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사람들 / 미 5:1-4, 눅 1:39-56
페루의 일본대사관, 인질 사태, 구출을 기다림.
전두환, 노태우 감형? 소문, 대선 때문, 석방을 기다림.
누가복음은 예루살렘 성소 앞에서 온 백성의 찬양과 기도 소리 속에 이루어지는 장엄한 제사의식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유대민족의 모습과 깊이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부터 돌아와 세운 나라는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고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장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에수 탄생하실 때의 왕 헤롯은 이방인이었고 로마의 통치를 대행하는 한 부서였다. 대제사장 자리를 얻으려고 많은 분쟁과 정치 권력과의 거래가 있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그들의 가문이었다. 제사장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의 순서에 따라 지금 모든 백성을 대표하고 하나님게 아뢰며 그의 뜻을 받들려고 지성소 앞에 섰다. 그는 오늘도 꼭 하나님의이 응답이 계게시리라 믿고 제사를 드린다.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에 주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분향하는 제단 오른편에 서 있었다. 사가랴는 이미 손과 발과 온 몸을 깨끗이 씻고 며칠동안 마음과 생각을 오로지 하나님께 집중하여 준비하고 이 지성소 앞에 선 것이다. 어떻게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이 백성에게 임하고 모든 그들의 죄가 사해질 것인가 기원하면서 제사를 집행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꼭 그 제사를 받으시리라 믿었지만, 이같이 즉석으로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곧 될 일을 통고해 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 천사는 성전 지성소 앞에서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가정에 아들이 출생한다는 것이 그의 가정의 경사로 그치게 되겠지만, 이 지성소에서 통고한 의미가 무엇일까? 그것이 만민에게 미칠 기쁜 소식의 한부분이니까 그렇게 될만한 중요한 소식인 것이다. 사가랴는 지금 자기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인류 구원의 사업에 참여하도록 선택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은 엄숙한 일이었다. 누가복음은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전 인격이 의롭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역사에 자취를 남길 수 없다.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겠다. 사가랴 부주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그의 약속을 받을만하다고 인정되어 이 기쁜 소식을 맨 먼저 들은 것 같다. 성탄을 기다리는 사라들 가운데 요셉도 있다. 다윗의 자손 요셉은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두고 얼마나 희망에 부풀고, 앞으로 펼쳐질 장래의 생애를 설계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간의 욕망은 마리아가 임신하리라는 말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끌려든 것이었다. 그는 약혼한 아내와 가만히 파혼하여 그녀에게 불명예를 돌리지 않으려 했다. 그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평화를 수립하려 하였다. 그는 자기의 욕심, 복수심이거나 원한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남겨드릴 수 있었다.하나님께서 일하시려 하실 때 ‘아멘, 오셔서 경륜을 이루소서’ 하고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없다.
또 우리는 마리아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려 하실 때 그는 제일 먼저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통해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여 크리스마스의 주역의 일을 하라는 통고를 받았다. 마리아는 이런 놀라운 방문을 받고 하나님의 선하신 경륜에 자신의 몸을 내맡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일하실 것을 용납하고 자기 생애의 행복이나 명예를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성탄절에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의 찬가를 즐겨 읽는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자신을 전부 내어맡기고 그것을 기뻐하는 사람의 심정이 나타나 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주님의 경륜에 있어서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할 것이라고 한다. 마리아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무엇인지, 자기는 왜 행복한지를 알았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이 마리아 찬가는 세계의 모든 교회가 성탄절이 가까워 올 때마다 되새기고 그 위대한 정신을 회상한다.
