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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6장25~33절
제목 : 아버지의 사랑
16장16~24절에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를 들어
고통을 거친 후 기쁨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을 설명하십니다.
그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어,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6장25절~33절은
예수님은 때가 되면 비유 없이 밝히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직접 아버지께 기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게 되었고,
그런 제자들을 향해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선언 하십니다.
1. 아버지와 회복된 관계(25~27절)
“[25]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16:25“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이것'은 14:1에서 16:24절까지 말씀하신 것으로,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유들을 말씀 합니다.
때가 이르면...밝히 이르리라 -
'밝힌다'는 동사는 10:24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 자신의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했던 곳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숨기는 것과 밝히는 것을,
그 이유를 깨닫는 집단과 그것을 깨닫지 못한 집단을 대조시켜,
설명하시지 않고 '때'라는 단어와 연결시켜 설명하십니다.
본절에서는 비유의 깊은 뜻에 대한 이해의 유무가 마가의 기록처럼(막 4:11) 제자이냐, 아니면 막연한 집단이냐에 따라 구분되었다기 보다는,
그 계시를 밝히시는 때에 의하여 비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에 따라 구분됩니다.
즉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했던 모든 무리들(제자들 포함)과 부활을 경험한 무리들 사이에 대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비밀을 밝히 알리시는 '때'는 직접적으로 부활 이후,
곧 성령의 오시는 때를 의미하므로,
예수님과 지상 생애를 함께 했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오시는 때에 가서야
성부에 관한 것을 포함한 모든 비밀을 알게 될 것입니다.
25절, “때가 이르면”은, 32절, 때가 오나니와 함께
이는 “그 시간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그 뜻을 분별하기 어려운 비유로 말하는 시대가 지나가고 분명하게 말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씀이고(25절)
또 하나는 그의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기도하는 시대입니다(26절)
기도는 새 시대의 특징입니다.
기도의 시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시대가 아니라,
제자들이 그이 이름으로 기도하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므로 그의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시대가 도달할 것입니다.
이 시대는 28절에서 예수님께서 밝히고 있듯이 그가 아버지로부터 이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이제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다가오는 새시대입니다.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성령을 통해서 비밀을 밝히 알게 되면,
제자들은 마땅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능력이 생길 것입니다(23절).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로는,
구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14:16이나 17:9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14: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17:9절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메이어(Meyer)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4:16과 17:9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기도는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의 기도를 의미하므로,
본절의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요한이 요일2:1절에서 “보혜사 성령이 오신 후에도 예수님이 성부 앞에서 대언자로 성도를 위해 활동하신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 8:34과 히9:24-26 역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가 성령의 오심 이전이나 이후나 계속되고 있음을 명백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부활하신 후에도 지속됩니다.
그러나 세상에 게신 동안에는 보좌를 향해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17장).
따라서 본절은 성령이 오신 후에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멈추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여러 가지로 기도하셨던 것과 같은 기도를 멈추신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에 의해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7절은 그 이유를 한 걸음 더 나가서 설명해 줍니다.
27절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본 구절에서 '친히'는 '자의적인' 또는 '자발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사랑은 오직 당신 스스로의 자의(自意)에 의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요일 4: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 제자들의 깨달음과 고백(28~30절)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16: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요한은 본서를 시작할 때 아버지로부터 오신 아들의 신성과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의 비밀과(1:1-14) 아들을 통한 구속사역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 이것을 다시 한번 요약하는 것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는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이처럼 본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오고 가심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기원이 결코 세상이 아님을 밝히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자신을 정치적 메시야,
곧 세상적 메시야로 생각하며 그러한 메시야로 삼으려는 자들의 의도가 전혀 소용없음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심은
성령의 오심에 대한 확실한 조건이요 신호입니다.
16: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
제자들은 실제로 예수님의 비유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10:6).
*요10:6절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31, 33절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밝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했다면,
체포되던 스승을 버려두고 도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감추어진 비밀에 대하여,
조금 이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절과 같이 말한 것은 약간의 과장이 포함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었으므로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모든 것을 온전히 아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 이십니다.
단지 제자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다 아십니다(2:24, 25).
