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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39
9월1일 [연중 제2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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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이 하느님 앞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겸손>
잔치에 초대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참 못 볼꼴을 보셨습니다. 초대받는 손님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 생애가 겸손과 낮춤 그 자체였던 예수님이셨기에 그런 모습을 견디기가 정말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덕행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행인 겸손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모든 덕행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이 바로 겸손입니다.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이 또한 겸손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영성생활을 해나가셨던 신앙의 모델들, 모든 성인(聖人)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덕이 겸손입니다. 겸손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열등감에 의해,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나는 잘 못합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나는 모릅니다’ 라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내가 충분히 능력이 있고, 갖출 것 다 갖췄으며,
내가 상대방보다 다방면에 우월하면서도 자신을 낮추는 그런 겸양의 덕이 바로 참된 겸손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더욱 요구됩니다.
크신 하느님, 관대하신 하느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나였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티끌 같은 존재, 먼지 같은 존재, 한 마디로 무(無)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생명으로 나를 초대해주셨고,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봉헌생활자로 초대해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는 한 나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겸손의 첫걸음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시간에 종속된 유한한 존재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필연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 유한한 우리들입니다. 채무자이신 하느님 앞에 채권자들인 우리들입니다. 무죄한 하느님 앞에 죄인인 우리들입니다. 심판관이신 하느님 앞에 피고인들인 우리들입니다.
순수한 존재 앞에 선 불순자인 우리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태도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들이지만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덕분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맨 끝자리라도 감지덕지하면서, 늘 기뻐하면서,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는 아침마다 묵묵히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자신의 등에 짊어집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 시간이 오면 낙타는 또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조용히 기다립니다.
언제나 주인 앞에 고분고분 무릎을 꿇는 낙타 모습에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매 순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주인 앞에 말없이 무릎 꿇는 모습, 매일 자신의 의무를 기꺼이 행하는 모습, 주인이 매일 얹어주는 짐을 아무 불평 없이 지고 가는 모습에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낙타는 자신이 지고 가는 짐으로 인해 의미가 있습니다. 낙타에게 짐은 무거우나 짐으로 인해 낙타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고통과 십자가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그 무엇이나 그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더욱 겸손해지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진리는 생각할수록 역설적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할 때 사실 우리는 가장 약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가장 약하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우리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고 그로 인해 우리는 가장 강해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약자이기에, 또는 무지하기에 뒤로 물러서는 나약함이나 비굴함이 결코 아닙니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는 일입니다.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한 걸음 물러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어놓은 그 자리를 하느님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는 일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내려만 갑니다. 계속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심연의 밑바닥 거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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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선생님 병>
‘리듬’의 저자 김상운 씨에게 한 여직원이 파김치가 되어 와서 시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시어머니는 정말 못 말려요. 제가 하는 일엔 무조건 트집부터 잡으니까요.”
명절에 그녀는 동서들과 의논하여 갈비를 준비해 갔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먹어보지도 않고 대뜸 “이거 호주산 갈비 아니냐? 값은 싸지만 맛이 별로더라.”라고 트집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왜 맛없는 싸구려 갈비를 사왔냐는 소리입니다.
반찬을 상에 올려놓자 “작은 접시에 이게 뭐냐? 큰 접시에 담지.”라고 핀잔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파전을 부쳐놓자 쓱 보더니 “웬 계란을 이렇게 쏟아 부었니? 이게 계란전이지 어디 파전이냐?” 하고 면박하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여러 동서 중 유독 자신만을 표적으로 삼는다고 생각하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습니다. 시댁이란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니 남편은 역시 남의 편이었습니다.
“설마 어머니가 당신만을 차별대우하시겠어? 왜 생각이 그렇게 유치해?”
내 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시어머니와 감정이 나빠지니 남편과의 관계도 자꾸 틀어졌습니다.
김상운 씨는 그냥 시어머니 장단에 맞장구를 쳐 주라고만 했습니다. 예컨대 “이거 호주산 갈비 아니냐? 값은 싸지만 맛은 별로더라.”라고 말하면, “어머님도 그런 생각이시죠? 혹시나 해서 한 번 사왔는데 다음에는 역시 한우가 낫겠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어머니의 공격은 거기서 끝납니다.
“그래... 그럼 한 번 먹어나볼까?”
또는 “작은 접시에 이게 뭐냐? 큰 접시에 담지.”라고 말하면, “역시 어머니 말씀이 맞네요. 큰 접시가 낫겠어요.”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이럴 것입니다.
“뭐, 일단 담았으니 흘리지 않게 조심히 먹자.”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상황을 너무도 많이 접합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는 ‘선생님-학생’ 놀이를 하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는 당연히 선생님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떤 며느리가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면 누가 선생님인지 가려보자고 그러는 것입니다. 파전에 계란을 많이 넣든 안 넣든 “제가 학생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이기 전까지는 이 싸움은 멈추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이게 대세예요.”라고 말했다가는 또 다른 공격을 감당해야 합니다. 개가 서로 으르렁 댈 때는 서로 그냥 싸우게 해서 서열을 정해주면 됩니다. 내가 학생이 되려하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존경스러운 선생님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학생임에도 선생님이 되려고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학생 자리에 앉아는 있지만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니 가르치려고만 드는 선생님이 그렇게 존경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참으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선생님은 왠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어서 좋아하게 됩니다. 다 선생님이 되려고 하지 학생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제나 선생님, 혹은 상담사 등과 같이 이미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버린 이들은 이 심각한 ‘선생님 병’에 시달립니다. 강론 시간도 아닌데 계속 가르치고 있는 말투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대가는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저도 “왜 가르치려고만 들어요?”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냥 하던 일이 일상에서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외로워질 것인지, 학생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남편이 “그러게, 당신 말이 맞는 거 같아. 요즘 어머니가 유독 그러시네?”라고 말해서 아내에게 사랑받던지, “당신도 잘못하는 게 있으니까 어머니가 그러시겠지.”라고 충고를 주어서 미움을 받던지 둘 중 하나를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이들을 비유말씀으로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맨 끝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윗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면 끝으로 밀려납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선생님이 되려고 하면 나중엔 학생의 자리로 밀려날 것이고 학생이 되려고 하면 선생님으로 추앙받을 것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모두 알면서도 잘 실천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상대보다 내가 낫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생들에게 천국에 갈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을 대라고 했더니 마더 데레사가 천국에 갈 확률이 가장 높을 것 같다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과연 몇 명에게서 표를 얻었을까요? 75% 정도였습니다. 평생 가난한 사람만을 위해 살아온 마더 데레사도 75% 정도만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천국에 들어갈 것 같느냐는 질문에는 거의 95%가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마더 데레사보다는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선생님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만약 상대가 잘못하는 것을 보고도 알려주지 말아야 하나요?”
