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빈자리
2023. 12. 17(교육국 수료예배) 누가복음 2:1-7
혹시 슈독이라는 말을 아는가? 1962년 미국 대학교 육상선수였던 필 나이트는 신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60년대 아디다스, 퓨마와 같은 독일 런닝화가 시장을 지배하던 때에 곧 일본 런닝화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래서 무작정 오니츠카타이거(현, 아식스)회사를 찾아가서 일본 런닝화를 미국에서 판매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때 일본 직원이 회사 이름이 뭐냐고 물었는데, 자기 방에 걸려있던 파란 리본이 생각나서 필 나이트는 블루리본 회사 대표라고 했다. 그래서 유통계약을 맺은 필 나이트는 아버지의 창고에서 신발을 팔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장속도가 너무 빨라 현금이 따라가지 못하여 파산위기를 겪기도 하고, 또 세금폭탄을 맞아서 FBI에 도망다니기도 한다. 그런데 필 나이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일본 오니츠카타이거의 배신이었다. 오니츠카 타이거가 필 나이트를 버리고 다른 유통사와 계약을 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필 나이트는 신발을 수입하지 않고, 자체 생산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신발을 만들고 혁신적인 마케팅을 벌였다. 그래서 1970년대 후반에 마라톤 선수 프랭크 쇼터와 협력하여 신발을 홍보하고, 1980년 초반에는 마이클 조던과 협약을 맺어 어에 조던 라인을 출시하였다. 그리고 1988년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는데, 그것이 바로 Just Do it(그냥 해라) 이다. 생각만 하지 말고, 움직여라 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된 것이다.
필나이트는 아식스의 배신으로 신발을 만들면서 회사이름을 나이키로 바꾸었다. 그리고 신발에 미쳐서 살았는데, 그런 필 나이트를 사람들은 슈독이라 부른다. 신발에 미친 사람이다는 뜻이다. 제자훈련에 미쳐서 사역한 옥한흠 목사님을 우리가 광인이라 부르고, 이웃사랑에 미쳐서 살았던 장기려 박사를 바보의사라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이 미쳐서 살고 있는가? 내수동교회 박지웅 목사님은 하나님을 위한 빈자리 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그 설교에서 목사님은 망하는 인생의 특징을 가룟유다의 자살에서 찾았다. 마태복음 27장 3절과 5절에 보면 스스로라는 단어가 나온다. 먼저 그 부분을 읽기 바란다.
(마 27: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마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예수님은 은 30에 판 유다는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은 메시야이시므로 자기가 은 30에 팔았을 때 신적권위로 그 난관을 헤쳐나올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결박되어서 총독 빌라도에 넘겨진 것이다. 여기서 결박되었다(2절)는 것은 사형이나 극형에 처할 수 있는 죄수에게 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결박된 것을 주목하여 본 유다는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다는 후회한다. 그리고 5절을 보면 그 유다는 이제 스스로 목매어 죽는다. 누가 유다에게 죽으라고 말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 생각에 가득하여서 내가 잘못했어! 하고 자책하였고, 또 자기 생각에 가득차서 이런 나는 죽어야 해! 하고 자살한 것이다.
이렇게 자살한 유다의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가?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모른다고 3번 부인하였다. 그때 마가는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막 14:71)라고 기록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며 부인하였는데, 너도 그 도당이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큰 고통 가운데 있을 때 베드로는 자기 혼자 살기 위하여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살하지 않고 갈릴리로 간다.
왜 베드로가 갈릴리로 갔겠는가?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26장 31-32절로 말씀하신다. 함께 읽기 바란다.
