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옥 소시집
rinnal@naver.com
칼의 묵비
▶계간<현대시조)신인상으로 등단
(1995)
▶공무원문예대전 시조부문 우수상,현
대시조오늘의시조상, 현대시조문학상
수상
▶시집 <막사발의 노래>, <무의탁못>.한
국시조시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
부,오늘의시조시인회의, 맥시조문학
회원
※현대시조 160호 2026년 여름호
야夜한 만국회의장
.
둥근 탁자 위 달처럼 모여앉은 술잔이
원샷! 서로를 부딪는 불콰한, 밤
경계는 허물어지고
화기가 애애하다.
넥타이 풀어지고 허리끈도 느슨해지고
품위를 걸어놓은 어깨마저 내려앉아
혀끝을 비틀거리던 문장
그만 길을 놓친다.
유체이탈 주당들이 만국회의 여는 난장
허공 국적 외계어가 와글와글 끓는 동안
버려질 속기록이듯
구겨지는 담배꽁초.
발바닥을 읽다
발톱을 깎으려고
뒤집어놓은 발바닥
크레타 상형문자 같은
빗금을 바라보다
행간의 은유를 읽는다
" 뒤집으면
등이 된다"
꼰대가 MZ에게
모두가 가는 길이 꼭 좋은 길은 아니지만
열심히 일하고 휴일은 가족과 함께 하는
네 눈에 쫌쫌따리가 갓생들의 소확행이야.
사는게 거기서 거기, 오십보백보라도
웬만한 허기와 결핍 쯤 참고 견디고 이겨내며
저마다 탑을 쌓듯이 푸른 여일 꿈꾸지.
너는 달라 너무 달라, 메꿀 수 없는 거리
영끌빚투 취향저격 금사빠 멘붕 갑분싸
관심충 찢겨야 직성인 팩트폭격 잼민이.
인공지능 메타버스로 세상천지 꿰뚫지만
혼틈 청개구리마냥 머선1로 어디로 튈지
스불재 자낳괴일까 뇌피셜의 끝판왕
좀좀따리 :아주 더디게. 적고 하찮은 양을 모으는 모습
갓생:부지런하고 열심히사는 사람(Godl 生)
영끌빚투: 영혼까지 끌어다가 빚내어 투자하기
멘붕: 멘탈붕괴, ,충격을 받아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음
감분싸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짐
금사빠 :금방 사랑에 빠짐
잼민이:자연령층. 나이 값 어린이처럼 무개념으로 행동하는 인간
자낳괴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관심충: 관심끌려고 하는 사람
머선129:무슨일이야(사투리로 무선 일이구)
스불재: 스스로 불러온 재앙. 자신이 계획한 일로 자신이 고통 받을 때
뇌피설: 뇌 +official. 객관적 근거없이 오롯이 자기 생각만을 근거로한
추측 또는 주장
달빛 아버지
그해 정월대보름, 허둥지둥 달려간 날
간신히 셀로판지처럼 얇은 숨결 붙들고
아버지, 속속 도착할
자식들 기다리시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문지방을 넘으셨네
경황없이 배웅한 그 먼길 어둠너머
휘영청 대보름달이
묵묵히 밝혔을까.
혼백으로 오신다는 해마다 그날이면
제상을 차려놓은 이승 옛집 누옥에
두둥실 다녀가시고
눈시울에 그렁그렁.
쯧
필라델피아 슬럼가 비틀대는 좀비들
풍상에 당당히 맞설 푸른 혈기 다 뜯기고
앙상한 고갱이 뿐인
고사 직전 나무 같다.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야릇한 미소가
사랑의 묘약이듯 쫓아간 한 걸음에
치명적 독소를 묻혀와
혼백이 다 헐린듯.
사지관절 풀려버린 망신창이 여자가
거리의 전봇대를 빨래처럼 휘감고
지옥과 교신을 한다
"기브미 헤로인(give me heroin)'
조류 전성시대
알고리즘에 둥지 튼 새떼가 날고 있다.