당연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언자직’이란 것이 있습니다.
예언자직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이지 내 기분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은 해 주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하고 성경에서 해 줄 말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미워해도 감수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예언자직이 아니고 그냥 선생님 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직을 수행해야 할 때는 살아가면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냥 끝자리에 앉으려고 노력하는 그 겸손한 모습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참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회가 되는대로 끝자리를 차지합시다. 굳이 한 번 가르치자고 선생님 자리를 탐내다 평생 미움 받으며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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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아주 평범한 것들을 소재로 가르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의 짤막한 두 개의 비유는 ‘잔치’라는 소재를 통해 보다 깊고 보편적인 어떤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비유(14,15-24)도 같은 내용이다. 잔치를 우정, 인간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의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조그마한 사건이라도 현실을 초월한 신적인 메시지에로 개방되어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모든 것들이,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것들이 신적인 것에로 나아가는 길, 상징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그러므로 식사에 초대받았을 때나, 다른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할 때에 취해야 할 사회적 행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잔치에 참여해야할 우리의 태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신앙인의 삶은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기에 그 삶 자체가 항상 잔치이다. 그 잔치에 참여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오늘 독서는 말하고 있다.
복음: 루가 14,1.7-14: 하느님 앞에 겸손하라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 모두가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고 하신다. 이 비유는 바로 하늘 나라에 대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짓이나 위선으로 자신을 자랑하여 내세우지 말고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올바른 사람으로 자처하고 자기의 특권을 뽐내어 주장하는 사람을 하늘 나라에서 제외시키신다. 반대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을 받아들이신다. “주님께서는 온유한 이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보여 주신다.”(집회 3,19)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 있어서도, 바리사이파 사람은 마치 식사에 초대받은 이들이 그랬듯이 하느님 앞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지만, 세리는 그러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당하다고 하며 자비를 구한다.
그래서 세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A. Stöger, Vangelo secondo Luca, vol. II, Roma 1969, p. 33)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규범은 겸손이라는 것이다. 겸손을 통해서 낮은 자리를 찾는 것이 하나의 은총이며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행위이다. ‘윗자리로’(10절) 불러 올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는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이다. 내가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손에 우리를 모두 맡길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를 크게 만들어 주신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모델이시다.
그분은 첫째이시지만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립 2,9). 하느님 나라에서의 위대성이란 겸손과 봉사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낮은 사람이 되거나 그들 가운데 있도록 할 때, 우리는 가장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우둔함이 첫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기주의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사심과 계산을 버릴 것을 요구하신다. 잔치를 베풀 때에 똑같이 되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를 것이 아니라, 되받지 못할 사람들을 불러서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갚아주심을 기다리라(12-14절 참조)고 하신다.
여기서는 첫째로 ‘무상성’을 가르치신다. 오직 진실 되고 단순하며, 티 없이 맑은 뜻으로 행해지는 행위만이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부차적인 계산 때문에 그 행위 자체가 파괴된다면 안 되기 때문이다. 유일한 ‘보상’은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14절) 주님께서 주실 바로 그것이다. 이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과 행동의 ‘무상성’을 되찾게 된다. 그 때의 행위가 겸손을 통해 위대하게 된다.
둘째로는 이 무상성 외에도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사회 속에서 바로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간과해오고 있지 않았나 한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이들은 바로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며, 오늘날에는 노인, 기형아, 지체부자유자, 마약중독자, 감옥에 갇힌 이, 난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도 겸손의 행위이며 마지막 자리를 택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윗자리에 오르라’는 초대를 받을 것이다.
제1독서의 ‘지혜’의 가르침도 복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집회 3,18-20)
이제 하느님 앞에 스스로를 낮출 수 있고 겸손된 자세로 주님 앞에 사는 우리의 모습이 진정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될 것이며, 그 겸손한 자세로 더욱더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으로 대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 그에 대한 풍성한 갚음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믿고 바라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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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수원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번은 고 김수환 추기경이 성체 조배를 마치고 나오며 비서 신부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고 합니다. 비서 신부는 이에 감동을 받아 더 열심히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그 어떤 선물보다 더 큰 감동을 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집회서의 저자는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큰 선물을 받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할 수 있고, 겸손한 작은 행동 하나에도 크게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랑을 받으려면 모든 일을 온유한 마음으로 하고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행동으로 열 번 잘하더라도 한 번 화를 내면 그동안의 수고가 쓸모없게 됩니다.
지위가 높으면서도 겸손하면 더 존경을 받습니다. 추기경이 비서 신부의 신발을 정리해 주었다고 하면 듣는 이도 추기경을 더 존경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하고 말합니다.
사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도 사랑을 받습니다. 이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면 하느님께도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말도 됩니다. 사랑은 주는 만큼 받는 것이기에 온유하고 겸손하면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말하듯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늘 끝자리에 앉으라고 충고하십니다. 그러면 이웃이 높아집니다. 이것이 선물입니다. 선물을 받은 이들은 언젠가는 보답하게 될 터인데, 그럴 때에 선물을 준 나는 저절로 받들어지고 높아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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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끝자리에 앉아라>
자기를 낮춘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을 전부 다 겸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겸손이 아닌 ‘비굴함’인 경우도 있고, 겉으로만 낮추는 ‘거짓 겸손’인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또 자기가 있어야 할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고서, 그 자리에 앉는 것이 겸손입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8-11)
이 말씀은, 세속에서의 처세술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을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겸손해져라.”,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마태오복음 18장에 있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라는 가르침을 비유로 풀어서 설명해 주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의 장면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되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이 말은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한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 경외심 등을 나타내는 말이고, 그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맨 끝자리로 내려앉은 것과 같은 말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라는 말은, 진짜로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는 감히 주님 앞에 서 있을 수도 없는 하찮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실제로 무슨 죄가 있다는 뜻은 아니고, 하느님 앞에서 느끼게 되는 ‘인간 존재의 보잘것없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1코린 15,8-10ㄱ)
이 말은, 바오로 사도의 ‘겸손’을 나타내는 말인데,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다는 말도 맞는 말이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말도 맞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바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높아진’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루카복음 18장을 보면, 겸손한 사람과 교만한 사람이 생생하게 대조되어 있는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0-14)
이 이야기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자신을 높임으로써 낮아진’ 사람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윗자리에 앉았다가 끝자리로 내려앉게 된 사람입니다.) 반대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세리는 자기 자신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고 고백함으로써 높아진 사람입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도 자기를 낮추는 일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높아지기를 바라면서 이 세리를 흉내 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받는 것과 겉모습만 흉내 내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야기 속의 세리는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이고, 하느님께서 그 회개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실제 현실을 보면, 진심이 아니라 그냥 겉모습만으로, 이야기 속의 세리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속을 모르고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서 “저 사람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다.” 라고 칭찬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속을 보십니다.