(마 26:31-32)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살아난 후에 갈릴리로 갈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을 들었던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갈릴리로 간 것이다. 유다는 죄책감에 가득차 있었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소망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가? 페르시아인들은 카펫을 짤 때 의도적으로 흠을 만든다고 한다. 또 미국 인디언들은 구슬을 꿸 때 흠있는 것을 넣는다고 한다. 그래서 완전은 오직 내가 섬기는 신에게만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누구보다 카펫을 잘 만들 수 있고, 또 구슬을 잘 꿸 수 있지만 그들은 항상 자기들의 신의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 삶에도 하나님의 자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리 스토르벨 박사는 쓴 은혜 은혜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리 스토르벨은 하나님은 혼혈인 고아, 마약 중독자, 학살범, 노숙인, 불륜을 저지른 목사와 그 사모, 사역자인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방황하던 탕자는 물론이고, 엘리트 무신론자에게도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 엘리트 무신론자인 헤이즌 박사의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착하고 바른 우등생이었던 헤이즌 박사는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에서 여학생의 전도를 받아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서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2년이 지나 한 학교에서 전도집회하는 것을 보았는데, 한 강사가 자신은 술에 찌들어 살았고, 나쁜 짓을 하며 살았는데, 주님이 찾아와서 나를 구원하여 주었습니다 는 간증을 하였다. 그 간증을 들은 헤이즌도 강단에 올라가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간증하고 싶었다.
저는 술에 절어 살지도 않았고, 사회의 쓰레기도 아니었고, 장래가 매우 촉망되었으며, 모두 제가 성공 가도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런 제게도 하나님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알고 보니 식탁에서 예절 바르고, 학교에서 A학점을 받고, 공손하게 말하고, 사람들을 친절히 대하는 것 따위는 모두 아주 사소한 문제더군요. 사실 저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반항하고 있었습니다. 능력이 무한하여 말씀 한마디로 수십억 개의 은하계를 만드실 수 있는 그분께 말입니다. 그런 게 중대한 문제지요! 그동안 저는 그분을 무시하며 등을 돌렸고, 제 교만, 잘난 척, 이기심, 온갖 은밀한 기만과 잘못된 욕망 등의 죄가 그분과 저 사이를 엄청나게 벌려 놓았습니다. 그것이 제 안에 소외감과 불안감을 조장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죄가 하는 일이지요.
헤이즌 박사는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그 삶이 바로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삶과 생각에 없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지는 않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탄생할 때 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우셔야 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당시 로마의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에 호적을 명령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명절에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로마 전역은 고향을 찾는 민족대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요셉은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110Km를 걸어야 했다.
그의 걸음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제 아내가 주남이를 가졌을 때 고신대학병원에서 자갈치까지 3Km를 걸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퉁퉁부은 아내의 발을 저는 주물러야 했다. 그런데 요셉은 만삭의 마리아와 110Km를 걸어야 했다. 당시 비포장길은 16km정도 걸을 수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일주일을 꼬박 걸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마리아는 해산의 고통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때 요셉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방을 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요셉과 마리아를 위하여 방을 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눕게 된 것이다.
왜 만왕의 왕께서 구유에 누운 것인가? 요셉이 오랜 거리를 걸어온 것처럼 많은 사람들도 다 그렇게 피곤하게 걸어서 왔을 것이다. 그랬던 사람들은 자기의 편안함을 위하여 출산을 앞둔 사람에게 방을 내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여관주인은 출산할 빈방이 있어도 소란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에 거절하였을 것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여관주인은 방을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태어날 때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이 그 시대 사람과 똑같지 않는가? 영국의 대 철학자였고 수학자였던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교수의 이야기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화이트헤드는 젊은 시절 철학과 수학에 심취하면서 신앙에 대한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를 멀리하고 살았는데, 황혼기가 되어서 폭설에 눈에 빠져 허덕이는 할머니를 발견한다. 그래서 할머니를 구해주었더니 고맙다는 말과 함께 교회를 찾아올 것같은 기세로 어느 교회에 다니는 지를 물었다. 그때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했더니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다 늙은 사람이 어쩌자고,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다가 나처럼,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나는 저 눈 구덩이 속에서, 죽는 줄 알고 계속해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구만
할머니의 그 말에 화이트헤드 박사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허덕일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철학과 수학은 어떤 능력이 될까? 하는 고민을 하던 화이트헤드 박사는 철학과 수학에 회의를 품어 다시 교회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화이트헤드 교수님이 교회에 갔을 때 담임 목사님은 너무 기뻤다. 그래서 주일에 설교할 때 철학과 신앙의 대화라는 주제로 설교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수학과 신앙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설교하였다. 목사님은 화이트헤드 박사를 앞에 두고 심혈을 기우려 설교를 준비한 것이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을 때 화이트헤드 박사님은 목사님께 이렇게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