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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사람 / 사 61:1-11, 요 1:19-28
이번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며 그의 오심을 마음껏 경배해야 한다.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아니하는 세명의 인물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보다 6개월 먼저 왔던 세례 요한이라는 인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더불어 이 세 인물은 가려져 버린 상태로 역사 속에서, 또는 성서 기록 속에서 묻혀 버렸다. 조금 더 관심을 갖는다면 이 세 인물들의 인품이라든지,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셉의 가정을 통해서 태어났는지, 또 세례 요한의 인기가 그토록 충천하였는데 그에 관한 기사는 성서 기록에 두쪽 정도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의문과 아쉬움이 생기게 된다. 특별히 세례 요한은 당시에 요한이라는 이름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요한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가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해서 세례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그가 혜성처럼 나타나서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요단강가에서 회개 운동을 일으키고 또 세례를 베풀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모인 자 중에서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푼 이 사실을 복음서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오늘 아침 우리가 관심을 가져 보고자 하는 것은 이 세례 요한에 대한 그리스도의 평가이다. 마 11:11절을 보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을 직선적으로 해석하면 ‘가장 큰 사람’이라,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 세례 요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례 요한은 가장 큰 인물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오늘 아침은, 도대체 세례 요한은 어떤 인물이기에 가장 큰 인물이며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이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없는지 세례 요한에 비교하여 우리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 연말을 앞두고 회개하며, 반성하며 생각하는 아침이 되기를 바란다.
1. 가장 큰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은 지극히 겸손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로마의 압제 아래서 정치적인 탄압을 받았고, 가난에 절어서 걸인과 병자들이 많았고, 종교는 형식화되었고 율법주의는 지나치게 인간주의로 타락해 버렸다. 마치 조용하던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 특별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에게 그의 설교는 크나큰 도전과 자극을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다. 이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소위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세례 요한에게 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네가 누구냐? 우리가 기다리는, 정치적인 변화와 혁명을 가져올,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냐?’ 이때에 세례 요한은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회개운동을 불러일으켰던, 이미 세상을 떠난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이냐? 환생한 것이냐? 네가 엘리야냐?’ 그렇게 물었을 때에 세례 요한은 ‘아니다’ 그랬다. ‘그러면 말라기에 기록된 또는 신명기에 나타나는 이 세상을 구원할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 선지자냐?’ 그렇게 물었다. 이때 세례 요한은 ‘그도 아니다’ 그랬다. 그 자신은 분명히 나는 이 세상을 혁명시킬 그리스도도 아니요, 또한 엘리야가 다시 살아온 것도 아니요, 너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세주 그리스도도 아니다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였다. 분명히 이렇게 물었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당시에 세례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구세주로, 정치적인 혁명가로, 또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환생하여 돌아온 인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만약 한마디만 슬그머니 얼버무리기만 하면, 나는 잘 모르겠다고 엉거주춤하면서 아니라고 하는 말을 분명히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단시일 안에 메시야로서 활약하면서 존경을 받을 수가 있었으며, 인기를 독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구름떼와 같이 몰려오는데도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한 그의 단호함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도 아니요 또한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세 번이나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는 세례 요한의 결단과 겸손을 우리는 깊이 이해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제종교연구소(소장 탁명환)에서 나온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재림주라고 하는 사람이 몇 년 전만 해도 27명이나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에다가 자기를 바꾸어 세워 놓는 것이 소위 이단이요, 사이비 종파요, 신흥종교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허세가 많으며, 얼마나 자기를 과장하며, 자기의 실상보다 높이고 자기를 감추고 덮어 버리려고 하는 허식주의가 많은 그같은 세상 속에서 세례 요한이 ‘아니다. 너희가 쳐다보고, 너희가 존경하고 따를 그 장본인은 내 뒤에 오시는 이이며, 나는 그의 갈 길을 준비하러 왔고,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겸손의 모습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여러분은 혹 ‘세례 요한이 아니라고 한 것은 쉬운 일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상황과 배경 속에서 이해할 때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권력 지향적이요, 명예 지향적인 오늘의 세상에서 우리는 늘 허세에 매여 있으며, 얼마나 자기를 가려버리고 자기 실상 이상으로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세례 요한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부족함이 많은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는 겸손의 사람이었던 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겸손이란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겸손하지 못해서 실수하고, 불신을 받고, 거짓된 인격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겸손은 인간 생활의 미덕 중에서 사닥다리의 첫 계단과 같다.’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모든 성공, 모든 인격, 원만한 인품이 될 수 있는 우리의 미덕 중에 첫 번째 계단과 같은 것이 겸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가장 밑바닥에 겸손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큰 사람인지, 정말로 위대한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리에 계신 갈보리교회 성도 여러분들도 기왕이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여인이 낳은 중에 이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이 없다고 한 이 세례 요한의 겸손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2. 가장 큰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은 사명을 똑바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보통 왕이 행차할 때는 왕 앞에서 전령처럼 왕의 행차를 알리는 무리들이 있다. 앞에 가면서 ‘임금님 납시오’ 외친다든지. 