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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열왕기상18장1~15절
제목 : 두려움을 이긴 사명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합에게 자기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없을 것이라 선언하고 그릿 시냇가에 숨어 까마귀들이 아침 저녁으로 가져다 준 떡과 고기를 먹습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 하나님께서 시돈에 속한 사르밧 과부 집에 머물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두 가지 시험을 합니다.
하나는 물을 조금 가져다가 마시게 하라.
또 하나는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순종의 길’을 따랏습니다.
순종하였더니 엘리야의 말씀과 같이 비가 올 때 까지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십니다.
오늘 본문은 3년 만에 비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왕을 만나기 위해 나섭니다.
가는 도중에 이세벨의 박해 속에서 선지자들을 살려 준 오바댜를 만나 중재를 요청합니다.
1.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심(1~2절)
1)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비를 지면에 내리리니 아합에게 보이라 합니다(1절).
“[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 '많은 날'(야밈 라빔)이란 표현은 어감상(語感上) '세월이 제법 많이 흘렀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언제로부터 계산해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이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체류하기 시작한 때(17:8-16)로부터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절에서 '제 삼 년에'라는 설명이 곧 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히브리적 시간 계산 방법에 의거 할 때 '제 삼 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실지로 만 3년이 못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신약성경에 의하면, 엘리야 시대의 가뭄은 3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고 합니다(눅 4:25; 약 5:17).
따라서 본절의 '제 삼 년에'는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을 선포한 때(17:1)를 기점으로 잡고 계산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 '보이라'(라아)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물론 '가서 만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보다 폭넓고 깊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 한 점은 이 단어가 '제시하다', '증명해 보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 동사에 의해 표현되는 행동은 앞서 선행된 어떤 예시,
예견에 대한 결정적 증거 제시의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장에서 엘리야의 행적은 이러한 의미에 부합됩니다.
즉 엘리야는 일찍이 아합에게 가뭄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17:1).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가뭄 종식의 예언을 위해 다시 아합과 만나도록 명령받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그 같은 선포를 하여야만 가뭄과 같은 자연력의 고삐를 쥐고 계신 분은 바알(Baal)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명백해지기 때문입니다. 17:1 주석 참조.
그러므로 이제 아합에게 '보이러'가는 엘리야의 행동은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해 보이러'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할 그 때는 기근이 심하였습니다(2절)
“[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 사마리아(Samaria)는 아합에 의해 소위 자연의 풍요로움과 생산의 풍부를 보장한다는 바알 신을 섬기는 중심지가 된 곳입니다(16:29-33).
그런데 바로 그곳이 기근(饑饉)으로 허덕였다는 점은 본서 기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다름 아니라 바로 바알 숭배의 허구성을 폭로해 주는 현상이
기 때문입니다.
한편 여기서 '심하였더라'(하자크)는 말은 '아주 맹렬하였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가뭄이 사마리아를 덮쳤다는 말입니다.
2. 아합과 오바댜가 짐승 먹일 꼴을 찾아 나섬(3~6절)
1)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습니다(3절).
“[3]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왕궁 맡은 자 오바댜. -'오바댜'(오바드야후)는 '여호와를 섬기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 이름 속에 담긴 동사 '아바드'는 '노예처럼, 종처럼 섬기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름 그대로 오바댜(Obadiah)는 지극한 열심으로 여호와를 섬긴 사람입니다.
즉 당시 바알 숭배의 심장부라 할 아합 궁중의 고위직에 있었던 자 였음에도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 일백 인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4절)은 가히 그 신
앙의 열성과 순수함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한편 '오바댜'는 구약에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이름입니다(대상3:21; 7:3; 8:38; 9:16; 대하 17:7; 34:12; 스 8:9).
*대상3:21 “ 하나냐의 아들은 블라댜와 여사야요 또 르바야의 아들 아르난의 아들들, 오바댜의 아들들, 스가냐의 아들들이니 ”
*대상7:3 “ 웃시의 아들은 이스라히야요 이스라히야의 아들들은 미가엘과 오바댜와 요엘과 잇시야 다섯 사람이 모두 우두머리며 ”
*대상8:38 “아셀에게 여섯 아들이 있어 그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아스리감과 보그루와 이스마엘과 스아랴와 오바댜와 하난이라 아셀의 모든 아들이 이러하며”
*대상9:16 “또 오바댜이니 그는 스마야의 아들이요”
따라서 동명이인(同名異人)을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할 것입니다.
