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와 소동
2021. 12. 19(주일낮예배) 마태복음 2:1-10
1971년 7월 30일 제임스 어윈은 아폴로 15호를 타고 달에 도착하였다. 인류 역사상 4번째로 달에 도착한 어윈은 월면차를 타고 시속 11Km로 주행을 하고, 또 달표면에 성조기를 꽂았다. 아마 어윈은 달표면을 시속 11Km로 달릴 때, 그리고 성조기를 꽂을 때 감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윈은 시편 19편을 암송한다.
(시 19:1-4)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달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어윈은 천지만물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선포하는 시편 19편을 암송하면서 하나님 그렇습니다. 저 태양도, 저 목성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을 내가 보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감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지구로 돌아오던 어윈은 창 밖으로 축구공만한 지구를 보았다. 그 지구를 보는 순간 어윈의 입술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이 암송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크고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축구공만한 작은 지구에 사는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구에 도착한 후 선교사가 되어 20년동안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있는가? 오늘 본문은 천문학과 점성술에 능통한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온다. 그리고 헤롯왕에게 유대인으로 나신 왕이 어디 계시냐?(마 2:2)고 물었다. 그때 헤롯과 예루살렘은 소동하였다(마 2:3)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소동한다(ταρασσω)는 단어은 마태복음 14:26에도 나온다. 풍랑으로 인하여 고통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을 물위를 걸어서 오신다. 그때 제자들은 두려워하여 유령이다고 고함을 치는데, 제자들이 두려워하였다는 단어가 ταρασσω이다.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예루살렘에 왕이 오셨는데, 그들은 풍랑이는 바다에서 유령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혼비백산하는 것처럼 두려워 떨었던 것이다.
왜 헤롯과 예루살렘은 소동하였는가?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족속이었다. 그런데 갈릴리의 총독이 된 헤롯은 로마의 힘을 얻어서 반대세력을 축출한다. 그리고 로마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신의 정권을 소유하기 위하여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건축광이던 헤롯은 원형경기장, 극장, 기념비, 우상제단을 건축하였다. 그 건축물 중에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의 증축이었는데, 헤롯은 46년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였다. 이렇게 많은 건축을 한 헤롯은 그에 필요한 노동과 돈을 다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부과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들은 세금과 노역으로 고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세금과 부역으로 고통하는 예루살렘 백성들은 그 고통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했는가? 고통 중에 이스라엘은 창세기 49장 10절의 말씀을 생각해야 했다.
(창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야곱은 유다에게 통치의 규가 떠나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유다는 지금 자신들의 규를 에돔족속에게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세금과 부역으로 고통하는 그때에 참된 평화를 주시는 실로가 오셔서 모든 백성을 복종케 하실 참된 왕에 대하여 기대해야 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유다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소망을 다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예루살렘은 메시야의 탄생소식에 그들은 소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고통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지 않은 예루살렘 백성은 무엇을 생각하고 살았겠는가? 마가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은 당시 말씀을 가르치는 서기관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서기관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은 긴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에 다닐 때도 제사를 드릴 때 입는 끝이 바닥을 끄는 긴 옷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였다.
왜 서기관들은 시장을 갈 때도 긴 옷을 입었고, 또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겠는가? 그런데 서기관의 악행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마가복음 12장 40절에는 서기관의 또 다른 악행을 예수님은 이렇게 고발하고 있다.
(막 12: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서기관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라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나오는 사건이 과부의 두렙돈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앞에 앉아서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하는지를 보고 있었다. 그때 부자들이 헌금을 많이 하였는데, 한 과부는 두렙돈, 한고드란트를 헌금하였다. 이것을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1천원 정도된다. 그런데 예수님인 과부가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면 그 헌금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런데 그 과부의 귀한 헌금을 하나님의 온전한 뜻대로 사용되지 못하게 막아서는 사람이 서기관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으로 서기관들은 자신을 높이고, 또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더 나아가서 과부의 헌신까지 착취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서기관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서기관을 주의하라고 하신 이유는 그 당시 예루살렘에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순종하고 살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과 권력이 되어 자신을 높이고, 대접받고, 또 자기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시킨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는 동방박사의 말에 소동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의 이 모습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1992년 빌 클린턴을 대통령이 되게 한 선거구호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였다. 클린턴이 이 구호를 외치기 전까지 외교력이 좋았던 공화당 부시대통령의 지지가 훨씬 높았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미국국민은 클린턴이 부요함을 줄 수 있다는 그 구호에 마음을 바꾸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그때 한나라당 이명박대통령이 선거유세 때 외친 구호가 MB 747이었다. 이명박대통령은 임기 5년 안에 경제 7%성장, 10년 내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을 달성하겠다고 공약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부자될 수 있다는 말에 표를 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학생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15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만약에 10억을 받을 조건으로 1년간 감옥에 가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는 질문하였는데, 고등학생은 40%, 중학생은 28%, 초등학생은 12%가 좋다고 하였다. 남의 물건을 주워서 가져도 좋습니까? 하는 질문에 고등학생 65%, 중학생 51%, 초등학생 36%가 내가 가져도 좋다고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2012년에 조사한 내용과 2015년에 조사한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도표 참조>
참고로 우리나라는 2012년(15위, 1조1천295억달러)보다 2015년(11위, 1조3천779억달러)이 경제적으로 더 부요해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와 도덕을 버리고 더 많은 돈과 부요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2021년에 조사하면 청소년들은 더 많은 돈과 부요를 요구하고 있을 것이다.
