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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가. / 主の御声を聞き取る方法。( 2023년 9월 24일 주일예배)
본문; 요한복음 14:25-31
요 14:25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이 말을 너희에게 말하였다. 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27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28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온다고 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29 지금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31 다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내게 분부하신 그대로 내가 행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다. 일어나거라. 여기에서 떠나자."
25.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といたときに、これらのことを話した。26. しかし、辯護者、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が、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話したことをことごとく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る。27. わたしは、平和をあなたがたに残し、わたしの平和を与える。わたしはこれを、世が与えるように与えるのではない。心を騒がせるな。おびえるな。28. 『わたしは去って行くが、また、あなたがたのところへ戻って来る』と言っ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た。わたしを愛しているなら、わたしが父のもとに行くのを喜んでくれるはずだ。父はわたしよりも偉大な方だからである。29. 事が起こったときに、あなたがたが信じるようにと、今、その事の起こる前に話しておく。30. もはや、あなたがたと多くを語るまい。世の支配者が来るからである。だが、彼はわたしを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い。31. わたしが父を愛し、父がお命じになったとおりに行っていることを、世は知るべきである。さあ、立て。ここから出かけよう。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 거듭난 사람은 누구든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약속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성령께서 거듭난 이의 내면세계에 임재하고 계심을 분명히 인식하고 주목할 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령의 말씀이 아닌 다른 주장들과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을 분별하여 성령의 음성에 귀가 열리고, 눈이 밝아지는 놀라운 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다시금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재중에 기억해야 할 가르침을 전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특별히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려 주시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26절에는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말씀과 본보기를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육신적인 존재가 아닌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활동하시는 방법이 조금은 특별하신 분이십니다. 만일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그의 역사하심이 일반적인 방법과 다를 바가 없다면 굳이 우리의 내면세계에 임재하실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냥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 놓은 돌이나 나무를 재료로 만들어진 우상과 구별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의 음성도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의 영역에서 떠오르도록 역사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음성을, 생각을 통해 들을 수 있도록...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또한 그 내면에 살게 해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음성을 육성으로만 들으면 듣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믿는 자들이 육신적으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생겨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그 방에 나타나셨는데요. 하필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하는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이 직접 그 손과 발의 못자국에 손을 넣어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다시 제자들이 모였던 곳에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때는 현장에 도마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7)
그러자 도마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 20:29)
도마처럼 육신의 눈으로 보고서야, 혹은 귀로 듣고서야 믿겠다는 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의 음성을 육성으로만 듣는 것이라고 한다면 주님을 믿는 믿음과 상관없이 청각장애가 없는 사람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경계선이 청각에 장애를 갖느냐의 여부로 구별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구원받고 거듭난 자의 구별은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서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영생을 사느냐의 여부입니다.
그리고 육성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앙적인 면에서 교만에 빠지거나, 미혹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특수한 존재라는 교만한 우월의식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정죄하고 멸시할 수 있는 미혹에 빠질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주님의 음성을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청각장애의 여부와 상관없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 속한 양은 누구나 그 음성을 듣는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지요.
성경은 곳곳에서 생각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증언들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행 11:16)
베드로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을 통해 다시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육성으로 들리는 어떤 기적적이고 희귀하게 특별하게 선택받는 소수의 권한이나 종교적 실력이나 자랑거리처럼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일상을 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생각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다는 말은 우리의 생각에 떠오르는 성경의 말씀과 영적인 가르침을 통해 나의 행동과 선택, 그리고 가치관과 세계관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운전하거나 때로는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방향전환 혹은 선택의 조정을 우리는 “성령님의 조명”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령님께서 내 갈 길과 발걸음을 영적인 빛으로 비추어 주신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시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설교를 준비하며 읽은 예화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뿌리 깊은 죄의 유혹에 빠져 있던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죄를 지을 때마다 마음에서 경고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의 마음에서는 유혹과 경고 사이의 무서운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갈등이 성령의 경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해 듣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하나님의 음성에 무릎 꿇고 복종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이기지 못했던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지극히 소수나 혹은 특별히 타고난 초능력과 같은 뭔가를 가진 일부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도 같은 기적이 아닙니다. 하루에 하루만큼 주어지는 일상의 일과들을 비추고 계시는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하여 주님께서 예비하고 계시는 상급을 받게 될 때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임을 믿습니다.