지극히. - '지극히'(메오드)는 '대단히', '크게' 등의 뜻을 갖는 부사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태도를 묘사하기 위해 자주(구약에서 약 300회) 사용되었습니다(신 6:5; 왕하 23:25).
한편 신약에서 이 단어는 '마음과 힘(mind and strength)을 다하여'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말이 갖는 심도를 잘 드러내 줍니다(막 12:30; 눅 10:27).
*막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 '경외하다'('야레')에는 '두려워하다'.
'놀라워 하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접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체험적 신앙을 은연중 강조해 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할 이유.
(1) 악에서 떠나게 됩니다(잠16:6)
(2) 부족함이 없습니다(시34:9)
(3) 지혜의 근본입니다(시111:10, 잠9:10)
(4) 지식의 근본입니다(잠1:7)
(5) 장수하기 때문입니다(잠10:27)
(6)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잠16:3,19:23,22:4)
(7) 여호와를 경외하면 복을 받습니다(신6:24,시115:13,128:1~6)
2)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습니다(4절)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대에. - 이때가 언제인지 정확치 않으나 학자들은 대개 엘리야의 가뭄 선포(17:1) 이후로 봅니다(Hammond).
그것은 두어 가지 가능한 추측 때문인데 곧 다음과 같습니다.
엘리야의 정면 도전(가뭄 선포)에 대한 보복 조처였으리라는 추정입니다.
한편 이세벨(Jezebel)에게 박해를 당한 '선지자들'이란 아마도 선지자 학교의 생도들일 것입니다.
이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삼상 10:1-16 강해, '선지자 학교'를 참조하라.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窟)에 숨기고. - 사마리아 서북방 약 60km 지점에 위치한 갈멜산 주변에는 당시 약 2,000개의 석회굴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오바댜가 선지자들을 숨긴 곳도 이 지역 어느 곳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갈멜산 일대는 피난자들의 은신처였는바 신약 시대에는 일명 '은자(隱者)의 고장'이라 불리울 정도였습니다.
가지고. - 원래 '가져'('라카흐')는 '취하다', '움켜 쥐다', '채어가다' 등의 뜻입니다.
따라서 이 동사는 대단히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는 이세밸의 마수가 시시각각 닥쳐오는 절박한 시점에서 재빠르게 선지자들을 빼돌리는 오바댜의 스릴 있는 움직임을 연상시켜 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 성경처럼 '가지고'라고 번역하기보다 '빼돌려'라고 번역함이 보다 바람직합니다.
3) 아합과 오바댜는 물의 근원을 찾으려 다릴 때에 나누어 다닙니다(5,6절).
“[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6]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물 근원(根源).-이 말은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좀 어색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근원'('메에')는 본래 '창자', '생식기' 등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인가를 산출해 내는 내부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본절의 '물 근원'은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되는 곳'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는 '수원지'(水原地)라는 보다 널리 쓰이는 말로 표헌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 극심한 가뭄과 기근 중에 아합의 관심이 이처럼 말과 노새 보호에 쏠려 있음은 주목할 만합니다.
비록 혹자는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우리 속의 짐승을 위한 불가피한 처사로 변호하지만, 아합의 일차적 관심이 백성에 있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아합의 권력 기반이 말과 노새가 상징하듯 군사력과 상업력에 있었지, 여호와로부터 위탁받은 백성들로부터의 신망(信望)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북한의 김정은 같은 행동입니다)
아합은 홀로 길로 가고. – 아합이 왕의 신분으로써 호위 군사나 수행원도 없이 홀로 탐색에 나섰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홀로'(레바드)란 말은 '따로', '별개로'의 뜻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편 사막 지대의 군주나 족장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당시 극심한 가뭄 상황 하에서 아합왕이 직접 수원지 탐색에 나선 일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합니다.
3. 엘리야가 오바댜에게 아합을 찾아가 알리라고 함(7~15절)
1)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납니다(7절)
“[7]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그가 알아보고. – 오바댜와 옐리야가 이전부터 교분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오바댜 편에서 볼 때 엘리야를 식별하기란 비교적 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항간에는 엘리야의 명성과 함께 그의 옷차림과 특이한 용모가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왕하 1:8).
