류하고 아무것도 빼먹지 않으려는 노력일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오늘날의 상황에서 특징적이듯이 사실상 철학적 체계 혹은 모든 개별 과학의 체계는 어떤 관리계획, 처리계획의 거푸집, 그러니까 하나의 도식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속에서는 그러한 사유관료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자리를 찾고 이로써 질서 있게 처리될 수 있는 것입니다.(입문289)(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