늘 믿음으로 마음의 귀를 열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죄사함을 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해서 생각이 항상 완벽하고 순수하게 주님의 음성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의 생각이라고, 혹은 그가 기억하는 성경의 구절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성령님의 음성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면... 여러분이 너무도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는 구절인 욥기 8장 7절에 기록된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 라는 구절은 실은 아무런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고난을 받는 욥이라는 의인의 말에 대답을 하는 수아 사람 빌닷이라는 친구의 발언인데요. 그는 조건부적인 인과응보(因果応報)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욥이 지금이라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잘못을 시인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여쁘게 보셔서 보응하실 것이라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과정에 나온 말인 것이지요. 즉, 하나님께 이쁨받을 짓을 하면 반드시 큰 복을 받을 것이니, 먼저 하나님께 실수한 것을 찾아내고, 다시 복을 구하라는 취지의 발언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탄식을 인정하시고, 욥의 세 친구들의 발언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 42:7)
여기서 엘리바스의 두 친구, 즉 소발과 빌닷의 대답과 주장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성도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과 기억나는 성경구절이라고 해서 모두 주님의 음성은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성령님의 음성만이 아니라, 우리 육신의 생각, 그리고 사탄이 예전에 던져 주었던 생각도 함께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냥 방치하지 말고 어떤 것이 주님의 생각인지, 육신의 생각인지, 혹은 사탄이 던져 놓은 미혹의 생각인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지혜나 혹은 분별력이 없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음성을 분별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기도하는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는 자세를 갖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도하지요.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소원빌기이며, 기도가 아닌 기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소원하는 바를 그저 반복해서 이루어지길 비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소원만 비는 기원에 대해서 이렇게 경계하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7)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나의 지혜가 부족하고 분별력이 없는 것을 인정하며 주님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는 항상 구해야 할 기도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우리 안에는 자기의 육신적인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서 떠올리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소위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이기적인 생각들이지요. 이런 생각들은 세속적이고 일반적인 상식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에서는 그다지 크게 문제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들의 충돌로 인해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각자 자기의 입장에서 유익한 것만을 생각하고 주장하기 때문에 사회제도가 필요하고, 사회적인 합의와 체계가 필요한데요. 그러한 사회에서 누군가는 욕구를 모두 달성하고 누군가는 그 욕구를 해소하지 못해 불만을 품고 미움과 분노로 시간을 채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하고 주장하는 육신의 생각은 결국 모순적이게도 인간의 인간다움을 위협하는 장애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의 생각 안에는 종종 사탄이 던져주는 유혹도 들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인간의 육신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한, 혹은 기본적인 욕구를 보장하기 위한 여러가지 속된 장치들이나 제도들이 있는데요. 이러한 여건과 형편들이 생각처럼 모든 이들에게 제대로 역할을 다하여 욕구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 현실의 한계입니다.
그런 한계의 제한으로 인해 실족하여 넘어지는 어렵고 힘든 순간에 사탄은 우리에게 악하고 나쁜 생각들을 던져 넣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마치 우리 자신에게서 떠오른 것처럼 위장하지요.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에게도 사탄은 역사하였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 13:2)
사탄 곧 마귀는 예수 믿는 이들을 이제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나쁜 생각과 악한 생각을 던져 넣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 거듭나서 거룩한 성령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사악하고 나쁜 짓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12명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을 때 밤새 기도하고 부르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눅 6:12-13)
그러니 우리에게도 이런 사탄(마귀)이 주는 생각이 침투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주님께 주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며 기도하면, 반드시 분별하는 지혜와 명철을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증언하고 계십니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잠 2:6)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내 안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주님께 올리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대로 정리가 될 것입니다. 사탄이 던져 주는 음성은 완전히 폐기되도록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것은 오로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님께 초점을 맞추며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우리의 인생에서 지켜야 할 많은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이 있습니다. 나의 존재감, 소유권, 관계, 재산, 인간의 존엄, 장래의 소망 등등. 그러나 그 수많은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입니다.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고 오가는 그 공간인 마음을 지켜야 하는 것이지요.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기 위해 언제나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 늘 그 말씀을 들으며, 기도로 나의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 땅에 거룩한 삶의 소명과 그 소명에 합당한 일을 해 나아갈 사명을 맡기신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음성을 바르게 분별하여 놀랍도록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열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은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님께서 임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영생의 주인공들은 주님의 음성을 내면세계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통하여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명확하고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이의 모든 생각이 주님의 음성인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욕구를 원하는 생각도 있고, 사탄이 던져 놓은 사악한 생각의 찌꺼기도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늘 귀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나의 소망과 결단에 대해 수시로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와 명철을 주셔서 우리를 가장 사람답게, 아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는 능력의 인생을 주님 앞에 쌓아가는 풍요롭고 풍족한 존재가 되는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며, 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서 맺게 하시는 열매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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