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지속과 올바른 역사의식』
“의식과 기억이란 마치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매순간 새로운 요소와 내용이 첨가되면서 매순간 보다 확장되고, 첨가된 새로운 내용은 전체 속에 용해되어 유기적인 하나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총체화되고 유기체적인 기억은 매순간 새로운 의식을 창조하면서 동일한 상황 속에서 전혀 다른 경험과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에 있어서 과거와 동일한 경험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중에서
● 기억의 지속이란?
과거의 기억과 지금의 기억이라는 것을 마치 병렬로 세울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구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재의 기억이라는 것은 곧 과거의 모든 기억들이 하나의 총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베르그송은 ‘기억의 지속’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속’이란 말 그대로 모든 존재하는 것이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며, 여기서 시간이란 다만 의식의 효과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3년 전의 우리학교나 지금의 우리학교는 실체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다른 학교가 아니라 동일한 실체가 계속 지속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지속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 변화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역사적 지속, 문화적 지속, 자아의 지속, 의식의 지속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 과거의 기억은 필연적으로 그 의미나 가치가 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억의 지속에서 보자면, 10년 전에 나에게서 발생한 일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일 뿐 실재가 아니거나 무의미한 진술이다. 왜냐하면 10년 전이란 시간이나 역사는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기억이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먼먼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체험이 하나의 유기적인 실체로 나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즉 나에게 실제로 있는 기억이란 모든 역사적 사건이 어울려 하나의 유기체적 총체를 이루고 있는 현재의 기억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기억을 현재의 총체로부터 분리해 낸다는 것은, 학문적인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 불가능 것이다. 그래서 ‘트라우마라’는 것은 기억의 지속에서 보자면 일종의 허상이거나 망상에 불과하다. 10년 전의 친구의 배신은 당시로서는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분노를 일으킨 심각한 일 일 수 있겠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른 기억들과 어울리고 용해되면서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고, 또 분노 보다는 오히려 ‘용서’의 감정으로 자리 잡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분노를 야기한 친구의 배신’은 지금 와서 보면 아무 중요성도 없는 ‘해프닝’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대다수의 과거의 기억은 시간과 함께 그 의미와 가치가 변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다시 경험하는 나의 자아가 성숙하고 또 변하였기 때문이다.
● 역사의식과 기억의 관계
사람들은 모름지기 국민이라면 자기 민족의 혹은 국가의 역사를 알고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역사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역사의식이란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한 민족에게 있어서도 기억이란 잊고, 잊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끔 수치스런 과거의 기억이 불쑥 불쑥 떠올라 괴롭다고 해도, 이러한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게 하는 약이나 특별한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은 통속적으로 “시간이 약이다”라고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그 괴로운 기억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기억이란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이란 우리들의 의식의 일부, 자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잊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특정한 사건이 나의 전체기억 속에 용해되어 그 의미나 가치를 변화되게 하는 것뿐이다. 이처럼 ‘역사의식’이란 과거의 어떤 역사적 사건들이나 기억들이 현재의 민족의 기억과 자아에 용해되어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변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의미나 가치가 현재나 미래의 민족이나 국가의 삶의 방향에 이정표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왜곡된 기억과 잘못된 역사의식
하나의 총체적인 기억의 지속에서 과거의 어떤 특정한 기억을 분리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임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 어떤 이유로 과거의 기억을 분리해내려고 시도한다. 가령 “내가 어린 시절에 어떻게 살아왔는데...” “우리 부모들이 과거에 우리를 어떻게 길렀는데...” “너의 할아버지가 과거에 어떻게 투쟁하여 왔는데...” 등 등을 이야기 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자식들이나 무언가 삶과 행동의 기준을 제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기억의 왜곡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은 이미 그 동안의 수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른 기억들과 긴밀하게 연관되면서 총체적인 기억 속으로 용해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분리해낸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분리된 기억은 왜곡된 기억인 것이다. 흔히 과거의 향수 속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왜곡된 기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기억의 왜곡’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자아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건들이 총체적인 나의 기억 속에 용해되면서 새로운 의미 새로운 가치로 자리를 잡게 한다는 것은 많은 정신적인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사유하고 사색하고 묵상하고 명상하는 과정을 통해서 ‘전체적이고 질서 잡힌 나의 자아’라는 것이 정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원인은 ‘정신적인 게으름’ 보다 구체적으로 ‘자아를 정립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여’에 있다고 할 것이다. 역사의식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의 총체적인 민족의 역사 안에서 용해시키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형성해 내는 정신적인 노력을 가하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역사적 의미의 왜곡’이 발생하는 것이다.
● 미래를 위한 현재의 기억
신라의 삼국통일은 역사적 사건이며, 세 민족이 하나의 민족을 이루는 숭고한 역사적 사건이지만, 이러한 의미는 현대인들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창출한 결과이지, 삼국통일 당시의 민족들의 기억에 있었던 것, 즉 당시 사람들의 기억의 실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기억이 오늘날의 기억과 동일한 것이었다면 백제의 삼천궁녀들이 결코 절벽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억의 지속은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까지도 하나의 기억으로 형성해 내는 놀라운 인간의 능력이다. 이는 인생의 전 역사를 현재의 기억에 포괄하고 유기적인 하나로 가질 수 있는 인간만의 특별한 능력임이 틀림이 없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따라서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기억들을 포함하는 유기적인 기억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며, 이러한 현재의 기억은 또 미래의 기억들을 위한 몸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벌어질 일들 그리고 내일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억의 지속’에서 분리되지 않고 융화되어 항상 새로운 의미, 새로운 가치가 창출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때에만 진정한 역사의식을 가진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 과거나 먼 미래의 일들을 ‘현재의 기억의 지속’에서 따로 분리시키고 고립시킨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좋은 ‘역사의식’일 수가 없을 것이다. 비록 현재가 암울한 상황이라고 해도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진 민족은 항상 내일의 희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