(윗자리로 올라앉으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일부러 끝자리에 앉는 것은, 즉 겸손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으려고 겉으로만 자기를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위선이고, 거짓 겸손입니다.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행동과 태도가 겸손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만일에 자기 입으로 “나는 겸손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거나 또는 “나는 늘 겸손하게 행동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 퍼센트 교만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교만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남들은 그의 교만을 알고 있는데 자기 혼자서만 모르고 있고, 자기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누가 그의 교만을 지적하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혹시라도 누가 그런 말을 하면, 스스로 반성하면서 더욱 겸손해지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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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한승 라파엘 신부님]
얼마 전 어느 신자분이 저 에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신자들은 똑똑한 신부님, 강론 잘하는 신부님,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시는 유능한 신부님보다는 겸손하고 마음이 따뜻한 신부님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며칠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 동안 사제로 살아온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때 본당 신부님이나 신학교 신부님들로부터 ‘겸손한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제의 삶은 겸손을 실천하기에는 오히려 어려운 여건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식사 이야기가 나오지만, 사제는 초대받은 식사 자리에서 늘 가운데에 앉게 되고, 식사가 모두 끝나면 “이렇게 함께 식사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항상 듣게 됩니다. 밥을 얻어먹고도 고맙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늘 신자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내 주장을 굽히지 않은 때가 많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주로 내 말을 하면서 지내온 게 사실입니다. 결국 교만한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쉽게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의 생각은 틀렸어.’라고 단정하며 내 주장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나를 아끼려는 마음만큼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은 겸손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내 자신이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있고, 이웃과 다투게 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도 모릅니다.
벨라도 성인께서는 “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은 우리의 허에 날뛰는 교만을 얼마나 부끄럽게 하는가”라 고 말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자신을 밑으로 낮추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위로 자꾸 올라가려고만 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감추시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남 앞에 나서려고 하며,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당신보다 높이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남을 멸시하며 높이 올라가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참된 겸손은 착한 사람에게서도 찾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점점 자신을 꾸짖고 다스려야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정말 힘든 덕목인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하신 말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마음 자세는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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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창훈 바오로 신부님]
<겸손하려 노력하기보다 주님 사랑의 축복에 머물면 더 겸손해지는 삶>
하느님의 초대와 축복은 우리 삶의 원동력입니다. 이 초대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임을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의 움직임을 분별해 주시는 하느님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초대는 하느님의 사랑이자 주님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길이 됩니다. 이 부르심이 축복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주님께 삶의 초점을 두고, 분별하시는 주님의 뜻을 찾아내는 기도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깨달으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사랑은 점점 더 크게 느껴지고 그 사랑이 자신에게 충만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주님의 현존이 자기 자신 안에서 강화되면 겸손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후에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가 은총임을 깨닫고 그것에 초점을 두고 감사하게 살아간다면 더욱 겸손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분명하게 깨닫기 위해 우리는 보잘것 없는 사람들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가난하고 장애가 있고 병들고 눈먼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노인복지시설이 된 「시몬의 집」은 초창기에 결핵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환자들은 저에게 주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었습니다.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인 「프란치스코의 집」에 살고 계신 어르신들 또한 저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이웃을 방문하는 것이 삶에서 예수님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그 사람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이 자신 안에서 커져갈 때 더욱 겸손해지는 삶이 됩니다.
겸손해지기 위해 나 자신을 낮추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기도 중에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을 자주 만나면 그분의 사랑으로 살고자 하는 의욕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 그들이 우리를 기쁘게 만나주는 것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누는 삶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겸손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면 어떨까요?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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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봉진 안드레아 신부님]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혜에서 나온 처세술 이 있습니다. 이런 처세술은 전해지는 격언을 되새기고,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데서 얻어 집니다.
경주에는 300년 동안 12대를 이어온 부잣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집안의 부를 지키 는 가훈이 전해지는데 참 흥미롭습니다.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면,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얻으려다 화를 입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곡식을 일만 석 이상 모으지 말고 남는 것은 사회에 환원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주변 사방 백 리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부를 나눔으로 좋은 평판을 얻을 뿐 아니라 부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흉년에는 토지를 사들이지 않음으로써 원성을 받지 않게 했습니다. 사랑방에는 나그네들을 후하게 받아들이고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덕분에 그들에게서 방방곡곡의 세상물정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경주 부자는 독립자금을 대고, 광복 후에는 토지개혁을 겪고,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기증하기까지 후대 사람들에게 부자의 지혜를 전해주었습니다.
안식일 날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은 밥상머리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각자의 처지에 맞는 자리가 있습니다. 윗자리를 탐내려다 자리를 내어주는 것보다 끝자리에 있다가 윗자리로 불려 올라가는 것이 더 나은 처신입니다.
율법학자라면 그런 지혜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겸손한 이는 사람들의 사랑과 하느님의 총애를 받습니다. 그러나 거만한 자의 재난은 약이 없습니다. 교만의 죄악이 마음에 뿌리내렸기 때문입니다.
겸손과 자선은 현세에서의 처세술만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위한 가르침입니다. 하늘나라는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어린이 와 같이 낮추지 않으면 받아들여지지도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 겸손함은 이 세상뿐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통합니다.