*왕하1: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이여.- 오바댜가 취한 이러한 태도와 언사(言辭)에서 그가 엘리야를 향해 품고 있는 존경심의 정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오바댜는 당대의 고관이고(3절) 엘리야는 일개 야인(野人)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가인 오바댜가 고군분투하는 신앙의 전사(戰士) 엘리야에게 존경심을 품지않았을리 만무합니다.
더욱이 엘리야가 행하는 권능은 놀라운 것이며(17:13-24),
오바댜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12절).
따라서 오바댜는 지금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는 '아돈'('주인', '소유자'라는 뜻)의 강조형으로서 오직 인간과 만물의 소유주이자 지배자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그런데도 오바댜가 엘리야를 '내 주'라고 칭한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에서는 물론 이스라엘의 운명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엘리야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 엘리야가 오바댜에게 아합에게 가서 내가 여기 있음을 알리라합니다(8절)
“[8]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 원문에는 '엘리야가 여기 있다'는 말이 단지
'힌네 엘리 야후'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 '힌네'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감탄사로서 '보라 !'(behold!)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본절은 '보라, 엘리야다 !'란 단순하면서도 생생한 표현이 됩니다.
한편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엘리야에게는 전국적인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던 듯합니다.
그런 시점임을 감안 할 때 본절은 대단한 박력의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 엘리야가 이 같은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아합을 만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됩니다(1절,약 5:17).
*약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3) 오바댜가 엘리야에게 어찌하여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합니까라고 반문합니다(9절)
“[9] 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 여기서
'넘겨'('나탄')은 '주다'(give)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약 2,000회 정도 사용되는 이 동사는 의미 또한 실로 다양하고 광범위합니다.
즉 이는 '만들다', '지불하다', '놓아두다' 등 번역상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띨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절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라는 문구가 이미 의미 파악의 열쇠로 주어져 있습니다.
즉 여기서 '넘겨'는 죄의 대가로 인한 응징, 형벌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입니다(8:32 등).
한편 오바댜가 아합 왕에게 엘리야 발견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곧 죽음과 동일시된 까닭은 10절이하, 특히 12절에서 발견됩니다.
즉 오바댜는 자신이 엘리야를 찾았다고 아합에게 알린 때에 만약 엘리야가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4) 오바댜는 모든 곳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음을 말합니다(10절)
“[10]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 이는 앞서 사르밧 과부의 맹세와 동일한 표현입니다(17:12).
그러나 이는 당시 아직 여호와 신앙에로 개종하지 아니하였던 사르밧 과부의 말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바댜는 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인물이고 여호와 역시 오바댜의 하나님이시지만 여기서는 보다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엘리야의 하나님'으로 호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왕하 2:14).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 이 말은 일종의 과장법적 표현입니다.
비록 아합 통치하의 이스라엘이 강력했다지만, 당대 근동의 패권을 온통 거머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가 모든 나라와 족속을 속속들이 뒤졌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노릇입니다. 16:29 주석참조.
여하튼 본절은 당시 아합이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즉 아합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한껏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아합이 당시 가뭄의 원인을 엘리야의 저주(17:1) 탓으로 생각했기 때문인 듯합니다(17절).
그러므로 그 저주를 해소하려는 주술적 조처와 적개심 때문에 아합은 그토록 열심히 엘리야를 수배했을 것입니다.
5) 이제 당신의 말대로 당신이 여기 있다하고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당신이 떠나 버리면 내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 말합니다(11,12절)
“[11]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네 주. – 여기서 '주'라는 말은 '아돈'으로 일반적인 군주(君主)나 주인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본절에서는 오바댜가 섬기던 당시의 이스라엘 왕 아합(Ahab. B.C.874-853)을 지칭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
오바댜가 '여호와의 영', 즉 하나님께서 돌연하고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엘리야를 그 어느 곳으로 이동시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바댜의 염려는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을 초자연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믿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영(靈)이 이와 같은 돌연하고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빌립(Philip)을 옮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행 8:39).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 여기서 '어리다'는 말의 기본형인 명사 '나아르'는 이유기(離乳期)에서 사춘기를 지난 청소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폭넓은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경에서 이제 겨우 젖뗀 유아 모세와 다 자란 압살롬을 똑같이 '나아르'로 부르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출 2:6; 삼하 12:16; 14:21; 18:5).
그러므로 '나아르'는 한 인간의 개체적인 틀이 거의 완성, 고정되는 중요한 시기를 지칭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바댜는 바로 그처럼 중요한 시기에 여호와를 향한 신앙을 훈련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의 신앙이 가진 안정성, 확고성을 가히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6) 오바댜가 하나님의 선지자 백명을 먹인 일을 말합니다(13절)
“[13]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 오바댜는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려고 이와 같은 말을 하는게 아닙니다.
