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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7장24~30절
제목 :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
요한이 보낸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이제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향하여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강한 경고의 어조로 말씀하셨을 때,
무리들이 듣고 요한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구속사의 흐름에서 차지하는 요한의 중요한 위치를
분명히 주지시키기 위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요한을 증거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회개를 외칠 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그것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서 모였었다.(3:2-14).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누구인지 모르고,
또 그의 설교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요한이 어떠한 인물이며 그가 왜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의 요한에 대한 자문 자답
예수님이 스스로 자문 자답의 첫 질문은
1)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4절)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이 질문과 바로 다음의 질문(25절)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답변으로 이끄는 풍자성이 강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흔한 갈대를 보기위해 굳이 험한 광야로까지 나갈 필요는 없겠기 때문입니다.
유대 광야에서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흔하고 하잘것없는 갈대처럼,
요한이 약하고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 땅에는 일신의 부귀와 안락을 위해 마치 바람 앞에 선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 양심마저 팔아 넘겨버리는 배도자(背道者)들과 매국노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여론이나 세상의 유혹에 동요되지 않고 거룩한 소명에 충실한 사람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의강직성은 헤롯과의 충돌 사건을 통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헤롯의 악행은 묵시적으로 방관 될 뿐,
누구 한 사람 감히 이를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이 범죄를 공공연하게 책망하다가 결국 옥에 갇힌 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헤롯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저지른 불륜의 관계를 책망하고
또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다가
헤롯에 의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2)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25절)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알라) - 화제를 새로운 초점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너희가 갈대를 보려고 나간 것이 아니라면 너희가 보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의미입니다.
'부드러운 옷'이란 곱고 감촉이 부드러운 값비싼 옷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요한은 거칠고 값싼 약대 털옷을 입었음으로(막 1:6)
이와는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당시 대다수의 서민들은 로마의 식민지의 상황에서 수탈과 착취로 인해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고 다녔음에 비해,
고관 대작(高官大爵)들은 그들의 지위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매우 값비싸고 화려한 옷들을 걸치고 다녔습니다.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사치하게 지내는'이란 원어상으로'건강을 해치다','쇠약해지다'는의미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결국 건강을 해치기까지 흥청거립니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상황을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 고관대작들이 호의호식하면 할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핍절해 감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황폐한 곳에서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먹으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권력자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귀에 달콤한 말만 골라 들려주었더라면 근사한 옷과 음식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궁의 회유 따위에 넘어 가거나 무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의 치부까지도 과감히 책망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자요
또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왕궁에 있느니라 - 헤롯의 왕궁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삶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지금 마캐루스(Machaerus) 요새에서 낡고 거친 외투를 입은 가련한 죄수로서 있습니다.
3) 선지자냐 (26절 상반절)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위대함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무리들에게 두 가지 풍자적 질문을 자문자답 형식으로 던지셨습니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 질문은 요한이 선지자 혹은 그보다 탁월한 자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서곡으로 볼 수 있습니다 .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선지자를 그와 인격적인 접촉을 얻기 위하여, 즉 그의 말과 그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려고 한다'는 의미입니다(R.C.H.Lenski).
“옳다”고 말씀합니다.
한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우신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2)환난과 고난 중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기 위함입니다. (3)하나님과 그의 창조에 대한 사실들을 계시하기 위함입니다.
(4)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취해야 될 행동에 대한 정보를 주기위함입니다.
(5)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나 예언자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6)장차 메시야를 통해 절정에 이를 위대한 구속 역사의 맥을 잇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관건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느냐는 것인데,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3:2).
*눅3: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따라서 요한은 분명히 선지자였습니다.
2. 예수님의 세례요한에 대한 평가
1) 선지자들보다 훌륭한 자(나은 사람)(26하반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나은) 자니라 - 원문대로 번역하면 '선지자 이상의 어떤 자'(페리쏘테론 프로페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그 어떤 선지자보다 탁월한 이유는
(1)그의 활동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단적 예로 사 40:3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말4:5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여기에서 예언된 '선지 엘리야'란 바로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2)그의 사역의 위대성 때문입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직접 그 메시야를 보고 그를 증거하며,
또한 회개의 세례를 통해 메시야의 첩경을 평탄케 한 위대한 선구자였습니다(27절).