요즘의 식사 접대는 상업적이거나 어떤 목적 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초대에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초대하는 사람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심 없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우 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에 대한 초대는 그들이 갚지 못할 지라도 그들을 돌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지혜의 책인 탈무드에는 베푼 돈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가르칠 뿐 아니라 사후에까지 동행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구호는 ‘하느님의 의’ 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참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늘나라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에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낮은 이 들과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는 이들을 당신의 식탁에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겸손과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살다가 현세 에서 갚음도 받겠지만,
무엇보다도 큰 행복은 하느님이 마련하신 잔치에 초대받는 행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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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바로 당신이에요>
루카 14,1.7-14 (끝자리에 앉아라,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이 나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으니
비로소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당신이 보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아무런
힘도 없으니
비로소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에게 내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니
비로소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당신이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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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겸손의 믿음으로…>
옛날에 가난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명색이 양반이라 구걸하지 못하고(빌어먹지 못하고) 밥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가족들이 배고파 죽어도 방구석에서 빈둥빈둥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부인이 속이 터져서 시집올 때 가져왔던 비단 치마를 곶감 1접과 바꾸어 와서 선비에게 장에 나가 팔아오라고 했습니다. 선비는 부인의 말대로 장에 나가 곶감을 파는데 이렇게 소리칩니다. “곶감 사시게~곶감 사시게.” 누가 이 선비의 말을 듣고 곶감을 사겠습니까? 안 사지요. 왜요, 선비의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곶감 사세요-해야지요) 마침 선비 앞으로 지나가는 생선 장수가 “싱싱한 생선 사십시오.”라고 공손하게 소리를 치며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이 생선을 사 가는 것입니다. 선비는 생선 장수의 뒤를 따라가면서, 생선 장수가 “생선 사십시오.”라고 외치면, 선비는 뒤에서 “곶감도” 하고 외칩니다. 결국, 이 선비는 온종일 “곶감을 하나도 팔지 못했습니다.” 선비의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의 자리를 내놓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요한 묵시록 3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예수님께서 우리 집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문을 열고 주 예수님을 모셔 들여서 정성스럽게 잘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 예수님께 우리 삶의 주인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잠깐 기도란? 무엇인지 묵상해 봅니다.
“기도는 내가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 안에 주님께 자리를 내어드리고, 그 주님이 주실 은혜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내 자리에 들어올 수 없고, 주님이 주실 은혜도 간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를 찾아오신 주님께 내 자리를 내어드리지 못합니다.
기도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먼저고, 예수님은 그다음입니다.
언제나 내 사정 내 필요가 먼저고, 신앙은 그다음이라고 합니다. 언제나 내 생각 내 주장 내 고집이 먼저 우선이고, 주님의 뜻은 그다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로움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뿐만 아니라 돈도, 자녀도, 건강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님을 대신하여 내 주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날 믿기를 원하느냐?”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네가 정말 나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제일 먼저 너의 자리를 나에게 내놓아라. 그 후에야 너는 나와 함께 먹으면서, 나와 함께 풍성한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다.”
“네 안에 주인 자리를 안 내놓고는 그 어떤 은혜도, 그 어떤 풍성한 축복된 삶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아버지의 피땀 어린 재산을 창녀와 놀아나면서 다 써버리고, 돼지를 치는 남의 집 품꾼으로까지 떨어졌다가, 끝내는 견디지 못하고 돌아온 자식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에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크고 깊은 사랑을 가진 아버지가 계십니다. 이 아버지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이 세상에서 끝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은 내 인생에 앞 리게 두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 사랑 안에서 가장 첫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고운님들은 “상석”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윗자리”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상석은 어디일까요? 출입문에서 가장 먼 자리가 상석이고, 출입문이 보이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성당 안에서 상석은 어디이겠습니까? 성당 제일 앞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사제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미사를 시작하는 기도로 치유의 기도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제일 앞자리가 그 치유의 기도가 따끈따끈하거든요. 반대로 제일 말석에 앉으면 치유의 기도가 식어버립니다. 온갖 분심과 잡념이 다 들거든요. 고운님들은 성전에서 제일 상석에 앉으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겸손은 사랑을 담는 그릇입니다. 겸손의 믿음으로 내 삶에 앞자리에 주님을 담고, 고운님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 받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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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41)
♧♧ 시편 46편 5절….
"강이 있어 그 줄기들이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 강이 있어...
이 구절에서 8절까지는 3, 4절에 묘사된 자연의 무섭고도 엄청난 모습으로 요동치는 장면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또한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안전과 평화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편 이 구절에서... ‘강’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줄기를 가리키는 것으로(시편 36편 10절. 예레미야서 2장 13절. 참조), 이는 곧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에 대한 영 육간에 다함없는 풍성한 축복과 은총을 상징합니다.
*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
여기서 ‘하느님의 도성’은 이스라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가리켜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처소’로 표현한 것은 그곳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과 함께 머무르시며 다스리시는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풍성한 축복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으로 인한 것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 시편 46편 6절…
"하느님께서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께서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
이 구절은... 5절의 해석에 해당하는 말씀으로 예루살렘 도성의 평화와 안전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항상 하느님께서 도우신다.’ ‘고통의 밤이 지나면 새 날이 오듯이 하느님께 고통 중에 도우신다.’ ‘고난 중에 속히 도우신다.’
그러나 이는 직접적으로 하느님께서 하룻밤 사이에 아시리아 산헤립의 군대를 전멸시킨 사건(열왕기 하권 19장 35절. 참조)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리고 상징적으로는...새벽에 밝은 햇살이 동터올 때, 어두움이 가시는 것처럼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주어질 때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평화와 기쁨이 주어짐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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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동창 신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전 신학생 때의 일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며칠 전의 일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거의 30년의 일입니다.
이렇게 옛 친구들과의 대화는 과거의 일들을 현재로 소환합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세 번이나 변할 수 있는 시간도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이 세상의 시간이 긴 것 같지만 사실은 정말로 짧은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이 세상의 삶이 먼저가 아니라 영원한 시간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후회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가면서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 나라보다 지금의 세상에 적합한 사람이 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 합니다. 하느님께 인정받기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삶의 양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언제나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이 언제나 자신에게 우호적이어야 하고, 질병이나 사고는 자신을 비껴가야 정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없습니다. 운명에 대한 과도한 요구는 어쩔 수 없이 과도한 불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모습이 과연 하느님께 인정받는 모습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굳이 윗자리에 앉으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도둑질하다 들켜서 훔친 물건을 도로 내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가질 자격이 없으므로 가지고 있던 것을 들키게 되면 그냥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더 귀한 이가 오게 되면 그 자리에 대한 자격이 없기에 자리를 내어놓아야만 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갖추고 있어야 하느님의 명령으로 그 자리를 얻게 되고, 하느님을 통해 영광의 관을 쓸 수가 있습니다.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그대를 들어 높이면 하느님께서 그대를 끌어내리실 것입니다. 그대가 그대를 끌어내리면 하느님께서 그대를 들어 높이실 것입니다.”