안타깝지 않는가? 배움의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무엇이 정의인가? 정의를 위하여 나는 내 젊음을 어떻게 불태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그러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데, 범죄하더라고 부자로 살아야 하겠다는 학생의 더 많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모습이다.
그런데 이 안타까움이 예수님이 오실 때 소동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모습이 아닌가? 오늘 본문에서 동방박사의 모습들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동방박사들은 헤롯에게 유대인으로 나신 왕을 경배하러 왔다고 하였다. 여기서 경배하다는 말은 억지로 누가 시켜서 무릎을 꿇는다는 뜻이 아니다. 자의적으로 유대인으로 나신 왕을 찾고, 또 그 앞에 무릎꿇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주를 경배하기를 진심으로 원했던 동방박사들은 별이 아기위에 머문 것을 보고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아니 오늘 읽지 않았지만, 동방박사들은 그 아기를 보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으로 경배하는 것이다.
지금 이 모습이 헤롯과 예루살렘과 얼마나 큰 차이가 나고 있는가? 그런데 이 모습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도 똑같이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욕망을 찾아서 살았던 사람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에 소동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욕망이 아니라,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살아온 사람은 기뻐하고 기뻐함으로 주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어떤 모습으로 만날 수 있겠는가? 북유럽 어느 시골교회에 기도하면 소원이 잘 이루어지는 예수님 동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문지기가 예수님이 서 있는 그 곳에 자신도 한번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침묵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예수님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한 부자가 돈뭉치를 들고 와서 이 돈으로 도박을 하러 가는데,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부자는 돈뭉치를 예배당에 두고 그냥 가버렸다. 그때 문지기는 부자를 부르고 싶었지만,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아내가 병에 걸려 죽게 된 가난한 농부가 기도하러 왔다. 농부는 눈물을 흘리면서 아내를 치료할 수 있는 돈을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눈을 떴는데, 옆에 있는 돈뭉치를 발견하고 하나님이 주신 응답으로 여기고 그 돈뭉치를 가지고 갔다. 문지기는 농부에게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먼 나라로 항해를 떠나는 청년이 기도하러 왔다. 청년은 안전한 항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그때 동뭉치를 두고 간 부자가 왔다. 그리고 청년의 멱살을 잡으며 돈뭉치를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청년은 자기는 돈을 가지지 않았다고, 또 지금 가야 항해를 떠날 수 있다고 이야기 하였지만, 부자는 다짜고짜로 경찰서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 순간 문지기는 돈뭉치는 가난한 농부가 가지고 갔다고 말했다. 문지기의 그 말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부자는 농부에게서 돈을 찾을 수 있었고, 청년은 배를 타고 먼 항해를 떠날 수 있었다. 문지기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굉장히 화를 내면서 문지기에게 동상의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자는 어차피 그 돈을 도박장에서 다 날릴 돈이었다. 그 돈이 농부에게 갔더라면, 농부의 아내를 살릴 수 있었는데, 아내를 치료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 잘못이 큰 것은 청년의 문제이다, 청년을 그냥 두었으면, 배를 타지 못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네가 개입하므로 그 청년은 배를 타게 되었고, 그 배는 바다에서 침몰하여 죽게 되었느니라. 내가 침묵으로 일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에 고통한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을 떠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도 침묵으로 일하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침묵하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오늘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가? 마크 밀러(Mark Miller)가 작곡한 I believe(나는 믿네)를 들어보기 바란다. 1945년 2차 대전이 종식되고, 유대인 수용소에 연합군이 들어갔을 때 그 지하실 벽에 이런 낙서가 발견되었다. 어둡고 힘든 상황 가운데 있었던 유대인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앙망하며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s not shining.
(나는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는 것을 믿는다.)
이 글귀를 본 마크 밀러교수는 찬양을 작곡하였다. 그 곡이 지금 여러분이 들은 I believe(나는 믿네) 이다.
I believe in love, even when I don't feel it.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사랑이 있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God, even when God is silent.
(나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것은 I believe in love, I believe in God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주가 오셨다는 선포에 소란이 아니라, 경배자로 주앞에 달려가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