더군다나 오바댜가 선지자들에게 피신처와 음식을 공급한 것은 극비리에 진행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댜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이 엘리야와 한 편에 속하는 사람임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엘리야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여실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즉 오바댜는 엘리야가 여호와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러한 비밀스러은 일조차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7) 오바댜가 엘리야가 여기 있다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라 합니다(14절)
“[14]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이제 당신의 말씀이...나를 죽이리이다. - 이러한 말 가운데서 우리는 오바댜의 당혹감과 불안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당시 오바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아합과 맞닥뜨리는 죽음의 위협에서 분명히 빼돌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12).
그리고 그 사실은 자신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바댜의 그 같은 염려는 아직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빚어진 기우(杞憂)임(15절)이 이내 드러나고 맙니다.
8) 엘리야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 맹세합니다(15절).
“[15]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
만군(萬軍)의 여호와. - 여기서 '만군'(체바오트)이란 곧 '군대들'(armies)을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호칭하는 경우는 구약에서 261회나 됩니다.
본래 이 명칭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삼상 17:45)을 뜻하였으나 후에는 점차 천군 천사를 다스리는 하나님(22:19)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이 말은 강한 군사적 의미와 함께 온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삼상 1:3 주석 참조.
한편 '만군의 여호와'란 호칭은 열왕기에서는 처음으로 본절에 등장하였습니다. 이 호칭은 이사야, 예레미야 등 예언서에 많이 등장합니다(사 1:9; 2:12; 8:13; 렘 6:6; 20:12; 32:14).
오늘 날. - 학자들 간에는 여기서의 '오늘 날'(하욤)이 꼭 문자대로의 오늘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bahr).
물론 '하욤'을 문맥과 함께 '지금' 혹은 '이번에는'과 같이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합을 꼭 만날 것이라는 엘리야의 결의에 찬 표현으로서의 본절은 그대로 '오늘'의 의미로 두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엘리야는 사명에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오바댜는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오바댜는 엘리야 선지자를 만났습니다.
오바댜는 엘리야을 만남으로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움에 있을 때에 만나 주십니다.
오늘도 주님을 만나 모든 문제를 해결 받는 하루 되시길 축복합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삼년 만에 하나님은 비 주실 약속을 하시고 엘리야에게 아합을 찾아가게 하십니다(1,2절).
하지만 지금은 극심한 가뭄과 기근으로 엘리야에 대한 아합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고,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학살하던 험악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는 사명에 온전히 순종합니다.
‘그 많은 날 동안’하나님의 능력을 생생히 경험했기에, 아합을 찾아가는 그의 발길에 두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오늘 내게 허락된 시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또 새로운 일을 위한 준비요 과정임을 잊지 맙시다.
2) 이세벨이 선지자들을 색출하여 학살할 때 아합의 왕궁 대신 오바댜는 목숨을 걸고 선지자들을 숨겨 주고 먹을 것을 공급해 주었습니다(3,4,12,13절).
왕과 국가 종교정책에 반하는 행동이지만, 그는 자신의 참 군주가 누구인지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오바댜처럼, 상황과 두려움을 뛰어넘는 사명자입니까?
주께 받은 사명에 충실할 때, 주님은 그 헌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실 것입니다.
3) 가뭄 재앙이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과 엘리야 때문이라고(17절) 백성을 선동하기 위해 아합과 이세벨은 저항 세력을 먼저 제거합니다(4~6,10절).
엘리야를 죽이려고 나섰지만 그가 숨어 버리자(17:3)남은 선지자들을 모조리 처형하기 시작합니다.
3년 기근으로 드러난 바알 신화의 허구를 숨기고, 기근이 우상숭배 때문임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합이 찾을 것은 물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이고,
지킬 것은 자리가 아니라 백성의 안위였습니다.
떳떳하지 못한 자리나 일을 도모하고 있다면 더 큰 재앙을 초래하기 전에 어서 일어나십시오.
4)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신앙을 지켜야 하는 위험한 시기에 엘리야가 나타났으니 오바댜는 걱정 반, 기대 반이었을 것입니다(7~15절).
오바댜가 은밀히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호했다면, 엘리야는 공개적으로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명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충성이 사명의 자리보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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