제1독서의 집회서 저자 역시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라며, 주님께서는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우리는 낮추는 것을 너무나도 어려워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자리는 그 누구도 차지하기 싫어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는 거의 텅텅 비어있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차지하는 사람의 수가 적은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을 쫓는, 그래서 어떤 지위나 명예에 연연하지 않는 예수님의 맘에 꼭 맞는 그런 신앙인이 되도록 우리 모두 조금씩 노력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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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깊이 그리고 내 마음의 넓이를 키워야 합니다.}
스위스 태생의 조각가이자 화가, 판화가인 알베르트 자코메티를 아십니까? 그는 인간의 실존을 왜소한 선의 형태로 응축한 걸작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의 작업실이 겨우 일곱 평 남짓의 작고 허름한 작업실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워낙 유명한 미술가이니 작업실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의 생존 당시, 이 작업실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습게도 내가 처음 몽파르나스의 이폴리트 뱅드롬에 위치한 이 작업실을 가졌을 때 난 이곳이 매우 작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래 있을수록 이곳은 점점 커졌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곳에 넣을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작업실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무한한 너비와 깊이로 그의 작품 세계는 확장했고 심오했습니다. 우리는 환경 탓을 종종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공간을 확장하고 더 많은 물질적인 것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많은 것에 관한 관심은 내 정신을 분산시켜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또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단순화시키면서 내 사고의 깊이 그리고 내 마음의 넓이를 키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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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년 전의 일입니다.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복자 시복식이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교황님께서 참석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아시아 청년대회에 교황님이 참석하신 유례가 없습니다. 시복식에 교황님이 참석하신 유례가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한국교회에 대한 교황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뜨거운 열정과 신앙에 대한 교황님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의 일원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교황님은 말과 행동으로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서울대교구의 교구청 신청사 축복식이 있었습니다. 방명록을 준비하였습니다. 교황님은 가장 구석에 아주 작은 글씨로 서명해 주었습니다. 큰 글씨로 중앙에 서명해 주셨으면 방명록이 빛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구석에 작은 글씨로 서명한 교황님의 ‘Francisco’는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더 빛이 났습니다.
다른 일정은 방한 준비위원회와 교황청이 함께 준비하였습니다. 오직 하나 교황님께서 결정하신 일정이 있었습니다.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시복식과는 무관한 일정이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꽃동네를 방문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에 있을 때 꽃동네의 수도자를 보았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수도자가 고마웠다고 합니다. 교황님은 그때의 고마움을 꽃동네를 찾아서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가난하고 아픈 이들이 있는 곳이 꽃동네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는 곳이 꽃동네입니다. 교황님은 그들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도자와 평신도를 만났습니다. 신앙인이 있어야 할 곳이 바로 그런 곳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시복식이 있는 아침이었습니다. 교황님은 작은 차인 ‘Soul’을 탔습니다. 작은 차이기도 하지만 차의 이름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영혼을 위로하는 교황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복식에 앞서서 교황님은 아이들을 축복해 주셨고, 슬픔이 가득한 세월호 유족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세월호 유족이 전한 편지를 받아 주었습니다. 서울의 한복판인 광화문에서 순교복자의 기도와 세월호 유족의 기도가 함께 하였습니다. 교황님의 위로와 사랑이 함께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광화문 광장에 가득했습니다. 저는 교황님이 들고 다니는 가방을 보았습니다. 30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낡은 가방이었습니다. 그 가방은 비록 낡았지만 따뜻한 교황님과 오랜 시간 함께 있어서 행복했을 겁니다. 아픈 이에게 성체를 전하는 자리에 함께했을 겁니다. 가난한 이를 찾아가는 자리에 함께했을 겁니다. 낡은 가방이 교황님과 함께 있으니 세상 어느 명품이 부럽지 않아 보였습니다.
지거 퀴더는 사제이면서 성화를 그린 화가입니다. 제게 깊은 울림을 준 그림은 ‘베드로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베드로는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베드로의 발을 씻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놀란 얼굴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베드로의 발 이 담긴 물 위에 비치고 있습니다. 이 그림 하나가 베드로 사도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 하나가 제자를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겸손’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겸손은 말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다 잘될 겁니다.’라는 말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너나 잘해, 이만하면 됐지, 다음에 할게, 그래서 어찌하라고, 또 그런 실수를 했구나’라는 말은 사람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용서에서 출발합니다.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는 사람,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하는 사람,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 이웃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초대됩니다.
겸손은 행동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주님이라고 말한다고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주는 겁니다.” 겸손을 행동으로 드러낸 자캐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는 말로 하는 겸손은 잘했지만, 행동으로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에게 행동을 요청하셨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신앙인은 모두 행동하는 겸손을 드러내야 합니다.
겸손은 자리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나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 내가 필요해서 만나는 사람은 겸손을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나에게 아무런 보답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야 겸손은 드러납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원의 선우경식 선생님은 평생 가난하고 아픈 이들과 함께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평생 아프리카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했습니다. 마더 테레사 성녀는 평생 약자들과 함께했습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자리는 보이기 마련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했다면, 아픈 이들과 함께했다면, 정의를 드러내는 이들과 함께했다면 겸손한 사람입니다.
들판의 곡식들은 이제 곧 알찬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나의 삶이, 알찬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겸손과 온유의 거름을 듬뿍 주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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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의 가치관을 따라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고 복음서들은 가르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에는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어느 지도자의 집 식탁에 앉아 계십니다. 그날 초대 받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신경 쓰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그리고 예수님은 교훈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은 식탁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십니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 경제적 수준이 집주인과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그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그들은 후일 언젠가 집주인을 초대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행입니다. 결혼식에 축의금이나 장례식에 조의금을 낼 때, 우리는 혼주(婚主)나 상주(喪主)로부터 과거에 받았던 것, 혹은 후에 우리가 받을 것을 고려하여 액수(額數)를 정합니다.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되돌려 받을 것을 염두에 둡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든 일에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질서를 존중합니다.