또는 등불을 켜들고 앞에서 전령처럼 외치는 자를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역할을 바로 세례 요한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오시는 이의 앞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시는 이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 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회개운동을 일으키려고 왔다고 하는 이 말씀을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백낙준 박사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서비스적인 인물이었다.’ 자기를 위해서 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땅에 와서 짧은 인생을 살다가 순직하고 말았다. 세례 요한은 한마디로 말하면 서비스적인 존재, 시비스적인 인격, 시비스적인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서비스적인 정치가, 서비스적인 교육자, 생산자, 소비자, 학생, 스승 그리고 종교지도자, 모두가 서비스적인 위치에 자기를 놓는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다고 했다. 내 목숨까지 바쳐서, 희생해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 이 내용은 예수님 자신이 곧 서비스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며,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여기 소리는 원어로 ‘포네’이다. 여러분이 소리라는 말을 생각할 때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 1:2절을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쓰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곧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자기가 이 땅에 온 것은, 곧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은 말씀 대신, 로고스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소리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는 섬기는 자가 위대하다는 것을, 섬기는자가 큰 사람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일본 교토에서 택시업을 하는 훌륭한 분이 있다. ‘교토25시’라는 TV프로에 소개된 적이 있다. 이분이 유봉식 씨라는 분인데, 이 분이 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주인이 되려거든 종이 되라. 종이 되면 주인이 된다.’ 사회나 직장이나 교회나 가정이나 어디서든지 필요한, 아름다운 말씀이다. 떠들고 목에 힘을 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묵묵히 마음을 겸허하게 하고, 섬기는 자로서의, 종으로서의 위치를 지킬 때 그가 참 주인이 될 수 있다. 참 위대한 인물이 된다는 사실을 세례 요한에게서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큰 자는 섬기는 자이다. 참으로 큰 자는 자기의 사명을 확실히 확인하는 자이다. 내게 주어진 직책을 다 감당하고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는 겸손한 삶이 위대한 인물이 가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서비스적인 섬김의 삶을 살았던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가장 큰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은 삶이 깨끗하였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오는 유대인들에게, 또는 지도자들에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맹렬하게 말씀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돌들을 명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며, 종교지도자라고 하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한다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왜 이렇게 위대했는가? 깨끗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깨끗했다. 도덕적으로 깨끗했다. 약대털 옷을 입고 야인으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사심없이 살았던 사람인 것이다. 그는 사기친 일이 없다. 그는 범법한 일이 없다. 그는 부정하거나 부패하거나 도덕적으로 타락된 사람이 아니다. 깨끗한 인물이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을 가만히 보세요. 이 세례 요한은 분봉왕 헤롯을 책망했다. 그 당시 유대를 지배하고 있던 헤롯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외쳤다. 왜 그랬나? 이때 헤롯왕은 자기의 남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아내로 삼고서 살았다. 그것이 바로 헤로디아인 것이다. 이때 세례 요한은 ‘일국을 다스리는 왕이 이렇게 도덕적으로 부패해서야 되겠느냐? 회개하라’고 외쳤다. 헤롯이 마음으로는 자기의 잘못을 어느 정도 뉘우치는데 요한이 시끄럽게 떠드니까 그의 부하들이 감옥에 그를 가두었다. 그러나 헤롯은 감히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소리요, 양심의 소리요, 하나님의 말씀의 현실화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깨끗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그러기에 힘이 있었고 그러기에 위대했던 것이다. 헤롯은 무척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헤롯왕이 생일이 되었다. 생일이 왔는데 헤로디아가 데려왔던 딸, 엄격히 말해서 조카 딸이 춤을 추게 되었다. 술에 취한 헤롯은 기분이 좋졸아졌다. 딸을 보고 ‘네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테니 네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만조백관이 다 있는 자리에서 왕이 그렇게 말을 하였다. 그러니까 이 딸이 얼마나 사특한가? 자기가 요청하지 않고 뛰어가서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물었다. 그때 헤로디아는 이때다 생각하고 ‘네가 가서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서 소반에 담아서 달라고 그래라’ 하자 딸은 왕 앞에 가서 ‘지금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서 소반에 담아 주십시오. 그 외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헤롯은 무척 고민했다. 그러나 맹세한 일이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소반에 담아 딸에게 주었던 것이다. 의롭게 살던 세례 요한이, 깨끗하게 살던 그가 목베임을 당하여 소반 위에 얹혀졌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오늘 이 역사 속애서 오을 이 아침에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살아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역사의 종말이 올 때까지 세례 요한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의롭게 사는 자의 생애가 목베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의 외침과 그의 피흘림과 그의 삶의 스타일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기에 위대한 것이다. 영원토록 기억하고 흠모하고 삶의 사표로 삼아야 할 이같은 인물 이상 더 위대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 요한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기 위하여 깨끗하게 살도록 노력하자. 신앙은 말이 아니고 삶이다. 신앙은 신념이며, 삶이며, 일상 속에서, 생활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의 현실 속에서의 생활 그 자체가 신앙이 되어야 한다. 내 삶의 현재, 현실이, 내 삶의 장이, 그리스도의 복음화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빛과 소금이 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결론을 말씀드리겠다. 세례 요한의 삶은 곧 예수의 삶의 모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겸손의 사람이요, 일생 동안 섬김을 통하여 살았던 섬김에 살던 사람이요, 자기는 죄가 없으면서도 죄인들을 위하여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세례 요한의 삶을 다시 조명할 수 있다. ‘위대한 사람이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이보다 위대한 사람은 없다.’ 왜? 나의 사는 모습을 미리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겸손, 섬김 뿐만 아니라 희생적 죽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 모두가 오늘의 세례 요한이 되도록, 그래서 오늘의 위대한 인물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노력하며 애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5-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