양치는 목자들은 무엇을 기다렸나? 천사들이 찾아와서 우렁찬 찬양으로 하늘과 땅을 흔들 때에 무엇을 찾았겠나? 그들은 자기들의 남루한 모습이나 냄새나는 옷이나 가난한 사정을 호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외화가 많이 들어와서 부유하게 그들의 지위가 향상되는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베들레헴 마굿간의 어린 예수를 경배하고 그의 표정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온누리에 편만한 것을 믿었다. 한 능력과 힘을 가진 사람이 파견되어 새상의 정사와 권세들을 부끄럽게 하고 침체한 사람들의 희망을 북돋우어 주실 것을 믿었을 것이다. 아기 예수를 보고 그들이 그렇게 기뻐했다고 쓰여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 예수께서 첫번 크리스마스에, 마리아에게, 요셉에게,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목자들과 성전에서 아기를 안고 기뻐하던 시므온이나 안나에게 찾아오실 때 기쁨과 변혁을 선사하던 그것을 우리도 기다리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구원사를 책임진 인물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기드온, 다윗 같은 사람들이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즐거워했다’라고 말한다. 모세도 주의 백성을 위해 받는 모욕을 애굽이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애굽을 떠났다. 또 말하기를 그는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는 것 같이 하여 꾸준히 참았기 때문에 약속된 것을 결국 얻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우리가 다시 찾을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우리가 글자대로 얻는 것이 아닐지라도 하나님께 건 희망을 도로 찾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 아파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원인이 남에게 또는 밖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은 것이다. 그것의 원인이 내게 있다고 생각할 때에 비로소 많은 갈등과 혼란이 해소될 수 있다. 희망을 북돋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돌연한 내방에 너무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겠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 문학자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이 있다. 거기 첫 장면에 장화를 신고 리어카를 끌고 흙탕물을 건너는 노동자들의 대화가 있다. 한 사람(에스트라공)이 찬구에게 ‘자네는 일에 끝장을 보려고 하는데, 대체 무엇을 기다리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부라디미르)는 대답조로 ‘희망을 보류하면 고장이 생기는 법인데’ 한다. 나는 이 말이 의미있어 보인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100년 후 아니 10년 후에나 실현될 것이다’ 하고 보류하고 제쳐두면 그 희망은 녹이 슬고 절름발이가 될 것이다. 대체로 장래에 댜해서 비관적으로 판단함는 것은 신앙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히브히서 기자는 말한다. 우리가 희망을 중단하지 않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 나가기 위해서는 뒷받침이 필요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다. 바라는 것들은 아직 얻어지지 않은 것, 못 얻을 수도 있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은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으로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긴 빅터 프랭클이란 심리학자가 있다. 그는 그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 처참한 생활 가운데서 아직 살아남아야겠다, 결국 죽지 않겠다 하고 몸부림 친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다. 이때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질이 그대로 사라질 수 없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또 한사람은 자기의 남동생이 어디에 아직 살아있는데 나는 꼭 그를 만나고야 말 것이라 믿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프랭클 자신은 자기가 얻은 경험을 전하지 않고 죽을 수 없다고 생각되어서 살아남을 것을 믿었다고 한다. 그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언제나 악몽 속에 살았다. 사람의 살까지도 먹으려다가 들켜서 빼앗긴 사람을 목도하는 무서운 환경에서, 자기가 경험한 것들을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적어 놓았다. 그런데 이것을 비밀경찰에게 몰수당하고서 더욱 이 경험을 바깥 세상에 알리지 않고 죽을 수 없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중에는 이 말을 물론 아는 분도 있겠지만 아도 이 대림절 기간에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다짐해 물으면서,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가 오시는 일을 절실하게 기다리지 않고 있구나 하고 자책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세상의 썩어질 것들의 기대일 때가 많다. 이제 맞이할 다음 해의 새날이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있나?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성탄절을 기다리던 성서의 인물들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경륜이 실현될 것을 겸허한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이어야 하겠다. 사도 바울은 롬 5:5절에서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또 11:2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라고도 하였다. 희망을 지연시키면 고장이 생긴다. 동방박시들이 서쪽 하늘의 별을 보고 사막의 찬 기류와 정처없는 유랑의 길에 의심을 품고 가는 길을 멈추었다면 그들의 생각이 절름발이가 되고 다른 유혹에 몸을 내어 맡기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마음에 속삭이는 별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희망을 그들에게 남겼던 것이 이 입 저 귀로 전해져서 그들이 하늘에서 본 것과 결합되어 그들의 출발을 격려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가졌던 희망을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사막의 더운 볕과 돌도 깨어버릴 밤의 추위가 그들의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다. 우리가 아직 만족이 없고 고통이 따라오며,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기다림을 멈추지 말아야 하겠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의 인격과 말씀에서 우리는 진실된 것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함께 예배드리는 믿는 성도들의 마음이 아직 황페하고 성화되지 못하고 세속적이며 자기의 욕구로 차 있음을 발견한다. 물론 우리의 마음도 그같은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다. 지금보다는 변화된 마음이, 더 넓은 시야가, 의심하는 빛없이 신뢰하는 의지가 우리를 지배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희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줄 믿는다. 희망을 중단시켜서는 안된다. 첫번 성탄절 때처럼 희망의 간직하고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우리도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야겠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자.
(1996-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