잔치에서는 윗자리가 좋고, 남에게 베풀 때는 그만큼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시 하는 우리 세상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질서에 이의(異議)를 제기하십니다.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고, 낮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잔치에 초대할 때는 되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베푸는 잔치가 되도록 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소외(疎外)된 이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베풀어서 그들이 행복한 우리 이웃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우리의 관행과 예수님이 권하는 실천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우리 자신이 소중합니다. 이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대우(待遇)를 받고, 우리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대(過大)포장 하고자 합니다. 입은 옷으로, 가진 자격증으로, 주어진 지위로, 혹은 가진 돈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우리 자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이 베푼 만큼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것이 손해 보지 않고 현명하게 사는 우리의 생활방식입니다. 우리는 이웃의 사정을 고려하는 데에는 인색합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이 우리 자신만을 확대해서 보려 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나타나는 하느님 자녀의 행동방식은 다릅니다. 우리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우리의 관행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높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느님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사랑하는 분이라고 믿었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배워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자비와 사랑은 우리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다. 자비롭고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의 입장에서 이웃을 보고 그를 이해하며 보살핍니다.
하느님이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고 높이시면, 인간은 소신껏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우리는 전전긍긍하고 노심초사하며, 그분의 노예, 혹은 그분을 위한 기쁨조가 되어 살 것입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오로지 ‘지도자 동지’를 위해 모든 것을 하는 북한 동포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사람 하나가 자기 스스로를 과대포장하여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비참하게 되는데, 하느님이 당신 스스로의 영광을 찾으시면, 우리에게는 자유도, 소신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대들은 나의 벗”(요한 15, 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벗은 벗을 자유롭게 해주고 그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스스로를 낮추셔서 세상에는 자연 질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계절(季節) 따라 자연은 변하고, 계절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자유로운 인간이 실천하는 사랑이 있어서 우리에게는 감동이 있습니다. 감동과 행복은 자유로운 인간에게만 가능합니다. 순종을 요구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짓밟는 일은 오늘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삶에는 스스로를 낮추고 베푸는 하느님이 그 중심에 살아계십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베푸는 마음이 참으로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고, 이웃을 지배하고 순종시키겠다는 마음은 자유로운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은 굴복시켜야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맹수(猛獸)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더 높은 지위와 더 많은 재산을 갖기 위해 무자비하게 달렸을 때,우리에게 남는 것은 씁쓸함과 살벌함입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생명들을 짓밟고 죽여 버린, 씁쓸함입니다.
우리는 가진 이에게는 관대하고, 못 가진 이에게는 인색합니다. 생색이 나는 일에는 관대하고, 생색이 나지 않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도 나 한 사람 잘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길이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도 돈을 바치는 이를 좋아하고, 바친 만큼 은혜를 베푸신다고 착각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병을 고친다는 사람들도 돈을 바쳐야 하느님이 더 잘 고쳐주신다고 흔히 말합니다. 많이 바치면, 많이 치유된다고도 말합니다. 어느 특정의 곳에 가서 헌금하고 기도하면,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모두가 이해타산(利害打算) 하는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질서(秩序)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근성(根性)에서 해방된 자유(自由)를 가르쳤습니다. 자유는 우리가 한 번 깨달아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를 무릅쓰며 우리가 배워야 하는 자유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일도, 되돌려 받지 않고 베푸는 일도, 많은 실패를 겪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질서입니다. 나 자신을 높이고 과시(誇示)하고 싶은 마음, 준만큼 받아내고 싶은 마음은 우리의 살과 피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새로운 살과 새로운 피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실천이 우리를 비추어야 하고,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하는 성체성사가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가 되는 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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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
-사랑, 겸손, 자비-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이자 순교자 성월 9월의 첫날이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5년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한 후 제정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참으로 공동의 집인 하나뿐인 지구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새벽 인터넷 뉴스 검색중 충격적 메시지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기후변화, 앞으로 10년이 마지막 기회. 인간이 지구를 아프게 한다. 미래세대의 미래는 있는가? 단축되는 지구자원의 시계. 2019년 한국인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려면 연3.7개의 지구가 필요. 중국은 2.2개, 일본은 2.7개”-
비핵화보다 더 화급한 것이 녹색화요, 더 절박한 회개가 생태적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발전사관이 환상임은 이미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근대문명은 생태문명으로 바뀌어야 비로소 인류의 생존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멀리서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 나부터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의 보석답게, 최대한 절제하고 쓰레기를 덜 내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이때쯤이면 배밭 곳곳에서 피어나는 달개비꽃 야생화입니다.
-“오, 하느님이 밤사이 쏟아 놓은/남보랏빛 생명의 보석들!
아주 낮은 그늘 속에 있어/잘 눈에 띄지 않는 생명의 보석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생명의 보석들!
바라볼 수는 있어도/가져 갈 수는 없는/달개비꽃/생명의 보석들!”-1997.8.25.
무려 22년 전 쓴 시가 여전히 지금도 유효합니다. 어찌 달개비꽃뿐이겠습니까? 사람 하나하가 하느님의 생명의 보석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보석답게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어제 새벽 성무일도시 독서의 기도 첫 후렴과 첫 시편130장을 잊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로다.”-
-“주여, 잘난체 하는 마음 내게 없삽고/눈만 높은 이 몸도 아니오이다
한다한 일들을 좇지도 아니하고/내게 겨운 일들은 하지도 않나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어미 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이제부터 영원까지/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라.”-
주님을 사랑하여 바라보고 살아갈 때 비로소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요 어린이처럼 겸손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주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요 방향이요 중심이요 의미입니다. 주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날의 모든 위기의 근원에는, 불행의 뿌리에는 하느님 망각忘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느님의 자녀답게, 보석답게 살 수 있을까요?