지구를 샅샅이 뒤져 낚아채 온 먹잇감을
입으로 방아 찧으며 썰 푸는 것 좀 봐라.
눈과 귀 파고들며 ‘좋아요, 구독’ 채근하는
인플루언서 추임새에 입꾹닫 갓생들도
슬며시 빠져들게 되니 조류들 살판났다.
아무튼, 잘 살아낼게
생계형 가게 열고 대출이자에 짓눌리며
자부룩 지심 돋는 근심을 소거하려
화분을 밖으로 죄 옮기고
호스로 물을 준다.
영문 모른채 입양된 어둑한 실내에서
곤궁한 물과 거름기로 애먼 목숨 부지하며
혈관을 바짝 조이고
사지 오그린 초목들.
생존의무 버거운 듯 시큰둥한 표정이
초록을 발사하며 맹목으로 활짝 핀다
아무튼, 잘 살아내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듯.
칼의 묵비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식칼이 버려졌다
삭제한 쓸모가 남아 부릅뜨게 될까봐
호일로 날이 싸매진채다
조심을 당부하듯.
만번의 담금질과 매질로 단련될 땐
번뜩거리는 양날로 어둠의 권속을 치며
누천년 길이 회자될
검이 되고 싶었을까.
도마 위 필생일망정 허투루 건넜을 리
몰입을 켜켜 쌓아 명제를 숙지하며
자르고 썰고 깎는 일
그 경지에 이르렀을.
뼈를깎아 돋운 서슬 나날 닳고 무뎌지자
신빨 다한 무당의 신통찮은 점괘마냥
문장이 군색해진 지물
저 숙맥의 입꾹닫.
책의 귀거래
서재에 꽂힌 책이 붙박이로 늙었다
곰방대 물고 사는 골방지기 옛 어르신마냥
안색이 누르스름하고 쩐 몸내 설핏 난다.
그 문하 자처하며 우러러 흠모하던
밑줄 친 푸른 문장은 여전히 찬연하고
작고한 원로작가의 유훈이듯 따뜻한데.
갈피마다 지략을 세운 훤칠한 문장의 영토
누대로 물꼬 틔울 온고지신 당부하며
본향인 나무의 집으로 돌아가시는 중이다.
별별 재테크
불황의 긴 터널 속 시국마저 어수선해
구멍가게 열어놓고 파리만 날리는 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이색 알바 있다는데.
주말마다 역전에서 상경버스에 승차하여
단체로 부려지는 광화문 '시국규탄집회장' 에서
나눠준 피켓을 흔들거나
머릿수를 채우는
왕복 버스비 도시락 믹서커피 다 공짜에
배추잎 지폐 두어 장 일당으로 쥐어주니
늘그막 쏠쏠한 쌈짓돈
알짜 재테크라는데
시작메모
시조를 붙들고 걸어온 시간이 어느덧 삼십여 년이다. 하지만 뒤돌
아보면 연륜만 수북이 쌓였을 뿐,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답보의
시간이었다. 기라성 같은 선배, 동료 작가들 사이에서 나의 위치는 과
연 어디쯤인지 궁금한 때도 있었고, 문득 뒤돌아보며 여기까지가 끝은
아닐까 자문한 적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놓지 못하는 것은, 결국 시가 나를 놓지않
았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잘 쓰고 싶은 마음, 한 줄이라도 더 깊이 닿
고 싶은 욕심은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쓰고 또 지우
고, 버리고 다시 붙드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시는 삶을 견디게 하는 한
방식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 마음이 버거워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하면
서 끝내 원고지 앞을 떠나지는 못한다.
앞으로도 서두르지 않되 멈추지 않으며, 내 호흡과 내 걸음으로 삶
의 결을 한 올 한 올 짚어가며 시를 이어가고 싶다. 화려하지 않더라
도, 내 삶의 결이 스며든 단단한 시조 한 편을 남길 수 있도록 더욱 정
진하리라 다짐을 한다.
※현대시조 160호 2026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