2)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러 온자(27절)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기록된 바 - 예수님께서는 말 3:1에 예언된 말씀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키셨습니다.
*말3: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완료형 '게그랖타이'는 '지금도 기록되어 있다'(has been written)는 의미입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주님께서 이 예언을 인용하실 때에 구약의 원문 그대로 하신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여 인용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를 '메시야 앞에'로 해석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메시야이신 자신이 일체(一體)인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네 길을 예비하리라 - 요한은 메시야의 직접적인 선구자로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1:29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선포함으로 메시야의 출현을 명백히 선포하였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회개를 외치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3:7-14;마 3:2).
또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겸손히 말하면서 구속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 말라기의 예언이 세례 요한과 메시야이신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언하는 말씀이다.
3)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자(28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 인간의 죄성과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을 강조합니다(시51:5).
요한은 비록 죄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모든 사람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의 생애와 활동을 볼 때 그만큼 위대한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결코 요한의 위대함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가 비록 위대한 선지자보다도 큰 자라 하여도 그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비교할 때는 상대적로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증거하는 등 사역 면에서 구약에 속한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탁월하였지만,
계시의 점진성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여전히 옛 언약이 속한 옛 세대의 사람이었고,
신약의 예비 단계에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신약에 속한 성도들은 세례 요한과 같이 강하고 담대한 활동을 보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른 하나님의 계시를 밝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큽니다.
신약의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이해하며,
신.구약 66권으로 구성되어 기록된 계시의 완결서를 늘 묵상할 수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성도의 심령 속에 내주하사,
영적 안목을 뜨게 하며 삶의 바른길로 인도해 주십니다(딤후 1:14).
예수님의 의도는 요한의 활동 이후에 온 시대의 변화에 중요성을 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3. 백성들의 반응(29~30절)
1) 백성들과 세리들(29절)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 모든 백성들이란 말 안에는 당연히 세리들도 포함되어야한다.
그러나 세리들이 따로 구별되어 소개되어 있는 것은 이들이 그 당시 일종의 사회적 계급의 한 부류로서 마치 별개의 족속처럼 취급될 정도로 동족 유대인들로 부터 미움과 배척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3:12,13;5:27-30).
이들이 미움과 배척을 받은 것은 로마 제국의 앞잡이 구실을 했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거두워 들인 세금을 관청에 보고하고,
남은 여분의 세금은 자기들의 몫으로 착복하였습니다.
랍비 문헌에는 이 세리들이 강도와 동일하게 분류되어 나타나고
공관복음서에는 모두'죄인들'로언급됩니다(5:30;7:34;마9:10;11:19;막 2:15).
이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로마 압제자들에게 아부하여 자기 동
족을 희생시켜 치부(致富)하고자 하는 변절자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 3:12 주석 참조. 누가가 '요한의 세례'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통용된 관례에 의한 표현법입니다
(20:4;행 18:25;19:3).
요한의 세례는 두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1)메시야적 내지는 종말론적 예비 교육의 측면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임무가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소개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장차 메시야를 통해 시행될 성령 세례의 예비 단계로서 물 세례를 시행하였습니다(마 3:11).
*마3:11“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2)세례 받는자의 생활 변화의 측면입니다.
당시 대부분 유대인들은 단지 혈통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으로 자긍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들이 메시야를 통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와 구체적 삶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마 3:7-9).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 이 말의 의미는 무리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하나님의 지혜와 자비를 깨달아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다'라고 선언했다는 뜻입니다.
2) 바리새인과 율법교사(30절)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하므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율법사'에 해당하는 '노미코스'는 '서기관'(그람마튜스)과 동의어로 쓰였습니다(5:21;10:25;11:45,46,52,53;14:3;마22:35).
이 말은 마 22:35를 제외하고는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말인데 이는 누가가 '그람마튜스'라는 말보다 '노미코스'라는 말을 이방인들이 듣고 쉽게 이해하리라는 생각에서 사용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상반된 두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스스로 하나님께 열심있다고 자랑하는 소위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을 배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던 반면, 세리들과 같이 외견상으로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소외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오히려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율법사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연구에 헌신한 사람들이어서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나 그 속에 감추어진 근본적인 메시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율법의 조항들 자체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