첫째,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눈만 열리면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볼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에 대한 자발적 응답이 하느님 사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참 행복이, 참 기쁨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닮아감으로 저절로 이웃 사람을, 하느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생물을, 지구를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본기도 역시 은혜롭습니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마다 심어주신 당신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이야 말로 하느님의 ‘사랑의 샘’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입니다. 하여 우리의 온갖 수행들을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수도원 정문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이란 성구 아래 벽돌 네 개에 쓰여진 성구가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1.네 마음을 다하고, 2.네 목숨을 다하고, 3.네 정신을 다하여, 4.네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뿐이 답이, 길이 없습니다. 하여 매일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께 사랑의 찬미기도를 바치는, 찬미의 사랑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어찌 수도승뿐이겠습니까?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끊임없이 사랑의 찬미를 드림은 우리 믿는 이들의 우선적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둘째, 겸손한 삶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겸자무적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회개가 뒤따르고 겸손과 온유, 지혜의 열매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애당초 회개도 겸손도 온유도 지혜도 없습니다. 사람homo, 겸손humilitas, 모두 흙humus이 어원입니다. 대지의 흙을 닮을 때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사랑합니다. 저절로 생태적 회개에 생태문명을 선호합니다.
그러니 사랑의 겸손입니다. 겸손으로 입증되는 참 사랑입니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보석같은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이 한결같이 권하는 것도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고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 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하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겸손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끝자리를 좋아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을 좋아합니다. 집회서의 말씀도 큰 격려가 됩니다.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의 겸손을 통하여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물론이고 사람들에게 총애를 받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물론이고 모세도 모든 성인들의 공통점도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섬김과 순종의 사람이요, 온유溫柔하고 온화溫和한 또 온순溫順하고 온건穩健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결코 화내지도 않고 험하고 거친, 무례하고 불손한 언행도 하지 않습니다.
반면 모든 악덕의 뿌리는 거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자가 거만한 사람입니다. 집회서의 말씀이 적확합니다.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경청의 사람이자 온유하고 지혜로운 사람임을, 또 무지에 대한 답은 겸손뿐임을 깨닫습니다. 결국 우리의 평생 공부도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겸손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자비로운 삶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닮을 때 겸손에 이어 자비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요 완전한 사람입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대자대비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빛 사랑을 주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단비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마음으로 싫고 미워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자비의 사랑입니다. 이런 자비로운 사람을 통해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하여 제가 의식적으로 자주 쓰기로 작심한 것이 ‘사랑하는’이란 말마디입니다.
하느님은 피라미드 수직의 정상 꼭대기에서 모두를 당신 발밑에 두고 지배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수평의 원중심에 자리잡고 모두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수평의 원 주위에 자리잡고 있는 모두가 평등한 형제들인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는 높고 낮은 자리가 없습니다. 마치 둥근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이래야 서로간의 형제애도 꽃피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정말 자비로울 것을 모두를 가슴 활짝 열고 환대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우리의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초대하지 말고 불쌍하고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들에게 잘 해 줄 때 천상 축복이 뒤따를 것을 약속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에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 삶의 고귀한 목표입니다. 참으로 품위있고 아름다운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1.하느님을 사랑하는 삶, 2.겸손한 삶, 3.자비한 삶입니다. 이런 삶자체가 축복이요 천상의 행복을, 종말의 구원을 앞당겨 살게 합니다. 저절로 히브리서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그대로 미사잔치를 통해 앞당겨 실현되는 하늘 나라입니다.
“우리가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이런 천상 행복을 미리 앞당겨 맛보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새 계약의 중개자, 파스카의 예수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 겸손한 삶, 자비한 삶을 항구히, 충실히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화답송 시편입니다.
“의인들은 기뻐하며 춤을 추리라.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너희는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주님이시다. 하느님, 당신은 가련한 이를 위하여, 은혜로이 집을 마련하셨나이다.”(시편68,4와 5ㄱㄴ. 11ㄴㄷ참조). 아멘.
<참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시한 ‘작은 일상적 행동’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물 아끼기, 쓰레기 분리 수거하기, 먹을 만큼 요리하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불필요한 전등끄기-
*환경회복 실천 운동표
-비닐봉지 플라스틱 용기 사용절제, 개인 물병 휴대, 계획적인 장보기(장바구니 준비), 일회용품 사용않기(물티슈, 빨대등), 분리수거, 택배 자제하고 과대포장 개선), 육류와 유제품 섭취줄이기, 채식늘리기, 제철음식, 우리농산물 구매, 배달음식 절제, 음식물 잔반 남기지 않기, 필요한 양만큼 요리, 냉장고 정기적으로 정리, 생수 구매 자제, 샤워 시 더운 물 나올 때까지 양동이에 받아쓰기, 설거지 양치질 세수시 물 받아서 하기, 가까운 거리 걸어 다니기, 대중교통이용, 전기절약(전등, 냉난방기, 승강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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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생의 유형>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이 시간 겸손한 주님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처음 군중 앞에 서실 때에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연단에 서기를 거부하시고 “나는 여기 아래에 서겠습니다.” 하셨습니다.
그후 추기경단이 머무는 숙소로 미니버스를 타고 이동하셨습니다. 그곳의 추기경단은 새 교황을 맞이하려고 도열해 있었습니다. 그때 버스에서 교황이 내린 것입니다.
교황님은 전용 리무진 기사에게 “추기경들이 타고 가는 버스에 함께 타고 가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다음날 본인이 묵었던 숙소에서 직접 숙박비를 지불하셨고 숙소에서 교황청으로 가실 때에도 전용차를 타지 않으시고 일반 버스를 이용하셨습니다.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전화를 걸 때도 직접 교환원에게 총장 신부를 바꾸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교황님의 몸에 밴 겸손한 생활의 일부입니다. 지금도 여행객들이 머무는 작은 숙소를 이용하고 계신답니다.
미국의 신문기자로 40년간 생활을 한 필립 얀시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 8천여 명의 유명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깨달은 바를 자기 회고록에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생여정에 있어서 사람의 유형은 스타형(Star)과 섬김형(Servant)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타형에 속하는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자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선전만 하며 저 잘났다는 사람입니다. 기자가 볼 때는 잘난 것도 없고 빈껍데기뿐인데 자기를 선전해 달라고 매달린답니다.
여러분 스타가 뭔지 아세요? 스스로 타락한 사람입니다. 잠언서에 보면 “네 입이 아니라 남이 너를 칭찬하고 네 입술이 아니라 다른이가 너를 칭찬하게 하여라.” 하고 자화자찬하지 말 것을 권고 하고 있습니다.
“입을 조심하는 이는 제 목숨을 보존 하지만 입술을 열어젖히는 자에게는 파멸이 온다.”(13,3) 고 말합니다. 그러니 결국 스타형은 파멸을 자초하는 형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하지 마십시오. 칭찬은 남이 해 주는 것이지 제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자랑해 주십시오.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섬김형에 속하는 사람은 그들은 언제나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이롭게 하며 기회가 있으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랍니다.