*요2:24~25절“[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의문을 아시고(19절),
그 의문을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같은 예수님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아직 지극히 연약하여,
그들이 고난을 극복할 만큼의 믿음은 되지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 본절(30절)과 29절에서 언급된 제자들의 고백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마 26:33).
*마26:33~34절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생각대로 실현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마 26:41).
그들은 스승 앞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한 것처럼 대답했으나,
어디까지나 그들의 이해는 아직 불완전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32절의 말씀은 예수가 굳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3.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1~33절)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16: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는다는 고백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구절은 앞뒤 문맥에 따라서 조심스럽게 상세히 검토함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다는 고백(30절)과 예수님을 떠나게 되는 배신(32절) 사이에 본절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성을 지적하고 그들의 신앙적 한계를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절을 이와 유사한 13:38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13:3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13:38에서 예수님의 질문은 반어법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없음을 강조한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본절은 32절에 비춰볼 때 분명히 반어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했으나
아직 자기 목숨을 버릴 만큼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나
그들의 믿음은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반어법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의 사랑을 무시했거나 제자들의 믿음을 무시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아직까지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불완전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성령 강림 때까지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 기다리라는 권고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흩어지고'는 원래 '뿌려 버리다'를 뜻하는데,
10:12에서는 이리에 의하여 흩어지는 양떼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본절에서 예수님은 슥 13:7에 언급된 예언을 인용하셔서 제자들에게 적용시키셨습니다.
*슥13:7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그 흩어짐은 이리떼 같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예언대로 제자들이 흩어진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하는 증거 중에 하나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방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그 밤에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나 각각 자기의 길로 도망해 버렸습니다(마 26:56).
*마26:56“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끝까지 주를 따르겠다고 말하던 베드로조차도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하는 연약함을 보였습니다(마 26:33, 34).
그래서 예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홀로 남게 되시는 고독과 더불어 고통의 십자가도 지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철저한 배신과 사랑하는 자들의 흩어짐 속에서,
고통의 절정에 이르신 후 승리를 얻으셨고 이 승리를 통해 교회가 출발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토록 연약했던 제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출발하였다는 사실은
그 출발의 궁극적인 기원이 제자들의 용기와 지혜에 있지 않음을 증거합니다.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이 표현은 고별 설교에서 여러번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과 관련된 내용은 각기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들이 이루어질 때에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함 (13:19;14:29).
(2) 제자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15:11).
(3) 환난 때에 예수님의 말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14:4).
(4) 본절에서는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칭하는 바를 고별 설교(13-16장)로 국한시키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적인 것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 것입니다(14:27).
*요14:27절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이 평안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지만 마음으로 누리는 기쁨(22절)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또한 성령의 열매인(갈 5:22) 이 평안을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라 -
제자들이 담대(膽大)해야 할 대상은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환난입니다.
이 환난은 상반절에서 언급된 평안과 대조되는 용어이면서 동시에 그 둘이 나오게 된 출발점 역시 대조됩니다.
즉 환난은 세상에서 나오며, 평안은 예수님 안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심같이 평안도 환난을 이긴다는 약속이 보장됩니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담대하라고 권면하셨던 것입니다.
*마 5: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여기서 세상은 바로 앞에서 언급된 세상과 약간 구별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 인간들이 생활하는 영역을 지칭하지만
본 구절에서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대적자들과 사단의 무리 및 그 세력을 가리킵니다(12:31;14:30).
예수님이 싸우는 대상은 전자의 의미를 지닌 세상의 통치자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정치적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기었노라'(니카오)란 표현은 본서 외에 요한의 서신서에서도
영적 승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습니다(요일 2:13, 14;4:4;5:4, 5).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의 승리를 묘사함에 있어서
동사의 완료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완료형은 본절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으므로 아직 부활의 승리 역시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료형의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그 승리가 미래의 일이지만 완전히 확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부활'로써 사망의 왕 노릇하는 자들로부터 승리를 거두셨으며(롬 5:12, 14;딤후 1:10) 세상을 정복하셨습니다.
이러한 승리에 대한 완료 시제는 승리의 영속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승리는 그리스도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와 연합한 모든 자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