그야말로 콩 한쪽도 나눠먹고자 하는 유형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사람은 대체로 소득이 적고, 오랜 시간 일을 해야 하고 드러나는 박수갈채도 없지만 존경을 받는답니다.
바로 여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희생하며 봉사하는 삶을 사는데 왜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인정받지 못하느냐? 부자로 살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좋은 일을 했으면 그만큼 잘되어야 하는데…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4,11)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4)
사람들은 지금 당장 눈앞에 것을 추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천상 것을 추구하기를 바라십니다. 곧 사라지고 말 것에 눈멀지 말고 영원한 가치에 마음을 두기를 바라십니다.
요즘시대를 피알시대라고 하나요? 자기를 알리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피알시대란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 알리는’ 것입니다. 천상 것, 영원한 생명에 들지 않으면 피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얼마나 신이 낫겠습니까? 능력이 드러나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19-20)고 하셨습니다. 지금 인정을 받고 칭찬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욥기1장 13절 이하를 보면 욥의 시련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소와 나귀, 양, 머슴들, 심지어 자식들까지 죽음에 이르는 환난이 왔을 때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깍았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말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니 하느님을 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겸손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덕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섬김형의 삶을 말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겸손의 상급은 결국 여러분의 이름을 하늘에 영원히 기록 하게 될 것입니다.
마더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하다면 그 무엇에도 초연할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다 해도 낙망하지 않을 것이고, 칭찬을 듣는다 해도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고 당신 자신을 “나는 하느님 손에 잡힌 몽당연필” 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몽당연필로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 저를 가져다가 좋으실 대로 쓰십시오. 저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고 맡겨 드리는 그 겸손의 삶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성 토마스 아 켐피스도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해도 평화를 잃지 않고 잘 있으니, 그는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사람인지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바리사이들은 대개는 덕이 있고 결점이 없으며, 가난하고 욕심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자비로운 행동을 선전의 수단으로 눈에 보이게 이용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들은 열심한 유다교 신자들이었고 그들은 유다민족에 있어서는 헬레니즘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노력한 독립투사들이었으며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로부터 받을 존경심을 그들이 스스로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타형이었습니다. 존경심은 누군가에게 강요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내세운다고 얻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오히려 밥맛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아지지 못하였기에 부정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기 마련입니다.
누가 만일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에 앉는 척한다면, 그는 끝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고 따라서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의 강한 손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1베드5,5-6)
그러나 겸손한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좋은 결심을 해도 인간적인 마음이 금방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꾸준한 기도와 하느님 말씀을 듣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에 젖어들지 않고는 결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겸손을 배우고 또 익혀서 부디 여러분은 스타형으로 살지 말고 섬김형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서로를 섬기십시오. 겸손하게 섬기면 다 잘 될 것입니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버림받은 자의 표시이고, 겸손은 선택된 사람의 표시입니다”(성 그레고리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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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한 골목에 맛좋기로 소문난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상호도 간판도 없었지만 미각과 식도락에 예민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골목에 새로 음식점이 생겼는데 “한국에서 제일 맛있는 집”하고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얼마 후 두 번째 음식점이 생겼습니다. 그 집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집” 이라고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아마도 후발 주자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터줏대감격인 식당에서는 뒤 늦게 시작해 놓고서는 자기 자랑만 내세우는 식당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이 골목에서 제일 맛있는 집”하고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원조’, ‘진짜원조’, 심지어 ‘태조’, ‘시조’라는 말을 붙여서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려는 곳이 많습니다. 식당은 맛으로 승부를 내야지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빛이 되어야지 천주교 신자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무엇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지 말고 삶의 향기를 통해 전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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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4,11)
9월의 첫날이요, 순교자 성월이 시작되는 연중 제22주일 말씀의 요지는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오늘 복음과 제1독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의 덕은 모든 덕의 기본이자 으뜸 덕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공든탑을 세웠다 하더라도 겸손의 덕이 없으면 무너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덕은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 구원의 꼭 필요한 덕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고, 많은 봉사를 하더라도 겸손의 덕이 빠지면 추해보이고, 저 세상에서는 더 추해보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덕은 사람을 참으로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 자신과 너, 더 나아가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살립니다.
9월1일인 오늘은 2015년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제정하시고, 다섯 번째로 맞이하는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자는 호소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탐욕에 의해 죽어가는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살리자는 호소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셨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1,28)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적극 협력해야 할 강한 의무가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 질서를 잘 보존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생태계의 주보성인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작은 삶, 겸손한 삶, 가난한 삶, 형제적 삶, 특히 모든 피조물들과도 형제애를 나눈 우주적 형제애를 본받아야 합니다.('태양의 찬가')
피조물들을 사랑하지 못한 죄에 대해 회개하고 다시 사랑하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오늘도 겸손한 자세로 낮은 곳에 있는 피조물들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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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별것 아닌 존재>
'자신을 낮추면 높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은
이웃의 부족한 점을 온유하게 처리하고
잘못했으면 스스로 인정할 줄 알고
거만하게 굴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 잘못했는데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성을 내는 사람을 봐주기
어려웠는데 오늘 예수님 말씀이
위로가 됩니다
내세울 것은 오직 주님을 믿는
마음일 때 높여주실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내세워 봐야
거기서 거기입니다
별것 아닌 존재가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면
어느날 낮아지는 체험을 하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시니 놔두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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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 11)
순교자 성월의
첫날이며
기다린 가을의
반가운 시작입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소중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기도를 통해
피조물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피조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소중한 피조물들은
일시적 이용물이
결코 아닙니다.
피조물이
걸어온 길에는
하느님께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은
선하신 하느님의
뜻을 되새기는
사랑입니다.
우리모두는
하느님의 위대한
작품입니다.
피조물들이 저마다
소중한 것은
그 안에 하느님이
분명 계시기 때문입니다.
소외되고
아픈 피조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이며
그것이 형제애입니다.
피조물들이
함께 살아가는
겸손한 세상을
원하십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야말로
피조물들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하느님 앞에
피조물들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은총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들은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피조물과
하느님은
하나입니다.
낮아지고
낮추는 겸손을 통해
피조물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은총 가득한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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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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